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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58793090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17-09-13
목차
지은이의 글 ___ 5
제1부 추억의 샘
가슴에 피어있는 패랭이꽃 13
가을의 상념 17
그리움의 4월 21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24
노들나루공원 28
눈이 내리네 32
느티나무 36
미소가 좋다 40
별과 실론티 44
수필 교실로 이끈 인연 48
아카시아 신드롬 52
오후 다섯 시 57
장미꽃이 필 때 61
총각 채소 과일 가게 65
하이힐 트라우마 69
제2부 외국생활과 여행
돌아오지 못한 선원 75
백 변호사와의 인연 79
베사메 무초 83
여심 난독증 87
영화 ‘히말라야’와 기억 저편 91
여수와의 인연 95
공항에 놓고 온 여행의 즐거움 97
백두산에 오르다 101
변강쇠와 옹녀 105
성인 프란체스코를 만나다 109
압록강의 잔상 113
해맞이와 새해 소망 117
히말라야, 묵언의 가르침 121
제3부 문화의 향기
절망에서 피어난 꽃, 프리다 칼로 127
당구, 또 하나의 즐거움 131
산골청년 야외오페라를 감상하다 135
찜질방 도전기 140
개구리가 없어 인생이 한스럽다 144
운칠기삼 148
제비꽃 152
진정한 베풂 155
‘예산’과의 첫 만남 159
제4부 나의 이야기
과묵에 대한 변명 165
나의 아버지 169
대머리의 변 173
매미 177
삶과 함께한 유행가 180
손녀 세나 185
영양 고추 189
옻 타다 193
외롭기에 살아 있는 것이다 197
홍조의 낭패감 201
평설 / 삶의 길을 찾아 나선 낭만적 글쓰기 - 성기조 ___ 205
저자소개
책속에서
가슴에 피어있는 패랭이꽃
오랜만에 해외 생활에서 돌아와 찾아간 고향집 뒤안길에 패랭이꽃이 피어 있었다. 아련한 첫사랑을 만난 듯이 설레고 기뻤다. 너무나 익숙해 의식하지 못 한, 벽에 걸린 액자처럼 늘 가슴에 피어있던 그 꽃을 민낯으로, 날 것 그대로 그날 다시 만났다.
젊은 날 어느 초여름이었다. 긴 가뭄이 이어지고 뙤약볕이 정수리에 화톳불을 놓은 듯 뜨거웠다.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이 삭막한 나의 청춘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 가득 찬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떨쳐버리려 뒷산으로 향했다. 누런 맨살을 들어낸 길섶의 흙둑에 한 떨기 패랭이꽃이 붉게 피어 있었다. 온 정신을 빼앗아간 알 수 없는 황홀함과 비장감이여! 그 후 그 꽃은 가슴 속에 활짝 핀 나의 꽃이 되었다.
내 고향은 경북 영양이다. 산 좋고 물 좋은 산골이다. 뒷산은 스스로 겸손하여 나지막하게 엎드려 있다. 앞내는 청아하게 반야심경을 읊조리며 스스로 낮은 곳으로 임한다. 산야에는 갖가지 야생화가 사시사철 피어난다.
잔설이 남아 있는 앞산 바위틈에 피어나는 산매화는 고귀한 향내가 나는 사촌 누님 같고, 샛노란 꽃이 잎보다 먼저 피는 산수유는 질투심 가득한 여인 같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앞뒷산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달래는 수줍은 새아씨 같고, 철쭉은 각혈로 요절한 시인같다.
코스모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의 쓸쓸함과 외로움에 속이 깊어진 노총각 같고, 연 보라색 도라지는 시집 못가 애가 탄 노처녀 같다. 그에 비해 거친 들판에서 피어나는 패랭이꽃은 인고의 세월을 이긴 지조있는 선비처럼 고고하다.
