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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9519865
· 쪽수 : 180쪽
· 출판일 : 2025-12-01
책 소개
목차
베어진 나무에서 자라난 가지를 보다
긴 기다림
실패자의 자취
타월
타월의 탄생
신체를 얻을 때
손톱
초인의 비밀
초인의 비밀 2
초인의 비밀 3
인어가 되고 싶은 사람도 있어
빛나는 녹색 점
남색 쿠션이 놓여 있다
컨택트
고스트 월드
나그네의 옷
개별적인 하얀 셔츠들
욕조
오늘 밤의 초현실
고양이 세수
산짐승 주의
아버지의 집
당신과 당신의 늙은 어머니
92년 장마, 종로에서
미터기는 멈추지 않는다
끈
우리들은 즐겁다
어느 바텐더의 춤
책이끼
영영 잃기
우리는 함께 살을 찾게 될 것이다
라일락 와인
정체와 행로
먼지의 행복
모리의 언어에 대한 감각
저자소개
책속에서
내 안에서 나는 여러 갈래다. 실처럼 자아내면 그 실은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거칠었다가 간간이 부드럽다. 내 안에서 내 문장은 변화무쌍하고 하나이자 여럿이며 간혹 모두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누굴 만나면 나는 그저 굵은 것 혹은 그저 가는 것, 그저 나, 그러니까 세계의 일부로 전락한다. 그것이 누구와 함께하는 유일한 법임을 알기에, 서글픔을 무릅쓰고, 전부에서 일부로 기꺼이 살기도 한다.
친구보다는 동료에 가깝던 사람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대부분의 관계 정의에 인색했던 나는 그를 동료로 들이는 데도 수년을 필요로 했다. 그는 수년간 이따금 요청했고, 나는 힘이 닿는 선에서 절반 이상을 수락했으며, 그 일들이 미친 영향, 그 일들을 하는 동안 내가 맞은 일들, 그러는 새 쌓인 나라는 사람의 생애가 그를 '동지'로 자리매김시켜주었다. 그가 내가 있는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기를 멈췄을 때, 나는 아쉬워했다. 우리가 아직 친구가 돼보지 못한 것을. 그가 늘 그랬듯 태연하게 부탁을 던지던 톤으로 나의 집에 방문하겠다던 목소리를 거절한 것을. '지금 당장'의 시간은 너무나 폭좁고, '언젠가 나중'의 시간은 너무나 폭넓었던 그때에 언제나처럼 어색하게 굴었던 것을.
긴 놀이는 휴식이 된다. 긴 잠은 운동이 된다. 긴 머리카락은 근성의 지표가 된다. 긴 것은 활동이 되고, 직업이 된다. 그 사람의 긴 것은 그이의 생활이 되고 그 사람 자신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길었어도 줄어들고 있는 것은, 곧 해소될 것은, 곧 자취를 감출 것은 아무래도 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었지만 차차 그 사람과 무관해지고 있는 것. 기다림이 끝나면 기다리는 자는 존재를 감춘다. 오늘의 캘린더에는 우리의 만남만이 기록될 뿐, 우리의 만남보다도 훨씬 길었던 지금의 기다림은 적히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