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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와 도덕의 이상

맹자와 도덕의 이상

조원일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5-12-07
  |  
15,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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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와 도덕의 이상

책 정보

· 제목 : 맹자와 도덕의 이상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철학
· ISBN : 9788968492549
· 쪽수 : 346쪽

책 소개

이 책은 고대 중국의 선진유학의 이상주의자인 맹자의 도덕이상에 대하여 맹자연구사, 역사와 사상적 배경, 도덕이상의 기반, 도덕이상의 중심문제, 도덕이상의 전개, 권도와 도덕선택, 도덕선택의 보편적 원리, 도덕철학의 현대적 의미 등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분석 정리한 글이다.

목차

머리말 / 5
제1장 맹자 연구사 소개 / 17
제2장 역사와 사상적 배경 / 53
제3장 도덕이상의 기반 / 73
제4장 도덕이상의 중심문제 / 111
제5장 도덕이상의 전개 / 146
제6장 권도와 도덕선택 / 197
제7장 도덕선택의 보편적 원리 / 272
제8장 도덕철학의 현대적 의미 / 302
참고문헌 / 331
찾아보기 / 335

저자소개

조원일 (지은이)    정보 더보기
대전에서 출생하고 성장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대학 졸업 후에는 臺灣으로 유학을 떠나 中國文化大學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뒤에 다시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北京大學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8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남서울대학교 중국학과를 거쳐 현재 전남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장을 겸직하고 있다. 지난 2012년도와 2014년도에 전남대학교 교육우수교수에 두 차례에 걸쳐 선정 되었다. 2016년에는 제20회 용봉학술상을 수상 했다. 2021년에는 우수 연구성과를 인정을 받아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중국문화학회 회장, 중국 浙江大學 한국연구소 객원연구원, 寧夏大學 학술고문을 겸직하고 있으며,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연구회 자문위원 역시 겸직하고 있다. 2017년 한국연구재단 인문도시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다양한 인문학강좌, 인문학포럼을 개최하는 등 지역사회의 인문학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동안 집필한 저서로는 『東吳哲學』, 『哲學․宗敎與人文』(中國出版), 『半生緣』(영화로 배우는 중국어), 『동아시아의 유학사상』, 『선진유가의 사상』, 『맹자의 철학사상』, 『공자의 철학사상』, 『순자의 철학사상』, 『맹자와 도덕의 이상』, 『西漢의 유학사상』, 『고대 중국의 정치사상』, 『고대 중국의 천인관계론』 등이 있으며, 외국에 발표한 논문으로는 「孟子仁政思想的詮釋」 등을 포함하여 다수가 있으며 국내에 발표한 논문에는 「순자 정치사상의 현대적 의미에 관한 연구」 등을 포함하여 다수가 있다. 고대 중국의 철학사상과 중국의 전통신화 분야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또한 고대 중국의 역사와 인문지리 및 전통문화와 동남아시아 화교문화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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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장 맹자 연구사 소개

1. 시작하는 말
양한兩漢시기부터 당대唐代에 이르는 시기의 유학 발전은 경학經學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학은 서한西漢중기에 이르러 무제武帝의 독존유술獨尊儒術 정책 실시 이후 대대로 각 왕조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학술부문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비록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에 이르러 유학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통치자들은 감히 제멋대로 경학을 폐지하지는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이 경학의 발전은 유학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양한시기부터 송대宋代 이전까지의 맹자학孟子學의 발전은 모두 경학의 발전 과정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경학사의 관점에서 논의해야만 한다. 당대 중기 이후 맹자학은 유학의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많은 관심을 받게 되기는 하지만 그때까지는 유학의 주류로 편입되지는 못하는 실정이었다. 송대에 이르러 이전 시기에 축적되어진 맹자학 관련 연구 성과를 계승하고 그 위에 유학 부흥사조와 경세치용사상의 영향이 더해져 『맹자孟子』와 맹자에 대한 관심이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증가하게 된다.
또한 송대에 이르러 개혁세력의 이론적 근거로서 선진유학의 중요성이 대두되는데, 이러한 추세에 호응하여 맹자의 지위 역시 상승하게 된다. 송대 이후부터는 학자들이 유학에 대하여 언급을 할 때 더 이상 ‘주공周孔’을 병칭하지 않고 대신 ‘공맹孔孟’을 병칭하기 시작하는 경향을 보인다. 송대의 개혁세력의 역할로 인해서 유학에 있어서의 맹자의 지위는 양한 시기에서부터 수당시기에 이르기까지 전례에 없던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된다.
본문에서는 경학의 발전을 주축으로 하여 역대 경학 발전사의 분석을 통하여, 송대 이전과 이후의 맹자학의 연구 상황에 대하여 먼저 한대漢代에서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언급한 뒤에, 다시 수대隋代에서 당대唐代에 이르는 시기까지 언급한 뒤에, 다시 송원명청宋元明淸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시기 역시 언급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해보도록 하겠다.

