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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의 역사와 문화

그리스.로마의 역사와 문화

최혜영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9-01-15
  |  
12,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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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의 역사와 문화

책 정보

· 제목 : 그리스.로마의 역사와 문화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유럽사 > 중부유럽/북유럽사
· ISBN : 9788968495878
· 쪽수 : 250쪽

책 소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책이다. 그리스 로마의 역사에 대한 첫 발걸음으로 전체 개관과 더불어, 주제에 따라 깊이 있는 내용이나 분석을 곁들이고 최근의 연구 성과도 반영하려 했다.

목차

머리말 / 3
제1장 에게 해 문명 / 9
제2장 그리스 문명 / 29
제3장 헬레니즘 시대 : 그리스 문명의 세계화 시대의 도래 / 113
제4장 로마의 시작과 전기 공화정 / 127
제5장 정복 전쟁과 공화정의 변화 / 145
제6장 전기 로마 제정 / 177
제7장 후기 로마 제정 / 227
그리스 로마사 관련 1차 자료 / 241
찾아보기 / 243

저자소개

최혜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그리스 정부 장학금을 수년간 받으면서 이와니나 국립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서양고전학회 회장,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편집위원장, 전남대학교 박물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그리스 문명>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문화> 등이 있고 그 외 많은 공저와 논문을 저술하였다. Soli Deo Gloria. Si fallor, 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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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에게 해 문명

1. 고대 에게 해 문명과 유럽 문화의 기원

청동기시대(2900 BC~1100 BC) 에게 해 문명은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트로이 왕국이나 미케네 등의 에게 해 문명 시대는 ‘미니’ 왕국, 즉 소규모 왕국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의 호메로스 서사시를 통하여 널리 알려져 왔으므로 ‘호메로스 왕국’이라고도 한다. 왕들은 주변 촌락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였는데, 당시의 선문자 B에는 각 촌락에서 납부한 공물의 종류와 양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왕권은 그 규모나 권세에 있어서, 이집트나 아시아의 전제왕권에는 비할 수 없이 작았다.
그런데 이들 왕국보다 더 일찍 나타나 꽃피운 에게 해 문명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미노스문명이다. 키클라데스 제도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달한 미노스 문명은 서양 최초의 청동기 해양 문명이라 할 수 있다. 미노스 문명이라는 이름은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왕 이름인 미노스에서 나왔다. 에게 해 문명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모태가 되었고, 그리스 문명을 토대로 서구 문명이 탄생했으니, 에게 해 문명은 서구 문명의 뿌리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노스 왕의 어머니는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논) 출신의 공주 에우로페였다고 한다.
사실 유럽이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에우로페 기원설이다. 신들의 왕 제우스는 아름다운 그녀에게 반하여 황소로 변신하여 접근하여 크레타 섬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에우로페는 미노스를 비롯한 아이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후일 크레타 섬의 수도가 되었던 고르티나에서 발견된 주화에는 한 면에는 에우로페가, 다른 면에는 황소 모습의 제우스가 새겨져 있다. 아끼던 공주를 잃어버린 페니키아 왕은 왕비와 왕자들에게 공주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는데, 결국 아무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 카드모스 왕자는 그리스 테바이에 정착하여 문자와 문명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페니키아문자가 서양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과 맞물려 있다.
유럽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시아의 공주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나, 그 오라버니가 그리스에 문자와 문명을 전해주었다는 전승은 유럽 문명이 지중해를 통하여 아시아 지역과 교류하면서 발달하였으리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실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 해 여러 나라와 소아시아 및 레반트 주변 해안가 나라들은 놀라울 정도의 문화적 접근성을 보인다. 이러한 관점을 집대성하여 크게 인기를 끌었던 책이 미국 코넬 대학 교수였던 버날(Bernal)이 쓴 <검은 아테나 여신(Black Athena)>이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 문명의 아시아․아프리카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다. 책 제목 자체가 ‘아테나 여신은 흑인’, 즉 유럽 문명은 아프리카, 아시아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표상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 철학, 과학 등이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기왕의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 성격을 같이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버날은 헤로도토스 등의 문헌 사료 및 언어학, 고고학 등 여러 근거를 들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를 인정하였는데, 19세기에 이르러 인종주의, 특히 유럽 중심 이데올로기에 의해 마치 그리스문명이 독자적으로 발달하였던 것처럼 왜곡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버날의 책은 세부 학문적 면에서 허점도 많지만, 그 전체적인 그림은 일리가 없지 않다고 보인다.
<그리스 문화사>를 쓴 키토(Kitto)에 의하면 바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쌀라사(thalassa)’를 비롯한 여러 이름들, 크노소스, 코린토스 등 assos나 essos로 끝나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기원한 단어가 아니라고 보았다. 바다라는 단어부터 그리스어에서 연유되지 않았다는 것은 에게 해 문명이 오리엔트 지역과의 문명 교류 속에서 탄생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데 여러 정황을 고려해보면, 에게 해-그리스 문명은 페니키아 문화를 통하여 오리엔트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는 한 방향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지역 개념 자체가 없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테네 철학자 플라톤이 자신들을 “연못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사는 개미나 개구리들”이라 표현하였던 것처럼, ‘지중해라는 연못’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미노스 문명이 나타난 에게 해의 크레타 섬은 키프로스 섬과 더불어서, 그야말로 고대 지중해 문명의 용광로(melting pot) 혹은 샐러드 볼(salad ball)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곳이다. 크레타 섬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부터 여러 종족이 혼합된 곳, 여러 언어가 함께 사용되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나타난 미노스 문명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

