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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라이트 노벨 > 앨리스 노벨
· ISBN : 9788960523043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4-01-30
책 소개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작가 후기
역자 후기
리뷰
책속에서
측실이었던 자작 부인은 사람들이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데 익숙하다.
자니스 윈그래드 자작 부인은 잘 정리된 방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급귀족에 속하는 남작가의 딸이었던 그녀는 분명 어느 정도는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 하지만 십 년간 측실로 지내온 탓일까? 그동안 누군가의 도움에 익숙해지게끔 길들여져서 타인의 손길에 대한 반발심이 옅어졌다. 측실이 아닌 본처가 된 지금조차도, 끝없이 뻗어오는 주변의 손길들을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전부 그 때문이다.
아침이면 타인의 손에 의해 커튼이 열리고,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에 억지로 눈을 뜬다. 침대에서 내려와 이미 준비된 목욕물에 몸을 씻고 나면 어느새 화사한 드레스로 치장된다. 미처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머리가 깔끔히 정돈되고 마지막으로 화장까지 받는다. 그렇게 완벽한 숙녀가 되어 아침 식사를 한다. 요리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 움직일 일이 없는 자니스는 배고플 일도 별로 없으니까. 물론 요리는 양은 적어도 그야말로 최고의 맛을 자랑했다.
마치 궁전에서 왕족에게나 대접할 만한 메뉴가 매번 눈앞에 펼쳐진다.
매일 잘 정돈되어 깨끗하고 아름답게 치장된 이 방에 변화는 없다. 기억하는 한, 일개 잡동사니부터 장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의 배치가 어제와 똑같았다. 차라리 다른 점을 찾는 게 더 어렵겠다 싶어 눈을 찌푸리는 자니스였다. 그리고 그런 방에서 사는 그녀 역시, 그 방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매일같이 단 한 치의 차이도 없이 그저 완벽한 자작 부인이 되어 살아가는 자니스는 그야말로 이 방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부인, 오늘도 아름다우셔요.”
“부인, 오늘 아침식사는 주방장의 신 메뉴랍니다.”
“부인, 오늘은 날씨가 좋은데 산책이라도 하시면 어떨지요.”
주변을 맴도는 하녀들은 언제나 미소 띤 얼굴이다.
마음깊이 자니스를 따르며 항상 그녀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다른 남자의 측실이었고, 게다가 이 집 주인인 자작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 자니스에게 어떻게 그런 태도일 수 있는지 그녀로서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무슨 다른 의도가 있나 곁눈질도 해보았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하녀들의 태도를 보며 곧 그런 생각도 그만두게 되었다. 본심을 숨기든 다른 이유가 있든 의심하기도 귀찮았다. 다 일이니까 그러는 거겠지.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런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자니스는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종일토록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다 필요 없어. 다 싫으니까 그냥 좀 혼자 내버려둬.”
그녀는 식사를 입에 댄 듯 만 듯 하더니 이내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요리가 맛없는 것도 아니고, 김이 피어오르는 홍차가 떫은 건 더더욱 아니다. 드레스가 별로일 리도 없고 헤어스타일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니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머, 부인. 그런 말씀 말아주세요.”
“맞아요, 부인. 이제야 기다리던 그날이 왔는데…….”
“너무 기다리게 해서 저희가 다 죄송한걸요.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라고요.”
사랑스러운 미소를 잔뜩 머금은 하녀들은 어딘가 뚱한 자니스의 표정을 신경 쓸 생각도 없는 듯했다. 뭐, 그도 그렇겠지. 오늘이야말로 이 집 주인이 돌아오는 날이니까.
후궁이 폐쇄되고 살 곳이 없어진 자니스를 받아들여준 남자. 이제는 남편이 된 윈그래드 자작은 당시 기사단 소속이었다. 그때 아직 기사 임기가 반년 남아있었는데, 임기 중에는 무슨 이유로든 기사단을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혼 역시 기사단을 잠시 빠져나올 명분은 못 되었던 모양으로, 그 결과 자니스는 이 저택에서 외로이 자작을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뭔가 심심풀이로 할 만한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시간만 축내며 내내 기다렸다.
“부인, 마리스 님이 돌아오셨습니다.”
평생 한번이라도 허둥댄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냉정했던 집사가 자니스의 방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니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을 열어도 좋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그녀 앞에 선 남자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자니스! 아……, 내 사랑스런 아내. 반년이나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젠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
밝게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 짙고 깊은 녹색을 머금은 눈동자, 선량한 미소. 기사단 생활 삼 년 동안 잘 다져진 다부진 몸. 그리고 귀족 차림새가 잘 어울리는 젊음.
그렇다. 이 남자가 자니스의 남편인 마리스 윈그래드 자작이다. 올해로 스물일곱인 자니스보다 열 살 어린, 열일곱 살의 남편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자니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