2. 양한에서 위진남북조 시기의 맹자 연구
진秦나라 시기에 자행된 분서갱유에 의하여 유가사상은 진나라에서 어떠한 형태의 발전도 이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맹자학 역시 어떠한 발전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한漢나라 시기로 진입한 이후 유가사상은 줄곧 중요한 각색을 연출한다. 서한西漢초기에는 육가陸賈ㆍ숙손통叔孫通ㆍ가의賈誼 등이 중심이 되어 막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한나라의 정치와 제도를 정비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한대 초기의 정치권에서는 황노학黃老學을 이용하여 전란에 지친 민생의 안정을 도모 하였지만 유학 역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 이후 정치와 사회적 필요에 의하여 유학은 발전의 발판을 확보한다.
서한중기에 이르러 군주는 새로운 통치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게다가 외환까지 겹쳐지는 형국이 발생하자, 서한의 군주는 왕권과 국가를 공고하게 지키고자 한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학술적으로도 ‘무위無爲’ 사상이 아닌 ‘유위有爲’ 사상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대두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한중기에 무제武帝가 집권한 후 독존유술獨尊儒術의 정책이 시행되기에 이른다. 통치권의 강력한 지지 속에서 서한시기의 유학은 경학이 중심이 되고 유가의 여타 분야는 그 다음 순으로 밀려나게 된다.

제자 십가十家 가운데 볼만한 것은 구가九家일 뿐이다. 모두 왕도王道가 쇠미해지고 제후들이 힘의 정치를 하고, 당시의 군주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방향을 달리함에서 구가九家의 학술이 벌떼처럼 나와서 함께 일어났다. 각각 한 단면을 끌어와 그들이 잘하는 것을 숭상했다. 이것을 가지고 유세하여 제후에게 영합하였다. 말하는 것이 비록 다르지만 비유하면 물과 불이 서로 없애기도 하고 생기게도 하는 것과 같다. 인仁과 의義, 경敬과 화和가 서로 상반되지만 모두 서로를 이루게 해준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천하가 같은 곳으로 돌아가지만 (가는) 길은 다르고 (궁극의) 하나에 이르지만 생각은 백가지로 다르다.”라고 했다. 지금 서로 학파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각각 뛰어난 것을 확장하여 지혜와 생각을 다하여 그 요지를 밝혔다. 비록 모르고 취약한 부분이 있지만 그 귀결점을 합하여 보면 또한 육경六經의 갈래와 끝은 된다.

반고는 제자諸子의 학술이 “육경의 갈래와 끝은 된다.”라고 여기고, 또한 제자의 학술이 말하는 것이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그것들의 요지는 결국은 육경六經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했다. 반고의 이러한 생각은 경학이 근본이 되고 제자학諸子學은 경학의 보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맹자孟子』는 진나라 시기의 분서갱유의 화마를 피해 완전하게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서한시기 유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문제文帝 시기에 일찍이 『맹자』에 박사를 두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조기趙岐의 「맹자제사孟子題辭」에 “효문 황제는 학문을 광범위하게 넓히고자 『논어論語』, 『효경孝經』, 『맹자孟子』, 『이아爾雅』 등에 박사를 두었다.”라고 한 언급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유흠劉歆은 「이서양태상박사移書讓太常博士」에서 “효문 황제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조조晁錯를 보내 복생伏生에게 『상서尙書』를 배워오게 했다.……박사를 두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조기와 유흠의 언급은 한나라 문제 시기에 이미 유가의 제자학설이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무제 시기에 이르러서 진나라의 분서焚書이후 많은 서적과 전적들이 산실된 것을 통감하는 한편 조정에서는 관방에 소장하고 있었던 장서들 가운데 대다수가 궐본인 것을 파악하고 장서정책을 선포하여 민간에 소장되어 있던 산실된 서적들을 수집한다.