미노스 문명 혹은 크레타 문명은 전기(BC 2200-2100), 중기(BC 2100-1600), 후기(BC 1600-1100)로 나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크노소스 궁전 문명은 대략 기원전 1700-1400년경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 크레타 섬은 이집트, 시리아, 페니키아 등과 활발하게 교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크노소스 궁궐터는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에반스 경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이어서 크노소스 남쪽의 페스토스, 동쪽의 말리아 등지의 유적지도 발굴되면서,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크노소스 궁궐터는 중앙의 큰 뜰을 중심으로 미궁처럼 층위가 다른 여러 개의 복도와 수백 개가 넘는 방으로 이루어져있다. 궁전 건축술, 토관에 의한 수도, 수세식 화장실 시설, 복잡한 건물 안으로 빛이 들어오게끔 배려한 채광 시설 등은 그 수준이 상당히 높다. 특히 여기서 발견되는 배수 시설은 로마 제국이 나타나기 전까지 고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적 권위나 왕권을 과시하는 면을 찾기는 힘들며, 성벽 또한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에반스는 당시 크레타의 인구를 대략 팔만 명 정도로 추산하였다.
이들이 남긴 것 가운데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궁전의 프레스코 벽화이다. 프레스코 화는 벽에 흰 회칠을 한 뒤, 회가 다 마르기 전에 색깔을 입히는 기법으로, 전체적으로 흰빛이 감도는 은은한 색감을 가지며 필요에 따라 회 두께가 달라지므로 입체적이다. 그림 소재 가운데는 인물이나 동물을 동적으로 묘사하고, 자연이나 인생을 밝고 우아하게 표현하는 것이 많은데, 황소 및 돌고래, 문어 같은 해양 동물, 기하학적 문양(원, 연와, 파상), 화초류, 궁정생활, 남녀 등이 많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사나운 동물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물상으로는 크레타 문명의 상징이 된 백합왕자를 비롯하여서, ‘파리지엔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세련되게 보이는 여성 그림도 있다. 특히 여성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들은 화려한 화장술을 자랑하면서, 자수가 놓인 아름다운 옷 밑으로 앞가슴을 노출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코르셋이나 금속제 벨트로 개미허리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가는 허리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성들도 하나같이 가는 허리, 넓은 가슴, 단단한 허벅지 근육 등 모래시계 같은 체형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체형이 당시 미노스 인들에게 엘리트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던 듯하다. 전체적으로 색채가 밝고 자유롭고 세련되어서, 혹자는 이들을 고대 세계 최대의 회화민족이라고도 부른다. 생동감 있고 명랑한 화풍은 벽화 뿐만 아니라 조각상과, 채색 도자기, 큰 항아리, 수많은 인장 등에서도 확인된다.
문자가 새겨진 수천 개의 도기 편에는 신성문자, 상형문자, 선문자 A, B 등이 발견되었다. 중기 미노스 시대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선문자 A는 아직 해독이 되지 않고 있지만, 선문자 B는 벤트리스와 채드윅에 의해 1953년경 해독이 되었다. 선문자 B는 미노스 문명을 대체했던 미케네 문명에서도 널리 쓰이다가 미케네 문명의 파괴와 더불어 없어지고, 페니키아 문자에서 전래된 알파벳이 기원전 8세기 이후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선문자와 페니키아 문자 및 그 전래 시기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아서 쉽게 단정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오늘날 크노소스 궁전에서는 어떤 고대 유적지보다 더 많은 방문객들을 볼 수 있다. 이는 최초 발굴자 에반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지만, 지금의 크노소스 궁전은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건축물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즉 에반스는 크노소스 궁전을 ‘복원’하였다기보다, ‘새로 만들어내었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지나치게 손질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에반스가 마구잡이로 복원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백합 왕자의 경우, 원래 그 얼굴은 지워졌던 것을 다른 프레스코 화 남성의 얼굴을 넣어 복원한 식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크노소스 유적지를 살펴보면 더 좋을 것이다. 