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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로마사
· ISBN : 9791194263739
· 쪽수 : 592쪽
· 출판일 : 2025-10-20
책 소개
서양 문명의 근원, 로마 제국 도로망 2천 년사
14개국을 가로지르는 현장 답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문명이 남긴 길 위의 서사를 집대성한 명저
고대 로마의 도로는 단순한 기반시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낸 최초의 문명 네트워크였다. 돌과 흙으로 다져진 길 위를 제국의 군대가 행진했고 상인과 순례자, 예술가와 왕이 지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길을 통해 신을 만났고, 지식을 전했으며, 제국의 권력은 길을 통해 세상을 지배했다.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 교수이자 르네상스 및 근세 유럽사 연구로 이름을 떨친 영국의 역사학자 캐서린 플레처는 《로마로 가는 길》에서 2천 년에 걸친 ‘로마의 길’에 대한 역사를 추적한다. 서기전 312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건설한 비아 아피아에서 시작해 중세의 순례길 비아 프란치제나, 나폴레옹의 군사 도로, 무솔리니의 선전 거리, 그리고 오늘날 로마의 관광 코스에 이르기까지 플레처는 그동안의 연구와 14개국을 넘나드는 현장 답사를 결합해 길을 매개로 한 유럽 문명 2천 년의 변화사를 유려한 서사로 엮어냈다. 이 길에서 우리는 제국의 웅대한 유산과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 문명이 걸어온 발걸음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단지 로마 제국의 유산을 다루는 역사서가 아니다. 도로를 통해 권력과 기억, 신앙과 예술,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는 유럽의 심장부를 비추는 인문학적 탐사이자 “길은 문명의 거울이며, 인간의 발자취가 곧 역사다”라는 통찰로 귀결되는 서사적 명저다. 발간 즉시 《월스트리트 저널》, 《파이낸셜 타임스》 등 주요 언론이 “옛 로마의 길을 따라 걷고 싶어지는 책”, “문명의 지도 위에 새겨진 이야기”라고 극찬했으며, 고대사·문화사 연구자뿐 아니라 여행자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플레처는 묻는다. “로마 제국이 사라진 지 1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왜 여전히 로마의 길을 걷고 있는가?” 그 답이 바로 이 책 속에 있다.
정복의 길에서 문화의 길로
로마 도로가 그려낸 문명의 시간
책의 전반부는 로마 도로의 탄생과 제국 통치의 기술을 살핀다. 아우구스투스의 황금 이정표에서 시작해 제국의 중심에서 방사형으로 퍼져 나간 도로가 어떻게 행정·군사·경제·종교의 기반이 되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비아 아피아는 남쪽 브린디시로, 비아 플라미니아는 북쪽 아드리아 해로 이어졌고, 비아 에그나티아는 발칸과 동방으로 뻗어 있었다. 이 도로들은 로마의 군단이 이동하는 통로이자 세금과 법령, 예술과 언어가 전파되는 네트워크였다. 플레처는 동시에 이 길이 정복의 도구이자 지배의 상징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중반부에서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길이 등장한다. 제국이 무너진 뒤에도 도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순례자들은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무덤을 찾아 로마로 향했고, 수도사들은 길 위에 병원과 숙소를 세워 신앙의 길을 지켰다. 비아 프란치제나를 따라 이동한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자취는 ‘신의 도시’로 향하는 인간의 신앙과 용기를 보여준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며 도로는 다시 지식과 예술의 길로 부활했다. 괴테, 몽테뉴, 바이런 같은 지식인들은 로마로 향하며 ‘고전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이 시기 도로는 더 이상 군사적 인프라가 아니라 사유와 문화의 무대,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재발견하는 장소가 됐다.