진대秦代에 이르자 이를 염려하여 서적을 태워 없애고,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우매하게 하고자 했다. 한나라가 일어나서 진나라의 실패를 고치고자, 서적을 크게 모으고 책을 헌납할 수 있는 길을 널리 열었다. 무제시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백서帛書는 결손 되기도 하고 죽간竹簡은 떨어져나간 것도 있고, 예악이 무너진 상태가 되자 군주는 탄식하며 “나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장서藏書의 정책을 세우고 사서寫書의 관직을 설치하여, 아래로 제자諸子의 전傳과 설說까지 모두 비부秘府에 채웠다. 성제成帝시기에 이르러서는 서적이 꽤 많이 분산되고 유실되어, 알자謁者 진농陳農으로 하여금 천하에서 전하지 않는 책을 구하게 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에게 경전經傳 제자서諸子書 시부詩賦 등의 전적을 교감하게 하고, 보병교위步兵校尉 임굉任宏에게 병법서를 교감하게 하고, 시의侍醫 이주국李柱國에게 방기方技에 관한 서적을 교감하게 하였다. 매번 책 한 권의 교감이 끝나면 유향은 그 서적 각 편의 조목을 정리하고, 요점을 간추리고 기록하여 상주하였다.

무제는 이처럼 민간에 흩어져 있던 책들을 수집하는데 있어서 그 대상을 제자학諸子學의 서적에까지 확대하여 수집된 제자학의 서적을 비부秘府에 보관시켰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제자학의 학술사상은 민간에 전파될 수가 없었다. 동시에 경학을 표준으로 삼아서 모든 학술에 대하여 정리 작업을 진행하여 그것들의 요점을 논하고 오류를 바로잡았다. 이러한 조처들은 비록 서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보관한 공적은 있으나, 제자학이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지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제자학이 발전하는데 장애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한대에 제자계열에 분류되었기 때문에 그것의 발전에 이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한시기가 끝날 때까지 『맹자』에 주석을 달은 학자는 없었다. 맹자학과 관련 있는 저작은 다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보이는 맹자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부분일 뿐이다. 비록 서한시기에 맹자학과 관련된 저작이 많지는 않지만, 그 시기의 유학자들은 『맹자』의 학설을 유학에 있어서 중요한 연구 자료로 취급했다.
동한東漢시기에 들어와서 시작된 금문今文경학과 고문古文경학의 대립은 갈수록 치열해져가고 맹자학에 대한 연구는 학자들로부터 비교적 중시를 받는다. 비록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맹자』를 「제자략諸子略ㆍ유가류儒家類」에 수록하고 있지만, 『논어論語』ㆍ『효경孝經』ㆍ『이아爾雅』는 「육예략六藝略」 가운데의 「논어류論語類」ㆍ「효경류孝經類」에 귀결시킨다. 그래서 『맹자』의 지위는 마치 『논어論語』ㆍ『효경孝經』ㆍ『이아爾雅』 보다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동한시기 학자들의 맹자학에 대한 연구는 대폭적으로 진보한다.
동한시기의 『맹자』에 대한 주석은 여섯 종류가 있는데, 양웅揚雄의 『맹자주孟子注』ㆍ정증程曾의 『맹자장구孟子章句』ㆍ정현鄭玄의 『맹자주孟子注』 ㆍ고유高誘의 『맹자장구孟子章句』ㆍ유희劉熙의 『맹자주孟子注』ㆍ조기趙岐의 『맹자장구孟子章句』가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것은 유희의 『맹자주』와 조기의 『맹자장구』 뿐으로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유실되었다. 비록 동한시기의 『맹자』에 대한 주석본이 후세에 비하여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서한시기에 비할 때 주목할 만큼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한시기에는 고문경학이 흥기하여 그에 따라 훈고학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때 『맹자』에 기록되어 있는 언급들은 동한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논증의 자료로 인용된다. 조기가 「맹자제사」에서 “오늘날 여러 경전들의 의미는 『맹자』를 인용하여 사실을 밝힌다.”고 언급한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동한시기의 학자들은 경전의 의미에 대하여 논의할 때 『맹자』의 내용을 인용하여 논증의 근거로 삼았었다.
『맹자』는 전기류의 서적이었기 때문에 한대의 학자들이 경전에 대하여 주석을 달 때, 그 내용을 많이 인용하여 논증의 근거로 삼았으며, 『맹자』에 기록된 사실들을 인용한 서술을 박학다식한 것으로 여겼다. 동한시기 『맹자』의 학술적 지위는 더욱 높아지게 되어 그 영향력은 매우 광범위하게 확대되는 추세를 보인다. 아울러 맹자사상의 가치 역시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인식되어지는데, 양웅揚雄의 “양주나 묵적의 학설을 물리친다.”는 언급과 왕충王充의 「자맹刺孟」 편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한에서 동한시기에 이르는 동안 『맹자』의 지위는 점진적으로 향상되어가는 추세를 보인다. 서한시기의 유학은 정치를 위한 도구적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에 경세치용經世致用분야에 치중했었던 반면 심성론心性論 분야에는 소홀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학술적 추세 속에서 맹자의 사상은 심성론을 중시하는 사상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당시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었던 것이다. 경학은 한나라 정부의 장기간에 걸친 지원 속에서 이미 학술계에서는 요지부동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유학의 독존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자들의 연구 범위는 경서에서 시작하여 유가의 제자학諸子學에까지 확대된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는 동한시기 학자들의 연구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양한시기의 맹자학의 발전과 경학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한대 유학자들은 경전에 대한 해석과 주석 작업을 할 때 맹자의 관점을 인용하곤 했는데, 조기가 「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효문 황제는 학문을 광범위하게 넓히고자 『논어論語』, 『효경孝經』, 『맹자孟子』, 『이아爾雅』 등에 박사를 두었다.”