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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중기(임진왜란~경종)
· ISBN : 9788963571706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6-04-30
책 소개
목차
책을 펴내며
01. 8:1 전설적 승리
02. 내 신원을 밝혀라
03. 전투를 준비하라
04. 거짓 역사를 벗겨 버리자
05. 왜적이 올 것이다
06. 준비된 자가 승리를 쟁취한다
07. 왜적은 강했다
08. 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어 주기는 어렵다
09. 우리는 사실과 다른 역사를 알고 있다
10. 백성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11. 왜곡된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
12. 훈련 안 된 병사는 군인이 아니다
13. 왜적의 선봉을 일거에 격퇴하라
14. 새로운 증거로 역사를 새로 쓰자
15. 가자, 왜적을 물리치러
16. 조선은 왜란에 대비해 전쟁준비를 하였다
17. 김시민을 진주 목사에 임명한다
18. 1년 6개월 동안 일본군 22만 명 중에서 10만 이상이 죽었다
19. 나를 따르라
20. 모두 내 백성이다
21. 일본군은 왜 이유 없이 후퇴했을까?
22. 명령만 내리십시오 목숨을 걸고 따르겠습니다
23. 역사 왜곡의 증거가 명백하다
24. 승리를 기획하라
25. 왜적에게도 약점이 있다
26. 선조 임금은 결코 무능하지 않았다
27. 왜적의 힘이 약해졌다
28. 진해성을 수복하라
29. 왜적을 물리친 주인공은 조선관군이다
30. 훈련한 대로 전투에 임하라
31. 왜적의 목을 쳐라
32. 조선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33. 창원성을 넘어라
34. 기필코 왜적을 몰아내겠습니다
35. 연합에 의해 전라도를 지켜내다
36. 기병과 보병의 연합작전을 펼치다
37. 이기는 맛을 알다
38. 황강 나루를 공격하다
39.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다
40. 진해성에서 또 승리하다
41. 전투는 우리가 맡는다
42. 꼭 승리해 주시오
43. 우리가 이긴다
44. 함께 싸우겠습니다
45. 어서 오라. 적들이여
46. 한 놈도 남기지 마라
47. 170문의 대포가 발사됐다
48. 곧 저들이 물러갈 것이다
49. 일본 가부키에서 조선의 목 없는 귀신이 김시민 목사이다?
50. 님이시여, 이대로 가지 마소서
51.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맺음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창원성 북문 밖에서 공격하고 있던 유숭인 장군의 부대는 후방에서 밀려오는 일본군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비를 하던 창원성 내의 일본군들이 북문을 열고 성 밖으로 나와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유숭인 부대는 앞뒤의 협공을 받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유숭인 부대는 양쪽의 협공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김시민 목사가 공격명령을 내렸다. 중군이 일본군 부대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창원성 북문의 좌측에 진을 치고 있던 부대가 성문을 열고 나온 일본군의 좌우를 공격했다. 유숭인 장군 부대만 상대하면서 전투를 치르고 있던 일본군 보병들은 어쩔줄 몰라 당황하면서 조선 기병의 칼에 쓰러져갔다. 목사가 지휘하고 있던 후방 기병들까지 전투에 참여했다. 적의 진영이 무너졌다. 전투장면을 지켜보던 창원성 주민들은 이를 지켜보며 응원의 함성을 질렀다.<창원성을 막아라·33>
얼마 지나지 않아 왜군 부대가 평지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왜군의 병력은 500명이 넘고 수송하고 있는 보급품이 많아 행렬이 꽤나 길었다. 왜군 부대 모두가 산길에 들어설 무렵 왜군 부대 선두가 가던 길을 멈추었다. 앞에 진주 관군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진 진주 관군은 진주 목사라고 크게 쓴 휘장을 두 개의 긴 장대에 들고 서서 왜군의 앞길을 막아섰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왜군이 ‘진주 목사’라는 휘장을 보자 아연실색하였다. 목사가 칼을 빼들었다. 이를 신호로 왜군 앞을 가로막은 진주 관군들이 활을 쏘았다. 길 양편 산 위에서 바위돌이 굴러 떨어졌고, 화살이 쏟아졌다. 왜군들은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뒤로 밀렸다. 선두가 뒤로 밀리자 왜적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왜군의 후미에서도 바로 사태를 알아차렸다. 왜적의 후미는 후퇴하여 평원에서 산 위를 보고 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던 왜군들은 진영 뒤로 숨었다. 하지만 이미 왜군의 절반 이상이 희생된 뒤였다. 왜적들이 산 아래로 쫓겨난 뒤로 진주 관군의 기병이 나타났다. 왜군의 진영 뒤를 성수경 판관과 정영식 부장이 이끄는 기병이 들이쳤다. <이기는 맛을 알다·37>
성 위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목사가 수신호를 기수에게 보냈다. 황색 깃발이 나부꼈다. 조선 병사들은 또다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성벽 사이에 금속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대포였다. 170문의 대포는 한꺼번에 발사됐다. 포탄은 가건물에 적중하였다. 포탄을 맞은 가건물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가건물 위에서 조총사격 준비를 하던 왜군은 포탄에 맞아 죽거나 다쳤고, 가건물이 무너지면서 땅 아래로 떨어졌다. 적군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가건물이 무너지자 화포는 적군 대열에 맞추어졌다. 대열을 갖추고 전진하던 적들은 포탄세례를 받고 우왕좌왕 하면서 쓰러져갔다. 적군 장수는 후퇴명령을 내렸고, 적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 동안 굳게 닫혀만 있던 동문이 열렸다. 열린 동문을 통해 조선 기마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 기마병은 후퇴하는 왜군의 중앙을 뚫고 전진하다가 좌우 양편으로 갈라져 적군의 배후를 쳤다. 조선 기병들은 뒤로 돌아 후퇴하는 적군의 행렬을 갈랐다. 적은 수의 적군들이 조총을 쏘며 저항하였지만 기병의 속도와 기세를 꺾지 못했다. 기병들은 그 동안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군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이미 사기가 꺾인 적군은 살길을 찾아 도망가기에 바빴다. <170문의 대포가 발사됐다·47>
“그렇지. 나도 동감이야. 《일본전사》 중간 중간에 조선의 주요도시를 점령한 일본장수의 이름이 나오지 않던가? 이들 중에 1차 출전군 명단에 없는 장수들은 추후에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 땅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면 되겠지. 그럼 결론은 무엇인가?”
