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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60215030
· 쪽수 : 112쪽
· 출판일 : 2020-07-20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하산 13
조그만 호두나무 상자 14
구름아파트 1902호 16
늦게 와도 괜찮아,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18
병 속의 토끼 20
블랙홀 22
비 오는 소리 23
허공에 묻다 24
나는 내가 오래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26
새벽이 훤해진다 27
해 지기 전 28
연인들 30
첫사랑 31
담비를 찾아서 32
꿈을 꾸었다 34
Moon 36
제2부
한없는 자리 39
투명 고양이 40
늙은 매미 42
바람호수 44
개화開花 46
나는 내가 무섭다 47
응답 48
나무 의자 50
병꽃 피었다 52
숲 사잇길 53
너를 본다는 건 54
강아지와 하루 56
새 한 마리가 57
산보 간다 58
그러니까 뛰어 봤자 60
제3부
경계를 지우다 65
바람하고 노는 법 66
고양이의 하늘 67
하얀 밤 68
약속 69
구름낙타 70
구름코끼리 71
슬픔은 어디서 오나 72
집으로 가는 길 74
더없이 달콤하고 더없이 쓰디쓴 75
한 소식 76
물의 이름 77
까마귀 울음소리 78
사이가 좋다 79
생각하는 집 80
제4부
나를 실감하다 85
몸살 86
새 87
겨울, 천변 88
모자 89
슈퍼 문 90
세상에서 이쁜 짓 91
불면 92
수평선 93
동지 일기 94
그 흰빛 95
횡재 96
낮과 밤 97
고구마 줄기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98
꽃불 100
해설
이병철 경계를 지우려 가는 시, 지우고 오는 시 101
저자소개
책속에서
조그만 호두나무 상자
그날 고양이가 조그만 호두나무 상자 속으로 숨어들어 갔어요.
올해로 열여덟 살이었는데요. 한 며칠 허공을 딛는 듯 휘청휘청하더니
밥 대신 물만 조금조금 먹더니 몸을 아주 가볍게 만들더니 어둠 속에서
눈만 훤히 뜨고 나를 향해 무어라 무어라 마른 입술을 달싹였는데요.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들고 말았어요.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보았지요. 애들이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너간다지요. 그날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지개다리가 어딘가 떠있었나 봐요. 그렇게 가벼워졌으니 새처럼 훌쩍 날아올랐겠지요. 그리고 벌써 넉 달이 지나갔네요. 앞으로도 넉 달이 지나가고 또 넉 달이 지나가고 또 넉 달이 지나가겠지요. 무지개다리
아래로 위로 여전히 시간은 흐물흐물 흘러가겠지요. 꼭꼭 숨어서 숨소리도
안 들리는 고양이는 저 있는 곳으로 제가 좋아하는 햇볕은 잘 불러들이고 있는지, 그곳으로도 제가 다닐 만한 길을 만들어놓고 겁도 없이 혼자 잘 돌아다니고 있는지, 나는 다만 이곳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저쪽 세상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쩔 수 없이 고양이와의 모든 기억을 곱게 빻아 담은 조그만 호두나무 상자를 안방에 있는 유리 책장 안에 책들과 나란히 넣어두었어요. 나는 또 가끔씩 그 기억들을 꺼내 들고 고양이 이마를 비비듯 내 뺨에 가만히 비벼 보겠지요.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결국, 그러니까
바로 내가 그 조그만 호두나무 상자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요.
날이 갈수록 반질반질 닳아서 마침내 흔적 없어질 기억 상자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