라고 언급한 것은 양한시기의 맹자학이 경학에 의탁하여 발전했음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한시기 맹자학의 발전은 학술사상에서는 경학의 독존과 제자학의 지속적인 발전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의 제자학의 연구는 경학을 종주로 삼고 모든 이론체계를 경학의 관점에 맞춰 수립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제자학은 경학이 일세를 풍미했던 양한시기에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자』의 이론은 유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공자孔子의 학문을 계승하여 그 이론체계가 육경六經의 이론체계와 유사한 이유로 인해서, 한대 학자들이 경학연구에 있어서 『맹자』의 관점을 다양하게 인용하였던 것이며, 이로 인하여 『맹자』의 학술적 지위가 신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한 말기부터 시작된 정치적 혼란과 두 차례에 걸친 당고黨錮의 화禍는 동한의 학술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여 경학의 발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동한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질서의 붕괴는 학술계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경학의 쇠퇴라는 초유의 현상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은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시기에 와서 태학太學의 회복으로 비로소 진정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태학의 수준은 양한시기에 한참 못 미쳤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태학생의 대부분이 병역 기피 수단으로 태학에 입학했기 때문이었으며, 박사들의 수준 역시 양한시기에 비해 형편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위나라의 태학은 그 수준이 저급했으며 따라서 당시의 경학 연구도 수준에 못미쳐 결국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한 말기에서 삼국을 거쳐 서진西晉에 이르는 시기에 경학의 집대성자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정현鄭玄이다. 피석서皮錫瑞가 “정강성은 폭넓은 학식과 기억력이 뛰어난 인재로 고상한 절개와 탁월한 행실로 유명했다. 저술한 책이 집에 가득했으며 문하생이 매우 많았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보았으며, 이수와 낙수의 동쪽 회수와 한수의 북쪽에서 정강성은 제일 뛰어난 사람이었다고들 말한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정현은 당시 사회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정현의 영향 속에서 동한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동안 유학은 새로운 관점을 거의 내놓지 못하고 있었으며, 맹자학에 대한 연구 역시 전혀 새로운 성과를 못 내놓고 있었다. 동시에 경학 분야에서 정현학파와 왕숙王肅학파 간의 분쟁이 발생한다. 이러한 두 학파 사이의 분쟁으로 인하여 학자들은 학술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서로 헐뜯고 비방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학의 발전은 정지되었으며, 전문적인 학술의 발전 역시 기대할 수 없었다. 경학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경학에 의탁해서 발전을 했던 맹자학 역시 어떠한 진보도 없었던 것이었다.
동한 말기에 발생한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서 기존의 예악禮樂질서는 붕괴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그 결과 당시 사람들은 유가의 가르침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학 연구는 급속도로 쇠퇴하였으며, 학자들의 학문연구 대상은 더 이상 경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동한 말기부터 위진魏晉에 이르는 시기에서 유학은 사회질서를 유지시켜주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결국 사람들은 더 이상 유가사상에 대하여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또한 당시의 학자들 역시 경학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더 이상 혼란에 빠진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세상사에 참여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법가法家나 종횡가縱橫家의 학설을 추종했으며, 소극적으로 개인의 안신입명安身立命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노장老莊사상과 현학玄學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유가사상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고민하던 문제도 사회질서의 회복 같은 것보다는 생명의 온전한 보전에 관한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이러한 시기의 경학은 자연히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며, 새롭게 흥기한 현학이 경학에 영향을 끼쳐서 경학의 현학화玄學化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한대의 경학은 주로 천인관계天人關係의 문제에 대하여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현학 역시 본체론本體論적 관점에서 천인관계의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경학에서 현학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해가는 추세 속에서도 연구 주제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한 것은 단지 연구시각과 연구방법론일 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현학은 도가道家의 이론과 연구방법론을 사용하여 천인관계 문제를 규명했다.