“예.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전투를 벌인 일본군은 최소한 22만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1년 2개월이 지난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이들 중 1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이지요.”
“그래. 22만 명의 45%가 넘는 일본군이 1년 2개월 만에 조선 땅에서 죽었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9일 동안 25차례 치른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죽은 일본군을 계산하기 전에 말이지.”
“그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이 얼마나 죽었을까요?”
“그것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로서는 없네. 그런데 내 추정으로는 전투참여자 1/3 이상이 죽었다고 봐야 할거야.”
“당시 진주성을 공격하던 일본군 병력수는 9만 3천명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8박 9일 동안 일본군이 3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임진왜란에 참여한 일본군 22만 명, 사망자는 13만 명이니 1년 2개월 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60% 이상이 사망했다는 것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한 부대의 사망자가 1/3이 넘으면 그 부대는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60%가 사망했다면 그야말로 전멸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역사가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왜곡된 역사는 바뀌어야 한다·11>
“그런데 왜 역사에 마치 명군이 조선을 구한 것처럼 서술되었을까요?”
“그러니 역사왜곡 아닌가? 일본군이 조선군에 쫓겨 물러났다고 하면 조선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격이니 일본이 일시 물러난 이유를 조선의 힘이 아닌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다 보니 명군에게 그 공을 돌리는 것이지.”
“교수님. 그래도 의병의 공적은 크지 않나요?”
“의병의 공적은 크지. 그런데 문제는 아주 묘해. 의병을 폄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군의 역할이 더 크다는 것이야. 우선 병력 수만 비교해도 임진왜란 때 동원된 관군의 수는 총 16만 명에 이른 반면, 의병 수는 모두 합쳐봐야 3만 명을 넘지 않아. 또한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치른 당사자는 대부분 조선관군이고, 의병이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는 소규모이거든. 전투의 수만을 비교해도 관군 대 일본군의 전투는 총 31회였던 반면, 의병 대 일본군의 전투는 11회에 불과하지. 결론적으로 관군이 지리멸렬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없었어. 물론 의병이 많은 힘이 되긴 했지만.”
“예. 알겠습니다. 일본군을 맞아 싸운 당사자는 관군이고 의병이 보조적인 역할을 한 것인데, 상대적으로 의병의 공적만을 역사에 표현한 이유 역시 조선정부의 무능을 부각시키려는 일제의 술책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왜적을 물리친 주인공은 조선관군이다·29>
“일제강점 후 총독부가 조선에서 처음 시행한 일 중의 하나가 조선의 역사왜곡입니다. 총독부는 조선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한다는 명목 하에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 공무원과 경찰, 헌병대를 동원하여 조선의 서점, 향교, 가정에 있는 조선의 역사책 20여 만 권을 압수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조선사 왜곡에 필요한 사료만을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고 합니다.”
“음… 그렇지. 우리가 일본인이 저지른 역사왜곡의 흔적을 찾아야 해. 임진왜란은 공식적으로 조선과 일본이 처음으로 긴 기간 동안 대면한 사건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임진왜란에 대해 자기들 좋을 대로 역사왜곡을 해야 했던 것이지. 따라서 임진왜란 전 과정을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발견되거든.”
“예. 어떤 점에서 인가요?”
“임진왜란 전 과정에서 일본의 조선 역사관은 분명하지. 첫째, 임금이 무능하여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자신만이 살겠다고 도망갔다는 점. 둘째, 조정이 무능하여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는 점. 셋째, 관군이 무력하여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는 점. 위의 세 가지는 공통점이 있어. 조선은 백성을 지켜주는 국가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것 아닌가. 기본적으로 조선 정부가 무능하여 백성이 고생했다는 것. 한 마디로 역사적으로 조선정부는 무능하여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니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해야 조선백성에게 유익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 게다가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지 못한 이유를 명군과 의병에 돌리고 있지 않은가? 이것 역시 조선이라는 국가와 정부를 부정하려는 의도인 것이야. 이러한 일본역사가의 저술이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고착시키고 있지 않은가.” <역사 왜곡의 증거가 명백하다·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