크노소스 궁전 및 말리아나 페스토스 등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유물들은 현재 크레타 섬 이라클리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의 전시품들은 일상적인 것이든 사치품이든 그들 생활의 여유와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 오늘날 그리스인들이 이들을 ‘칼리테크노이(훌륭한 예술가들)’로 부르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크레타 종교의 숭배대상으로는 성스러운 뿔, 양날도끼, 뱀의 여신상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전이나 성직자 계급은 따로 없었던 것 같다. 양날도끼나 성스러운 뿔의 의미에 대해서는 현재 여러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에반스는 이를 황소의 뿔로 해석했는데, 소인간 미노타우로스 신화 및 소 관련 소재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위엄을 보이는 황금 소 두상, 소 둘레에서 곡예 게임을 하는 듯 역동적 포즈를 취하는 벽화를 비롯하여, 인장, 봉헌물 등에서도 소를 주제로 한 것이 많다.
미노타우로스 신화에 나오는 소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에반스는 이를 우주적 신의 상징으로, 황소 경기를 봄철의 신성한 제전으로 해석하였다. 또 미노스+타우로스(소)라는 합성어에 주목하여, 크레타 왕 미노스가 황소의 탈을 쓰고 제례 의식을 주관하였다고 해석한 학자도 있다. 이때 소는 대지의 풍요 의식과 관련이 있다. 혹은 벽화의 황소 경기에 주목하여 크레타 섬에서 유행하였던 스포츠를 상징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나아가 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크노소스 지배자로 나서기 위한 하나의 관문, 일종의 성인식의 역할을 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쉬어가며 읽기
미노타우로스 신화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라는 왕 이름과 타우로스, 즉 소라는 단어가 합성된 언어이다. 미노타우로스 신화의 줄거리는 대강 다음과 같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자신을 기만한 미노스 왕을 징벌하기 위해서 황소를 보내고, 왕비 파시파에가 이 소를 보고 반하게 된다. 이에 왕비는 최대의 장인 다이달로스에게 부탁하여 나무로 된 암소 형상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황소와 관계를 가진다. 그 사이에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고, 그는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라비린토스라는 미궁에서 식인하면서 살게 된다.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는 역할을 맡은 이는 테세우스이다. 아테네 왕 에게우스(그 이름에서 에게 해라는 바다이름이 나왔다)와 트로이젠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테세우스는 어머니 아래서 성장하다가 커서 아버지를 찾아 아테네로 왔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의 큰 고민거리는 아테네 소년 소녀들을 크레타 섬으로 보내야하는 것이었다. 보내진 아이들은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궁 라비린토스에 보내져서 그에게 잡혀 먹히곤 했다. 테세우스는 자청하여 크레타 섬에 가고, 그에게 반한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실꾸리를 잡고 미궁에 들어가서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집주(集注, 시노이키스모스)를 실시한 최초의 아테네 왕이 된다.
미노타우로스 이야기를 황소로 대표되는 바다 쪽의 부족이 테세우스로 대변되는 육지 부족에게 밀리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혹은 17세기의 비코는 이 신화를 고대의 무역과 항해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던 미궁을 복잡한 에게 해로, 실꾸리를 든 아리아드네를 해상술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크레타 문명과 테세우스의 이야기는 신화적 시기가 서로 달라서 테세우스가 훨씬 후대에 속한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전 1400년경 까지 크레타 섬, 특히 크노소스가 에게 문명의 중심지였던 것은 명백한 듯 보인다. 이와 관련한 것이 미노스 해상제국설이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는 미노스 왕이 함대를 소유하고 키클라데스를 비롯한 에게 해 대부분을 지배하였다고 말하였다. 크노소스 궁전 발굴자 에반스도 에게 해 일대 유물이 크노소스 양식과 일치하고, 크노소스 궁전이 대규모인데도 성벽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미노스 해상제국설을 지지하였다. 주변에 큰 영향을 주면서도 성벽을 쌓지 않아도 될 만큼 세력이 컸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지만, 크노소스 일대가 한 때 강력한 바다 왕국을 이루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을 듯하다. 다만 이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라서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강력한 해상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깊이 들여다보기
미노스 해상제국설(Minoan Thalassocracy)

