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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67820664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17-10-28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 대한민국 공식 백조 대변인의 서툰 날갯짓
1부 관능으로의 초대
단골손님 | 걷기, 관능으로의 초대 | 백조를 날게 하라 | 그날 밤 나는 낙원에 갔다 | 에버그린 | 그놈은 아직도 냉동실에 있다 | 완전범죄 | 빅뱅을 꺼내다 | 아버지의 엑스란 내의 | 어떤 풍경 | 프리랜서가 된 그녀들
2부 사랑밖에 난 몰라
여우비 | 적자생존 | 김복순 여사 | 사랑밖에 난 몰라 | 미스터 쇼 | 춤은 아무나 추나? | 내 나이 묻지 마세요 | 33년 만의 결혼선물 | 99점짜리 김 선생 | 십일의 앤 | 바람아, 멈추어다오
3부 종소리 울려라
불청객 | 종소리 울려라 | 늑대들 | 토니 | 부메랑 | 호랑이 변천사 | 100불짜리 복수 | 나의 독서엔 관객이 필요하다 | 커피에 반하다 | 못다 핀 꽃 한 송이 | 신 씨 부녀 대물림
4부 엑시트EXIT
족발문足發文 | 젊은 엄마, 늙은 엄마 | 접촉 없는 접촉사고 | 인풋, 아웃풋 | 시속 55킬로미터 | 화이트하우스 | 떠들썩한 섬 | 특급수면제 | EXIT | 절을 끊어라, 글을 끊어라 | 매일 내게로 오는 저 하늘처럼
저자소개
책속에서
다음날 외출하려고 옷장을 열어본 나, 소름끼치게도 재킷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바지를 보았다. 어제는 그렇게 뒤져도 없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바쁜 시간이라고 퉁명한 직원들에게 사정을 해 쓰레기통 속 큰 비닐 두 개를 수거, 주방 뒤쪽 공터로 끌고 갔다. 일회용 장갑을 끼고 뒤지는데, 빨간 켄터키박스가 전부 빨간 케이스 내 핸드폰 같았다.
내가 죽어 단골을 잃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놀란 귀신이 속삭였다.
“왜 그래, 앞으로도 곡할 일이 많을 텐데. 그러지 말고 그때마다 나를 부르면 되잖아.”
걷는다는 것은 낯선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는 일이라 했다. 하지만 내게 낯설다는 것은 곧 두려움이었다. 그동안의 걷기란 쳇바퀴 돌리기. 습관적인 걷기는 안전했지만 안일했다. 그것은 다른 가치의 만남을 외면했고, 불필요한 소모만을 일삼았다. 이제 그 박제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낯선 세계로 나서는 데 자그마치 50년이나 걸린 셈이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둥둥 북소리가 들렸다.
“굿모닝~!” 그의 멋진 바리톤 음색에 당황해 걸음이 엉킨다. 신문을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하자는 것도 아닌데 달아나듯 종종걸음을 친다. 그 모습에 의아해 하는 그의 시선이 등을 따라온다. 아직도 내 안에 여자가 살아 숨 쉬고 있다니.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미국인같이 덩치 큰 바람이 롱 파카 속으로 들어온다. 종아리부터 시작해 허리, 겨드랑이를 지나 순식간에 양팔로 기습이다. 나는 허수아비처럼 팔이 들리며 허둥댄다. 순간 더 위쪽으로 올라가려는 팔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끌어 내린다.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난다. 바람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그랬구나. 사는 것도 이랬구나. 이렇게 벗어나면 되는데 이걸 몰라 항상 그 자리에서 버둥거렸구나.
내일은 왼쪽으로 떠날 것이다. 그곳엔 또 어떤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잃어버린 것들? 아님 잊어버린 것들? 어쩜 오랫동안 외면했던 것들이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걷다가 왼쪽으로 네 번, 그렇게 왼쪽으로 왼쪽으로 돌면 그 끝에 시작이 있다는 것 외엔.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죽는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처럼 그런 가정을 지키는 주부의 존재는 막강하다. 그런 분들의 충전을 위해서는 최적의 조건으로 최고의 서비스를 받는 최상의 장소가 필요하다. 그러니 철없는 불평과 비난으로 백조들의 불타는 사명감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될 일이다.
남편들이여! 백조들이 당당하게 수다를 즐기게 하자. 그리하여 백조가 훨훨 나는 그날 가정에는 평화가, 나라에는 번영이, 나아가 전 인류에게는 행복이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우리 백조들을 마음껏 날게 하시라.