패랭이꽃은 옛날 신분이 낮은 백성들이 쓰고 다니던 패랭이 모자를 닮아 붙은 이름이다. 생김새는 앙증맞고 귀엽지만, 곧은 줄기는 강인한 선비의 절개가 느껴진다. 만고풍상으로 이마에 주름 고랑이 팬 촌로의 고단함도 보인다. 계단밭두렁 척박한 토질에서 피어난다. 기름기없는 황토에서 오뉴월 작열하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서인지 꽃잎에는 선홍빛 정열이 배어나온다. 꽃잎에 있는 가느다란 모세혈관에는 생존의 치열함이 묻어나고, 꽃잎 가장자리의 물결무늬에는 세월이 흘러간다. 같은 뿌리에서 태어나서 여러 개의 줄기로 나뉘어 피는 꽃은 하나하나가 한껏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면, 솜털이 떨리는 전율과 가슴 먹먹한 희열이 교차하는 황홀경에 이른다. 그야말로 논개의 悲壯美비장미가 느껴진다.
패랭이꽃의 꽃말 중의 하나는 순결한 사랑이다. 별빛이 초롱초롱한 여름밤이면, 그 꽃의 짙은 향기가 산들바람을 타고 산촌으로 스며든다. 꽃향기에 취하여 오순도순 개울가로 모여든 청춘은 도란도란 마음을 주고받는다. 두 그림자가 달빛에 투영되어 물가에 어리면, 들켜버린 속내에 서로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다. 그렇게 아름다고 순수한 패랭이꽃 사랑이 시작된다.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에 어버이와 스승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린다. 무한한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서다. 그런데 카네이션은 서양 패랭이꽃이라 왠지 우리에게는 생경스럽고 어색하다. 패랭이꽃이 아담한 동양 어머니라면 카네이션은 키 큰 서양 아버지 같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귀여운 손녀가 패랭이꽃처럼 예쁘고 곧게 자라, 훗날 어버이날에 패랭이 꽃 한 송이를 안겨주기를 바래본다.
어느 날 아파트 화단에서 패랭이꽃을 만났다. 왠지 안쓰러웠다. 섬유질만 먹다가 기름진 고기를 먹고 배탈이 나고 만 산골소년의 아픔이 기억되었다. 농투사니의 아들은 어느 해 겨울,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고 비빌 언덕도 없는 서울에 가까스로 발을 들어 놓았다. 믿는 건 오직 산비탈과 밭이랑에서 단련된 육신과 서기어린 아침공기를 마시며 닦아온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뿐이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라야 한다는데, 흙을 떠난 인생여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어려움이 봉착할 때는, 그 날의 패랭이꽃을 회상하며 다시 힘을 내어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고독하고 외로운 유랑자와 같은 삶에도 패랭이꽃은 늘 가슴에 피어 있었다. “결코 좌절하지마라”고 속삭여 주었다. 그 꽃은 인생길의 또 하나의 동반자이고 신앙이었다. 삶의 고비마다 의지할 수 있는 큰 힘이었다.
가을의 상념
‘시몬, 그대는 들리는가 낙엽 밟는 소리를···’. 모윤숙의 ‘렌의 애가’가 흥얼거려진다. 어디선가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을은 그렇게 우리 곁에 다가온다. 한 폭의 아늑한 수채화같이 색색의 물감으로 자연을 수놓고 심연에 켜켜이 쌓아놓은 추억의 편린들을 슬며시 불러낸다. 예쁘게 그려놓은 단풍잎 위에 까만 글씨로 애틋한 마음을 전해주던,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녀와 억새꽃이 하얗게 핀 뒷산에서 복싱으로 끓는 피를 식혔던 고교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가을은 여름내 태양의 정열을 품은 나뭇잎들이 붉은 빛, 노란 빛, 또는 갈색을 뿜어내다가 소슬바람을 타고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형형색색의 가을빛은 찬란하되 공허하다.