머리말

오늘날의 동아시아 사회는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유가사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유가사상은 장구한 시간에 걸쳐 동아시아 지역 특히 지식인 사회는 물론 일반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현재까지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즉 유가사상은 아직까지도 동아시아 사람들 모두의 현재적 삶 속에 깊이 투영되어 있는 사고와 행위의 존재방식인 셈이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삶이 주류를 이루고 경제적인 이익이 지고무상의 진리로 숭상되고 있으며, 기초학문은 고사되고 실용적인 학문이 최선의 선택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유가사상은 시대에 맞지 않는 혹은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낡은 관념체계로 취급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보수반동으로 언급되며 기득권의 체제유지에 적합한 구시대의 산물로 폄하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와 같은 유가사상은 우리들이 현실적 삶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즉 불안한 사회적 시스템, 인간성 상실의 세태, 나날이 늘어만 가는 자살률,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는 양극화 사회의 고착 등과 같은 문제들 대하여 어떠한 사상 혹은 관념이나 종교가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라고 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선뜻 바로 이러한 사상이 혹은 종교나 관념이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유가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원칙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그것의 실천 및 정의로움에 대한 각성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하여 성찰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며, 무엇이 올바른 삶의 방식인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생존했던 맹자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남겨주고자 했던 고대의 가르침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맹자는 우리들에게 진지하고 참된 삶의 태도에 대하여 메시지를 남겼으며, 인간이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마음을 어떻게 보존하고 확충시킬 것인가에 관해서도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남겼다. 또한 그의 사상체계 속에는 이상적인 국가와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염원과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론도 담겨져 있고, 인격적으로 완성된 인간으로 갈 수 있는 여정에 대한 고민도 담겨져 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춘추전국시대에 생존했던 맹자가 현대인들에게 남겨준 소중한 고대의 유산인 것이다.
필자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맹자의 도덕철학과 관련된 연구를 하면서 틈틈이 과거에 출간했던 졸저 『맹자의 도덕사상과 정치사상』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개정 증보판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본서는 고대 중국의 선진유학의 이상주의자인 맹자의 도덕이상에 대하여 맹자연구사, 역사와 사상적 배경, 도덕이상의 기반, 도덕이상의 중심문제, 도덕이상의 전개, 권도와 도덕선택, 도덕선택의 보편적 원리, 도덕철학의 현대적 의미 등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분석 정리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제1장은 역대 맹자학 연구사에 대하여 양한시기에서 위진남북조시기까지 경학자들의 『맹자』 주석에 대한 고찰과 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맹자 관련 연구를 살펴보았으며, 수ㆍ당 시기에는 유학의 도통체계에서 맹자를 연구한 한유 및 당시의 경학자들을 중심으로 맹자 관련 연구를 고찰했으며, 송ㆍ원ㆍ명ㆍ청 시기에서 근현대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송명리학자들의 맹자학 연구와 청대 고증학자들의 맹자 관련 연구 및 현대 신유가 학자들의 맹자학 연구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글은 원래 『동방학』 제23집(2012년)에 게재했던 문장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제2장은 맹자의 도덕사상의 역사적 사상적 배경에 대하여 논의했다. 