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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66551163
· 쪽수 : 256쪽
책 소개
목차
나팔꽃 / 7
한머리 / 103
숨소리 / 195
작가의 말 / 254
저자소개
책속에서
여우의 눈빛이다.
어미 여우와 새끼 여우의 눈빛이 새벽을 뚫고 한꺼번에 빛을 쏘아댄다. 루스키 전투에서 다리와 귀를 잘린 채 도망치던 들짐승을 여기서 만난 것이다. 지금은 다리 잘린 어미 여우가 갓 난 새끼 여우 두 마리를 품에 끌어안고 밭은 신음을 쏟아내는 중이다. 그들의 터래기 움직임 하나까지 너무 섬세하여 오래도록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미는 새끼들을 껴안으면서도 여차하면 틈입자를 할퀼 듯 나머지 한쪽 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다. 보호막 솜털조차 보송보송 아름다운 모정의 사랑이다. 용석은 배낭에서 주먹밥을 꺼내어 코앞에 밀어주고 조심조심 일어난다. 어미 여우가 성한 다리로 주먹밥을 아슴아슴 끌어가더니 새끼들 입에 넣어주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 삼국유사에서 본 혜통 스님의 일화를 아주 잠깐 떠올렸을 뿐이다.
_「나팔꽃」 중에서
하천 건너 팔촌 열일곱 사춘기끼리 일을 저지른 건 시멘트 다리를 완공하기 직전이다. 재홍이 형은 갈마리 서낭당 너머에 살았고 정자 누나는 뽕나무 많은 진둔벙 옴팡 집에 살았으니 걸어서 족히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이다. 돈이 없어 중학교에 못 간 정자 누나 혼자 무럭무럭 열일곱 처녀가 되었을 즈음이다. 개울 건너 밤마실 나온 재홍이 형 그림자가 비추면 모처럼 활짝 웃기도 하는 게 그나마 다행인 줄 알았다. 정자네 사랑방에서 묵 내기 화투나 팔뚝 맞기 뽕으로 죽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 재미로 서낭당 언덕 너머 징검다리 건너며 억새풀 밤이슬 스치는 것이다. 성만이 형도 딱 한 번 오긴 했으나, 재홍이 형 혼자 오는 횟수가 늘어나고 더러는 막걸리 주전자 소리도 떨꺽떨꺽 들리는 낌새가 어째 수상하긴 했다. 묵 내기 화투를 치거나 팔뚝 때리기 윷판을 벌여도 식구끼리니까 하냥 그런가 보다 했다. 어스름 달밤 지나고 자정이 지나도 각자 둥지 찾아 등허리 눕히는가 보다, 하며 안방 어른들은 까맣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잠을 청했다.
_「한머리」 중에서
날개 꺾인 천재, 큰삼촌의 그 투석인 줄 알았다. 가분수 체질답게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마치자마자 명문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니 ‘개천에서 솟아오른 용’이었다. 아버지는 큰삼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반복하며 회상했다. 큰 가방을 메고 서울행 버스를 타는 대학생 동생의 뒷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단다.
그러나 대학생 배지를 단 지 반년 후 큰삼촌은 집안의 기대를 깡그리 날려버린 큰삼촌이다. 무슨 사상 서적과 사상 동아리를 접하면서 투석전(投石戰)에 몸을 던진 것이다. 머리통이 실제로 금이
간 철학도 출신 큰삼촌 얘기는 따로 풀어도 한 보따리다.
신입생 초기에는 ‘분단 시대 한반도 젊은이’란 문장을 되뇌면서 눈시울 적시곤 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이 어둠을 사르는 불빛이 되기 위해 우리 모두 일어서야 한다’고 결의를 보일 때는 어린 나까지 두 주먹 불끈 쥐어졌었다. ‘독재 타도’, ‘인간 해방’, ‘군중들의 함성’ 같은 문자를 말할 때까지는 그냥 용감한 학생인 줄만 알았다.
_「숨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