후반부에서는 근대화와 전쟁의 길이 교차한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도로는 산업화와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나폴레옹의 군사 도로, 가리발디의 행군로, 이탈리아 통일의 상징으로 등장한 신로마의 도로들 모두 근대 국가의 야망을 실은 정치적 상징물이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시대에는 도로가 선전의 무대가 됐다. 그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명목으로 130여 채의 건물을 허물고 고대 유적을 선전물로 바꾸며 도로를 건설했고, 그 위에서 행진과 연설,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플레처는 이 과정을 통해 길이 어떻게 권력의 언어로 변하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플레처는 현재의 길로 시선을 옮긴다. 지금도 로마 시민과 여행자들은 로마의 길을 거닐며 2천 년의 역사를 마주한다. 도로 옆에는 고대의 무덤과 교회, 근대의 빌라가 나란히 서 있다. 플레처는 이를 “과거와 현재, 신화와 일상이 겹겹이 포개진 풍경”이라 표현한다. 관광객의 발길 속에서, 도시의 교통 속에서, 그리고 현대인이 걷는 길 위에서 로마의 흔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시작된 탐구
로마의 길이 남긴 영원한 흔적을 좇다
《로마로 가는 길》은 저자의 오래된 기억에서 비롯된 책이다. 플레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차를 타고 영국 곳곳에 남아 있는 로마 도로의 흔적을 직접 보았다. 아버지는 차창 밖으로 이어진 직선 도로를 가리키며 “이 길이 바로 로마의 길이란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의 인상은 훗날 “길이란 무엇인가, 왜 로마의 길이 오늘까지 남아 있는가”를 묻는 계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역사학자가 된 플레처는 어느 날 어머니의 집에서 1896년에 만들어진 지도를 발견했다. 그 지도에는 로마 도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로마 도로는 당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도 제작자는 지도상에 표시할 정도로 중요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도로망은 기술적·고고학적 차원에서만 연구될 뿐, ‘길 자체가 문명과 기억을 어떻게 형성했는가’를 탐구한 연구는 거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플레처는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학자의 분석력과 여행자의 호기심을 결합했다. 수년 동안 유럽 각지를 직접 답사하며 로마의 길이 남긴 흔적을 발로 확인했고, 그 여정의 결과물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런데 로마 도로가 유럽 전역에 걸쳐 그토록 오랫동안 문화적 존재감을 유지해 온 이유는 무엇일까? 부분적으로는 로마인들 스스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클라우디우스가 도로를 가리켜 ‘지금껏 지어진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기념물’이라고 부른 것은 일리가 있다. 로마의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혈관이자 행정과 군사, 상업이 흐르는 통로였다. 이 도로를 따라 병사들은 속주로 진격했고, 관리들은 법과 명령을 전했으며, 상인들은 포도주와 향신료, 철제 도구를 실어 나르며 지중해 세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었다. 길을 따라 세워진 이정표와 주행 거리석, 도로 유지 규정은 로마의 질서와 법치의 정신이 땅 위에 새겨진 증거였다.
기술적으로도 로마 도로는 시대를 앞섰다. 여러 겹의 포장, 배수 시스템, 직선화된 노선 설계는 현대 토목공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도로는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차량이 다닐 만큼 견고하다. 또한 도로 옆의 이정표들은 로마인들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후원자와 황제의 이름을 생생하게 간직하며 길 자체가 제국의 ‘돌로 된 연대기’로 남았다. 로마 도로망의 장구한 역사는 놀랍고, 그 엄청난 규모는 어떤 단일 건물도 따라올 수 없는 로마의 위력을 보여준다. 찰스 디킨스는 로마의 길을 걸었던 일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도로에 뿌려진 돌 하나하나에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는 옳았다. 로마 도로는 여전히 우리를 연결하고,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학문과 여행이 만나다
길 위에서 쓴 살아 있는 역사
플레처는 직접 14개국을 가로지르며 로마의 길 위에 새겨진 흔적을 관찰하고, 한때 제국의 영광이 지나간 풍경 속에서 오늘의 삶과 기억이 어떻게 겹쳐지는지를 기록했다. 그리고 학자의 시선으로 세밀한 역사적 통찰을 더하면서도 여행자의 감각으로 냄새와 빛, 거리의 풍경을 담아냈다. 책 곳곳에는 이탈리아 남부의 오래된 역, 버스 시간표, 시골 여관의 식사와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처럼 역사적 통찰과 현장감 있는 여행기는 독자로 하여금 마치 저자와 함께 여행하는 듯한 생생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또한 플레처는 해박한 문체 속에 재치 있는 유머와 개인적인 관찰을 섞어 넣어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튀르키예에서 ‘1453’을 두 번 입력해야 접속되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언급하며 1453년은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해를 가리키는데, 튀르키예인들에게 그만큼 인상적인 해였는지 담당자가 그 숫자를 두 번이나 사용했다고 너스레를 떨거나, 보르게세 공원에 있는 바이런의 조각상은 책을 들고 있는데 책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나가 “이제는 샌드위치를 든 것처럼 보인다”고 농담한다. 또한 학자다운 냉철함은 잠시 내려놓고 바닷가 부두에서 맥주를 마시다 손에 든 과자를 낚아채려 달려드는 비둘기들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런 유머러스한 묘사는 독자를 미소 짓게 만들며, 길 위의 역사와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렇듯 플레처는 생동감 넘치는 서술을 통해 역사서의 깊이는 물론, 여행기의 흥미를 겸비한 인문학적 역사서를 만들어냈다.
