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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라이트 노벨 > 앨리스 노벨
· ISBN : 9788960523876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14-08-30
책 소개
목차
서장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제8장
제9장
제10장
종장
작가 후기
역자 후기
책속에서
“폐하, 안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일행분들이 도착하시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측근인 해롤드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실피드는 정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도착 예정 시간은 정오. 약간의 사정이 생겨 늦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선택에 망설임은 없었다.
‘어서……, 어서 오기를.’
드디어 그토록 원하고 원하던,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 품 안에 들어오게 된다. 지금까지 공들인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지만 그만큼의 시간을 들인 게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만전을 기한 상태로 그 사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다.
“일행분들이 보입니다!”
그때, 상황을 보러 갔던 병사가 파발마를 타고 달려왔다.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저 멀리 수많은 말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발을 내딛은 실피드의 뒤를 수십 명의 신하가 줄지어 따라갔지만, 평소대로라면 성가시게 여겼을 실피드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서서히 다가오는 일행에게 향해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선두에서 이끄는 국경 경비병 뒤로 몇 마리의 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를 타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다워서 무심코 얼굴에 미소를 띤 자신의 모습에 주변이 술렁였지만, 실피드는 신경 쓰지 않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었다.
제일 앞에서 무리를 이끌던 말이 정문 앞에서 멈췄고, 여행용 차림을 한 자그마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가볍게 말에서 내려와, 천천히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건강해 보이는 피부색과 생기 넘치는 표정은 어릴 적이랑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흑수정 같은 눈동자도, 조금 둥그스름한 코도, 그리고 자그마한 입술까지 그 모든 게 사랑스럽고 눈이 부셔 실피드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피이 오라버니.”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이 남아 있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실피드의 이름을 부르고는, 곧 아차 싶었던지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키고 한쪽 다리를 굽힌 뒤 어여쁘게 고개를 숙였다.
“가디아르의 국왕 실피드 레이갈 폐하, 직접 이렇게 마중을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스카 족 제2왕녀인 사라입니다. 이번에 가디아르 왕국의 정비로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성심성의껏 귀국과 레이갈 폐하를 섬기겠으니, 부디 백년해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공식적인 문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슴에 울려 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스카의 땅에서 만났을 때는 언제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실피드에게도 전혀 겸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역시 특별한 모양이다.
정중한 말투 또한 귀엽게 여기며, 실피드는 사라의 앞으로 가 그녀의 가냘픈 몸을 끌어안았다.
‘……드디어…….’
여느 여자들처럼 짙은 화장 냄새가 풍기지 않고 보드라운 꽃처럼 좋은 향기가 난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라 공주.”
“레이갈 폐하.”
“제 몸과 마음을 바쳐 공주를 지키겠습니다.”
속마음은 이 정도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실피드는 그토록 기다리던 존재를 품 안에 끌어안고 맹세하듯이 말했다.
주변의 삼엄한 광경을 보고 조금 긴장한 사라도 실피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몇 번 작게 끄덕였다.
사라는 망토 속에서 뻗은 가느다란 팔을 오들오들 떨며 그의 등 뒤로 감고, 실피드의 가슴에 뺨을 맞댄 채 대답했다.
“저도 폐하를 지키겠어요. 부부라는 건 그런 거잖아요?”
“사라 공주.”
아직 열일곱 살. 겨우 몇 명의 종자만 데리고 다른 나라를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실피드를 믿고 더욱이 지켜 주겠다고까지 말했다. 안정된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손을 뻗어 끌어안아 주는 존재가 그녀 외에 또 있을까?
“……폐하.”
사라를 끌어안고 가슴속에 떠오른 따스한 감정을 되새김질하고 있자, 측근 해롤드가 말을 걸었다.
시선을 돌리자, 모여 있는 신하들이 일제히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
무리도 아니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자나 적이라고 점찍은 자들에게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검을 내려치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소문의 ‘냉혈의 검왕’, 실피드. 그러나 사라를 대하는 그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그래도 해롤드가 말은 건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상관없는 인간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긴 여정으로 필시 피곤할 사라를 이곳에 붙잡아 두기에는 너무 가여웠다. 어서 목욕을 시키고 맛있는 음식을 베풀고 싶다. 오늘, 이날만을 위해 국내외에서 끌어 모은 식재료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실피드는 아쉬운 듯 품 안의 사라를 놓아 주었다.
그러나 물론 그녀의 어깨를 지키듯 감싸 안는 건 잊지 않았다.
“사라 공주, 아스카에서부터의 긴 여정으로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아…….”
“왜 그러십니까?”
“저, 아바마마의 친서를 전해드려야 하는 걸 잊어버려서…….”
분명 실피드를 만났을 때 전하라고 명령받았으리라. 방금 전에 내렸던 말을 향해 사라가 서둘러 달려가려 하자, 실피드가 부드럽게 그녀를 막아섰다.
“아스카 족장님으로부터의 친서는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우선입니다. 여행으로 쌓인 피로가 풀리도록 우선 목욕을, 그리고 방에서 느긋이 휴식을 취하길 바랍니다.”
실피드가 그렇게 말하자, 긴장하고 있던 사라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명백하게 안도하는 모습에, 덩달아 실피드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피이 오라버니.”
항상 부르던 식으로 다시 부르는 걸 보니, 분명 사라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도 실피드의 곁에 있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해 주는 건 기뻤다.
“자, 그럼 궁 안으로.”
더는 만날 수 있기를 애타게 바라는 시간은 없으리라. 사라는 실피드의 신부가 되기 위해 자신의 곁으로 와 주었다.
10년. 그것이 긴 시간이었는지 짧은 시간이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라를 향한 실피드의 마음이 깊어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사라가 실피드를 사모하기에도 필요한 시간이었으리라.
실피드는 오로지 사라만을 그 보랏빛 눈동자에 비추며, 곧 호화로운 새장이 될 궁전 안으로 사라를 정중하게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