전국시대에 만연했던 각국의 군주들에 의해서 자행된 자국 중심의 이기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태의 유행은 춘추시대 이래로 진행된 사회 경제의 급격한 발전과 상호 깊은 관련이 있으며, 각국의 정치인들의 단견과 빈번한 전쟁의 발생은 주왕조 천자 권위의 붕괴와 봉건체제의 점진적인 와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기에 생존했던 맹자는 시대의 아픔을 통감하여 현실상황의 문제를 비판하는 가운데 자신의 시대를 이상적인 바른길로 이끌어가고자 한 것이라고 하는 점을 천명했다. 또한 맹자는 공자가 수립해놓은 유학사상의 기초 위에 자신의 사상체계를 전개하여 유가사상의 계승자이자 또 상세한 해석가로서 공자가 충분히 확대시키지 못한 유학의 기본정신을 발전시켜 엄밀하고 논리적인 구조를 갖춘 사상체계를 구축했다는 점 역시 밝혔다. 그리고 맹자는 이러한 사상체계를 그가 생존하던 시기의 현실 속에 직접 적용하여 당시의 혼란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했으며, 특히 현실정치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으로 제시했던 점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점을 천명했다.
제3장은 도덕이상의 기반에 대하여 언급했다. 맹자 성선설의 기본 형태에 대하여 맹자가 비유의 방식을 통해서 고자가 설정한 비유들에 대한 부정 속에서 고자가 인식하고 있는 ‘인성’과 ‘인의’의 관계가 잘못 되었다는 문제를 중심으로 고찰하였으며, 맹자와 고자의 인성론 관점의 갈림길을 ‘생리적 본능을 성이라고 한다.’는 관점과 ‘본래적인 마음에 인성이 있다.’고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글은 원래 『한중인문학연구』 제18집(2006년)에 게재했던 문장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제4장은 도덕이상의 중심문제에 대하여 논의했다. 먼저 맹자의 ‘악’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동ㆍ서양철학의 ‘악’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를 비교하고, ‘악’의 형성 원인에 대한 해석과 인간의 본성은 ‘악’이 될 수 없다는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수양방법론에 대하여 양기와 지언의 수양방법론을 중심으로 고찰했다. 이 글은 원래 『중국인문과학』 제51집(2012년)에 게재했던 문장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제5장은 도덕이상의 전개에 대하여 언급했다. 먼저 도덕상황의 충돌을 도덕충돌과 도덕선택 및 도덕주체의 선택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윤리적 충돌에 대하여 효도의 의지와 실천의 충돌에 관한 문제, 개인의 덕행과 타인의 생명 사이에서의 충돌문제, 직분과 그에 수반되는 윤리적 책임에 관련된 선택문제, 군신간의 의리와 정치윤리의 충돌에 관련된 선택문제, 소아와 대아의 문제 및 개인의 사사로운 정情과 공공의 규범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이 글은 원래 졸저 『맹자의 도덕사상과 정치사상』(2006년)과 또 다른 졸저 『맹자의 철학사상』(2012년)에 게재했던 문장을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수록한 것이다.
제6장은 권도와 도덕선택에 관한 문제인데, 맹자의 도덕철학체계는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진부하거나 융통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으며, 또한 맹자는 도덕주체가 개별적인 상황 가운데 내리는 도덕적 판단과 선택을 중요시했을 뿐만 아니라 융통성이 없는 태도를 고집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고 하는 사실을 천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융통성과 임기응변의 자유로운 운용은 바로 맹자가 언급한 권도權道의 정신과 부합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 역시 밝혔다. 또한 맹자 사상가운데 권도權道와 관련된 사상을 이해함과 동시에 그가 도덕선택을 할 때 견지한 관점과 중요시한 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았으며, 아울러서 이러한 고대의 사상에 대하여 현대적인 시각을 통하여 맹자의 권도權道사상이 과연 현대의 다원화된 사회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함께 분석해보았다.
제7장은 도덕선택의 보편적 원리에 관한 문제이다. 먼저 맹자가 도덕상황의 충돌에 직면했을 때 취한 태도는 권도權道였다고 하는 사실을 언급했으며, 이러한 권도는 현실상황에 맞게 변용하는 융통성 있는 방침이지만, 권도 자체가 독립적인 규범이나 원칙은 되지 못한다고 하는 점을 밝혔다. 즉 사안에 적합한 것과 변용은 반드시 근본적인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근본적인 원칙이 도덕선택이론의 기반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근본적인 원칙은 맹자가 말하는 의로움義이라고 하는 사실을 천명했다. 다른 한편으로 맹자가 도덕상황의 충돌에 직면했을 때 고려한 요소적인 측면에서 볼 경우, 맹자는 의로움의 정신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인仁한 마음을 보존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을 밝혔으며, 인仁한 마음을 보존한다고 하는 것을 통해야만 비로소 의로움義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점 역시 밝혔다. 또한 행위가 의로움義에 합치되는 것은 내재되어 있는 인仁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의仁義는 맹자가 도덕상황의 충돌에 직면했을 때 취하게 되는 모든 선택의 가치근원이라고 하는 것 역시 천명했다.