그때 내 나이 열 살. 나는 아버지 대신 뒤란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코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지 않은 것이 고마워서 울었고, 우리에게 화내지 않은 것이 고마워서 울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전처럼 부처님 같은 인자한 얼굴로 돌아와 준 것이 너무도 고마워서 울고 또 울었다.
“너는 할머니가 되어도 나한테는 언제나 에버그린ever green이야!” 예상하지 못한 멘트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는 진즉에 내가 버리고 온 이십대의 푸른 초원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이었다. 무시당하고 구박당한 기억조차 모두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에버그린이라…. 그 말은 황홀했지만 그것 때문에 불장난을 하고 싶진 않았다. 드라마에서 보아온 장면들도 식상했고, 대책 없이 콩닥거리는 심장도 미덥지 않았고, 무엇보다 세월이 내 위에 남겨 놓고 간 더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 청년의 애틋한 ‘에버그린’을 ‘네버그린’never green으로 만들어 버릴 순 더더욱 없었다.
마치 바람난 자기 아내라도 본 듯, 경멸하는 눈초리를 무자비하게 쏘아대고 있었다. ‘저 아니거든요. 저는 여기 단순 방문자라구요.’ 창문을 열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라는 피켓이라도 들고 싶었다. 표정관리가 난처했지만 비굴하면 더 오해를 받을 것 같아 눈을 부릅뜨고 앞만 보고 있었다.
‘너도 울려라, 너도 나처럼 너만의 소리를 울려라.’ 훅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종소리가, 지엄하고 따뜻한 종소리가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감정이 용암처럼 흘러 넘쳤다. 이제 나도 나의 종소리를 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을 뜨니 축축한 시야를 헤집고 땅으로 내려오던 비천이,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밤마다 병으로 문지르며 괴롭히지를 않나, 어떤 날은 압박붕대로 잔뜩 조여 매 숨쉬기조차 힘들었어요. 밤새 묶인 상태로 잠을 재우고 아침에 일어나 자국이 남으면 또 그것 가지고 트집을 잡았어요. 아니 그걸 제가 묶었나요? 주인은 틈만 나면 나를 구박했지만, 그래도 저는 꿋꿋이 참았습니다. 참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우리는 일심동체인 것을요.
그나마 그것은 약과예요. 큰애가 고3이 되자 몸이 달은 주인은 이성을 잃었어요. 명문대 의대를 원하는 아이의 실력이 좀 딸렸다 싶었는지 자기 몸으로 때우려고 했어요. 나는 소리치며 말렸어요. “주인님, 그것만은 제발, 제발이요.” 간절한 나의 애원은 당연히 묵살 당했지요. 언제 내 의견을 듣는 분인가요? 결국 주인은 일 년 기도에 돌입했습니다.
계단 끝 비상구를 열면 파란 하늘의 옥상이 있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도 그저 일상의 연장처럼, 익숙한 문을 열고 나가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여행으로 생각하자고 나는 방송을 보면서 정리했다.
똑같이 ‘수’자로 시작하는 수행과 수필. 서로 축을 낸다는 대립을 벗어나 서로 도울 수 있다는 합일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것은 갈등이 아니라 화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무지했다. 그 둘을 서로 다른 집에 가두고는 양쪽 문을 드나들며 바쁘기만 했다. 이 필연을 소홀히 한 채, 각자 시간에 쫓기며 일상을 바쁘게 재단했다. 늘 허기진 채 밖으로만 헤매고 다닌 꼴이었다.
뉴욕존에프케네디공항에서 다섯 시간 걸리는 시애틀로, 시애틀에서 다시 인천공항으로. 조지타운대학 9층 기숙사와 뉴욕 아스토리아 4층 아파트로 이어진 하늘을 따라, 계속 하늘을 만나고 하늘을 건너고 하늘을 가르며 무려 열다섯 시간을 그 속에 안겨있다 땅으로 내려왔다. 땅과 바다와 산과 달리 하늘은 하나로 오직 하나로 쭉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수없이 비행기에 오르고 내렸으면서도 30년 만에야 깨닫게 되다니.
두 달 전 새로 이사한 아파트, 이곳에도 하늘이 있다. 오직 하늘만 보고 결정한 집이다. 마치 잠재의식 속에서 약속이 된 것일까. 이번에 만난 아이들의 하늘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헛헛한 내 심정을 위로해 주고 싶었는지 어느새 두 아이의 하늘이 숨차게 달려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