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4950647
· 쪽수 : 246쪽
· 출판일 : 2014-01-27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열다섯 살이 되는 봄 날, 영신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사는 먼 친척오빠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오 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가정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두고 입이라도 하나 덜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가 내린 슬픈 결단이었다.
“오빠가 곧 고등학교 졸업하고 돈을 벌 때까지만……. 그럼 너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학교도 다시 다니고…… 알았……지? 영신아…….”
어머니는 채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그런 어머니를 보는 영신의 마음도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지만, 이미 돈을 번다고 서울로 떠난 언니에게서 연락도 끊긴 마당에 싫다고 고집을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집을 떠나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영신이 옷 몇 벌이 든 보따리 하나를 들고 친척오빠 강준구 사장의 집에 입성하던 날, 강 사장의 부인 손 여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열다섯 살이라고 하지만 누가 보아도 열두어섯 살로 보이는 마르고 작은 체구의 영신은 못 먹어서 그런지 얼굴에 버짐까지 피어있어서 그동안 은근히 경계를 했던 자신의 소심함에 웃음까지 나왔다. 그녀의 눈에 비친 영신은 영락없이 시골 촌뜨기에 미운 오리 새끼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남자를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세상에 남자란 남자는 곁에 조금이라도 암내를 풍기는 여자란 존재가 있으면 반드시 마음을 품고 언젠가는 그 몸을 탐내는 짐승이라는 생각은 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에서 부리던 어린 식모를 건드리고 그 일로 인해 어머니가 마음고생을 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며칠 동안 손 여사는 남편이 내린 결정을 두고 갈등을 해야 했다.
이미 집안일을 봐주는 할머니 한 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은 문득 그런 말을 꺼냈었다.
“당신이 좀 이해를 해. 영신이 아버님은 살아 계실 때, 고향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고 나도 그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영신의 고향으로 약간의 쌀을 보내주는 것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데리고 있다가 야학이라도 보내주자는 기가 막힌 말을 덧붙인 남편이 야속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집안에 어린 여자아이를 둔다는 그 사실에 경계를 하는 것 뿐. 그래서 몇 년 전에 남편의 고향에서 일손을 도울 사람을 하나 데려오자고 했을 때도 어린 여자애나 나이 든 아줌마가 아닌 할머니를 들이자고 한 것이었다.
결국 손 여사는 남편의 뜻을 따랐지만 순종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이 볼 때, 늘 남편을 섬기고 순종하며 사는 아내로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늘 이기심과 계산적인 생각이 자리했다. 남편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땅을 사서 집을 지어 파는 건축시장에 뛰어들게 한 것도 그녀의 이기심이 작용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녀는 같이 사는 남자의 비위를 거슬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린 식모를 건드렸을 때, 그것을 그저 남자의 어리석은 본능이나 순간적 욕망의 충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자신의 자리를 뺏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울며불며 난리를 치고 남편을 호색한으로 밀어붙이고 소문을 내서 결국 아버지로 하여금 궁색한 변명조차 할 수 없게끔 만든 어머니의 경솔함은 어린 그녀가 봐도 참 한심한 처사였다. 남자란 아무리 욕망의 덫에 사로잡혀 사는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믿어주는 여자에게 돌아오는 이성적인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어머니는 왜 몰랐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