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4600276
· 쪽수 : 235쪽
· 출판일 : 2010-04-23
책 소개
목차
제1장 그가 나를 훔쳐갔다
오픈 유어 아이스! / 골프 레슨 / 몽상공학자 / 물탱크 사내 / 노란, 잠수함과 저수지 / BANG
제2장 나도 그를 훔쳤다
헉슬리의 물탱크 / 더 게임 / 편집 당하는 일상 / 새로운 거주자들 / 물탱크 밖으로
제3장 새로운 시작과 끝
결혼사진 / 변태(變態) / 네 박자로 흐르다 / 모란 / 역습
제4장 물탱크여, 다시 한 번
도망 중인 일상 / 안녕, 모란 / 주검들 / 출근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세종은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눈을 치켜뜨고 물탱크 안을 훑어본다. 물탱크 안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물품들이 차례로 시야에 잡힌다. 옷이 담긴 종이박스, 세면도구, 책과 볼펜, 수첩, 밀봉된 봉지에 담긴 식빵과 우유팩도 보인다. 물탱크 거주자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용품들, 그래, 이곳에 물탱크 거주자가 있었지. 세종은 그제야 자신이 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제 주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때다.
세종은 엉망으로 뒤엉킨 머리카락을 버릇처럼 쓸어 올리다가 깜짝 놀라고 만다. 그리 길지 않았던 머리칼이 어느새 쑥쑥 자라나 귀와 뒷목을 덮고 있지 않은가. 그뿐 아니다. 털들이 얼굴을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콧수염이 입술을 뒤덮고, 턱수염이 쇄골 부위까지 뻗어 내려와 있다. 손발톱도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길게 자라나 있다. 이 상태로 거리에 나섰다간 동물원을 탈출한 유인원 취급을 받기에 딱 알맞겠다. 괴이쩍은 일이다. 바로 어젯밤 일 같은데, 이상하게도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만 같다. 대체 몇 날 며칠 동안이나 여기서 잠들어 있었던 걸까?
악몽 같은 현실이다. 하지만 악몽은 악몽일 뿐이다. 악몽이란 그저 비명과 함께 소스라쳐 깨어나면 그뿐, 깨끗이 지워지고 말지. 물론 여운이야 좀 남겠지만. 그래서인지 아직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뒤바뀐 상황이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생판 다른 사람의 일상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치자. 그게 가능할까? 전혀 딴 사람의 생을 대신 이어간다는 게 말이다. ‘나’의 현재는 과거의 집적으로 일궈온 것이다. 그 현재의 ‘나’가 내일을 살고, 그런 내일, 내일, 내일이 쌓여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는 거 아니겠는가? 어쩌다 이변이 벌어져 ‘나’ 아닌 타인이 ‘나’의 현재를 살아가게 된다면, 글쎄 과연 타인이 ‘나’의 내일을, 하루하루를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까? 차라리 몸까지 완벽하게 타인으로 변해버렸다면, 능청스럽게, 천연덕스럽게, 조금은 즐기는 심사로 타인의 일상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변신’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몸은 그대로인데, 일상적 상황만 바뀐 것이다. 곧 이런저런 문제들이 발생하겠지. 놈은 결국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 이곳 물탱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오던 대로, 각자의 생을 지루하게, 때론 헐떡이며 이어가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