해상제국과 관련한 용어가 구체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곳은 기원전 5세기 헤로도토스의 <역사>이며, 투키디데스의 <역사>에서는 보다 넓고 깊이 있게 사용된다. 특히 투키디데스는 미노스 왕과 관련하여 해상제국 thalassokratia이라는 용어를 썼다. ‘미노스는 처음으로 해군을 만들고, 키클라데스 제도 대부분을 지배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크노소스 유적지가 발굴된 이래 오늘날까지 미노스 해상 제국과 관련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먼저 에반스가 미노스 해상제국을 인정하며, ‘Pax Minoica(미노스의 평화)’ 이론을 내세운 이래, 후계자 펜들베리(Pendlebury)도 미노스 해상 세력이 에게 해는 물론 시칠리아 섬에까지 넓게 퍼져 있었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미노스 해상제국을 부인하였던 대표적인 학자는 스타(Starr)였다. 스타는 당시 에게 해 지역의 경제, 사회적 여건 등으로 볼 때 해상지배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장, 프레스코, 도기 등에서 선박 관련 그림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대표적 증거라 보았다. 그러나 이후에 이루어진 여러 고고학적 발굴로 니마이어(Niemeier), 매닝(Manning) 등 많은 학자들은 당시의 상당한 규모의 중앙집권적 궁정 경제 체제는 미노스 해상 제국설을 뒷받침한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은 해상제국에 대한 새로운 개념, 관점, 해석을 통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나아가서 그러한 해상권은 미케네, 레반트, 시리아, 이집트 등 에게 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출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번성하던 크레타 문명이 파괴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에반스는 미노스 문명이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고고학자 마리나토스(Marinatos)도 테라(산토리니) 섬 화산이 폭발할 당시의 해일과 지진으로 크레타 섬도 함께 파괴되었다고 본다. 테라 섬의 화산 폭발이 미노스 문명을 약화시키기는 하였으나 파괴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기는 하다. 지진, 화산폭발 등의 자연재해설과 더불어 그리스 본토 쪽의 세력 잠식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견된 선문자 B 고문서에 있는 ‘아카이아(즉 그리스 본토) 출신의 왕이 크레타를 통치하고 있다’는 내용은 이러한 변화상을 보여준다. 앞서 살펴보았던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돌아간 테세우스 신화에도 이가 상징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이렇게 미노스 문명은 서서히 저물고, 그리스 본토를 중심으로 한 미케네 문명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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