제8장은 도덕철학의 현대적 의미에 관한 문제다. 본장에서는 먼저 도대체 어떠한 장애요인 때문에 현대인들이 맹자의 성선설 분야의 탁견과 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점에 대하여, 개인의 주관적인 요인 이외에 가장 주요한 요인은 사회의 전반적인 환경이 첨단과학기술문명만을 추구하고 있는 세태에 있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이러한 세태 속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증명된 사실과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학의 인문전통 관점에 의한 사람이 사람으로 되는 의미와 존엄을 체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천명했다. 아울러 맹자의 주장은 매우 중요하고 또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지적자산이라고 하는 사실 역시 천명했다. 즉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물질생활 측면에 있어서는 비록 전대미문의 번영과 발전을 구가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의 정신생활 측면은 갈수록 빈곤해지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자질은 날이 갈수록 퇴락해져만 가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현대인들이 인성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새삼 필요하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와 비도덕적 가치 사이에서 그것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맹자의 도덕철학은 이천 여 년 전의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가치체계의 구분과 판정이라고 하는 차원에 있어서는 여전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수많은 탁견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인들의 계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밝혔다.
필자는 청소년기에 동서양의 지적전통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동서양의 고전에 심취해 있었다. 이는 지금 돌이켜보면 지적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 4년을 동서양의 고대 지적전통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중국어 공부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보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 고대 중국의 지적전통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를 하고자 유학을 떠났다. 타이완 중국문화대학 대학원과 중국의 북경대학 대학원에서 저명한 석학들로부터 소중한 가르침과 거시적인 시야와 미시적인 시야를 적절하게 조화시켜 엄밀하게 학문을 연구 하는 자세에 대한 가르침 역시 전수 받았다. 이러한 훈련과정은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체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국땅에서의 유학시절 부족한 제자를 진정한 학자의 길로 인도해주신 타이완과 북경의 은사님들에 대하여 깊은 사의를 표하고자 한다. 또한 타이완과 북경에서의 유학생활 기간 내내 못난 후배에게 늘 따뜻한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주셨으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각박한 현실에 직면하여 어렵고 힘들어 했었던 때마다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으며, 오랜 세월 동안 학문과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부족한 후배를 인도 해주셔서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들어주신 도중만, 박영종 선배님께 평생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의 뜻을 올린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대학원생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부하는 남편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었으며, 힘들거나 어려울 때를 막론하고 항상 곁에서 함께 고생을 감내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어린 시절에 행복한 추억 하나 제대로 만들어 주지 못한 무심한 아빠를 묵묵히 기다리며 바르게 커준 딸 수현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전하며, 내가 사랑하는 두 여인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하는 마음과 결혼 스물 두 해를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서 이 조그마한 책을 바친다.

2015년 가을
남녘땅 屯德齋에서
조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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