제국의 도로에서 세계의 길로
긴 세월을 넘어 여전히 이어지는 로마인의 발자취
로마인들이 2천 년 전 닦아놓은 길은 서양 문명의 근육과 신경망이 되어 라틴어와 로마법, 도시의 구조와 행정 체계, 예술과 신앙을 유럽 전역으로 전파시켰고, 그 결과 로마의 흔적은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 발칸, 심지어 북아프리카와 중동까지 스며들었다. 로마의 길이 없었다면 중세 수도원과 성지 순례의 문화도, 르네상스의 예술과 교류도, 근대의 과학과 사상도 빠른 속도로 퍼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제국의 몰락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로마를 단순한 도시가 아닌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와 역사적 영광을 되살릴 상징적인 대상으로 보고, 로마 도로의 직선성과 합리성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처럼 유럽의 도로 체계는 로마의 길 위에 겹겹이 덧입혀졌다. 무솔리니 역시 로마 도로의 형식을 정치 선전의 무대로 이용했다. 플레처는 이 모든 사례를 통해 “로마의 길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근대의 상상력과 권력의 모델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로마의 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비아 아피아의 일부 구간은 지금도 로마 남부를 잇는 도로로 사용되고 있으며, 로마 시대의 노선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는 고속도로와 철도 역시 적지 않다. 로마를 찾은 관광객들은 옛 도로를 걸으며 고대의 숨결을 느끼고, 도시의 일상 속에서 2천 년의 시간이 겹쳐짐을 발견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는 로마 도로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문화적 풍경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2천 년의 길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로마로 가고 있다.
목차
지도
프롤로그: 로마의 길은 이야기가 있다
1부 파괴할 수 없는 기념물: 서기전 350~서기 500
1 | 길에서 만난 로마인들
2 | 로마 제국을 가로지르는 길
3 | 초기 기독교인의 여행
2부 성자들과 군인들: 500~1450
4 | 비잔티움과 비아 에그나티아
5 | 순례자와 비아 프란치제나
6 | 십자군과 비아 밀리타리스
3부 로마 제국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거들: 1450~1800
7 | 도로의 르네상스
8 | 탐험가, 첩자, 사제들
9 | 왕실의 피난자들
10 | 그랜드 투어
4부 처음엔 도로, 그 다음엔 철도: 1800~1900
11 | 나폴레옹
12 | 낭만파 인사들
13 | 미국인들
14 | 새로운 서사, 오래된 제국
5부 로마로 행진하기: 1900~현재
15 | 비아 무솔리니아
16 | 비알레 아돌포 히틀러
17 | 7번 도로
18 | 로마의 휴일
에필로그: 오늘날의 길들 위에서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여행 경로
참고문헌
주
화보 도판 출처
찾아보기
책속에서
프롤로그│로마의 길은 이야기가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것은 중세에 나온 표현으로, 최초의 기록은 프랑스 시인 알랭 드 릴의 저작에서 발견된다. 그는 근 1000년 전에 “수천 갈래의 길이 세월을 넘어 사람들을 로마로 인도한다”고 썼다. 영국 버전은 이보다 약 2세기 뒤에 나왔는데, 제프리 초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다양한 길이 다양한 사람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로마로 데려간다.” 이 표현은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고대 로마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1장│길에서 만난 로마인들
도로망 건설에 투입된 노동자들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한 전문가는 5년이라는 공사 기일에 맞추어 비아 아피아의 첫 구간 185킬로미터를 완공하는 데 2만 5천 내지 3만 6천 명의 노동력이 들어갔을 거라고 추산했다. 기계식 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은 놀라운 업적이었다. 토지 측량사에서 석공 그리고 중노동 인부에 이르기까지 세련된 기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루기 어려운 작업이다.
3장│초기 기독교인의 여행
사도들의 로마 체류가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면, 로마의 기독교 신자들 또한 순례자가 되어 제국의 도로망을 이용하면서 성지로 여행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는 326년에 순례길에 오른 초기의 예시다. 헬레나가 다른 사람들의 순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몇 년 뒤 우리가 단지 보르도 순례자라는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이가 서부 프랑스에서 성지까지 순례 여행을 했다. 그가 남긴 여행기는 포이팅거 지도나 《안토니누스 여정표》보다 훨씬 상세하다. 하룻밤 잠자리, 식사, 목욕탕을 제공하는 숙박 시설뿐만 아니라 역참에 대해서도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