사위에서 풍겨오는 가을정취에 이끌려 인근 공원으로 향했다. 숲속으로 난 산책로는 동화 속의 오솔길 같이 아름답다. 어저께 내린 비로 낙화한 듯한 아기 손 같은 단풍잎, 노랑나비 은행잎, 갈색 느티나무 잎이 조각보 모양의 융단 길을 펼치고 있었다. 가만히 지르밟으며 걸어본다. 낙엽들의 웅성거림이 왠지 애잔한 단조의 음으로 들린다.
무심히 바라본 숲속 길에는 서산꽃게가 옆걸음질치며 달아나고 있다. 여섯 개의 다리에 등이 붉은 꽃게다. 또 한 마리가 달아난다. 신기하여 다가가 보니 단풍잎이었다. 떨어진 단풍잎이 가을 햇살에 수분을 뱉어내고 등이 굽어 꽃게가 되었구나. 선들바람에 이리저리 게걸음질하는 모습이 앙증맞기 그지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숲길로 접어드니 아릿한 감성에 젖어든다. 풀썩 나무벤치에 앉아 무념무상의 사색에 잠겨 추억을 회상해 본다.
화가를 꿈꾸었던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화지에 단풍잎을 예쁘게 그리고, 그 위에 정성껏 쓴 까만 글씨로 가을의 마음을 전해 주었던 군생활 때의 펜팔 친구. 한 번의 만남조차 없이 안녕이란 인사도 없이 어느 가을날 갈색추억만 남긴 채 떠난 버린 그녀가 문득 생각난다.
억새꽃 피어있는 뒷산에 올라 복싱글러브를 끼고 싸움을 한 바탕하고 나서 서로 지친 채 잔디밭에 쓰러져 함께 파아란 가을하늘을 바라보았던 고교친구. 캄캄한 현실에도 희망의 앞날을 얘기하며 파아란 꿈을 꾸었던 친구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가을향기를 느끼고 있을까.
가을은 또 산골 초등학교 운동회 날을 추억하게 한다. 교문은 들국화, 담쟁이 넝쿨 등 온갖 가을꽃과 풀로 장식한 꽃 터널이 되고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인다. 어린이 음악대의 행진곡 연주가 시작되면 어린아이와 어른들이 모두 함께하는 잔치가 펼쳐진다. 어린이들은 청군?백군 응원에 따라 운동장에서 달리기, 기마전, 매스게임에 여념이 없다. 구경 온 인근 동네 주민들은 자기 자식 응원하다 막걸리 한 사발로 훈훈한 정을 나누며 이웃 간의 우의를 다진다. 운동장 구석에 임시로 마련된 식당 가마솥에서 끓어내는 계장국 맛은 견줄 데가 없다. 폐교된 그 학교 운동장에서는 지금도 그날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며칠 전 고향 가는 길에 영주 부석사에 들렸다. 단풍잎, 은행잎, 갈참나무잎으로 깔린 산사로 이끄는 길은 마치 피안으로 인도하는 듯 했다. 산사의 단풍은 순교자 이차돈의 순결한 피로 물들인 듯 투명한 선홍색이 그곳이 淨土정토인양 신비감을 주었다. 色卽是空색즉시공, 눈에 보이는 현상은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이니···. 무량수전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보고 내려오는 길은 마음이 맑아졌다.
사계절 중에 나는 특히 가을을 좋아한다. 아니 천생적으로 좋아해야 한다. 나의 얼굴은 가을산과 같이 붉은 기가 어려 있다. 햇볕을 쬐면 더욱 홍조가 더해진다. 한 잔한 듯한 얼굴이라 민망할 때도 있고 오해를 사는 일도 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야외놀이로 태양을 가득히 머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가끔 어른들로부터 어린 것이 낮술을 하고 다닌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술은 30대가 되기까지는 거의 하지 못했는데도 변명하지 않았다. 풍성하고 넉넉한 가을을 닮은 사람은 억울해도 다 품어 안는 법이다.
가을은 참 묘하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풀꽃은 메말라 가는데 추억은 건조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시몬, 그대가 떠난 어딘가는, 나는 그대의 발자취를 따라 먼 길을 가고 싶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