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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통일/북한관계 > 통일문제
· ISBN : 9788968497933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1-02-26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 004
통일, 그 낯선 시작 / 012
통일, 지속과 단절 / 013
통일의 다른 이름, 실업 / 022
통일, 길을 잃은 민주주의 / 033
읽어버린 동독, 잃어버릴 수 없는 나 / 046
통일 독일의 새 이주민 / 047
초콜릿을 살려라 / 058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 069
나는 오스틀러, 너는 베시 / 080
통일의 패배자 / 081
저 너머의 이등 국민 / 091
일란성 쌍둥이의 45년 만의 해후 / 100
과거의 흔적과 시간 / 112
동독 주민의 친구, 신호등맨 / 113
추억의 팔라스트 / 123
어느 독일 통일의 ‘날’, 동독주민 / 134
같은 통일, 다른 통일 / 146
통일의 주변인, 4050세대 / 147
무너진 삶의 기반, 여성 / 161
‘낀 세대’의 분투, 청소년 / 174
통일 30년, ‘독일’과 ‘동독’ / 188
또 하나의 사회 / 189
30년 지기 이웃에 대한 불편함 / 200
에필로그 / 215
미주 / 228
참고자료 / 249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서베를린 번화가의 백화점, KDW
동서독 통일 전, 동독이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섬처럼 위치했던 서베를린의 중앙역 기능을 담당했던 동물원 역 인근의 번화가를 걷다 보면 독일어 발음으로 카데베(KDW), Kaufhaus des Westen라는 이름의 백화점이 눈에 띈다.
우리말로는 ‘서부 백화점’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문을 연 지 100년이 훨씬 넘은 카데베는 베를린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손에 꼽히는 고급 백화점이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동서독의 경계를 넘어 처음으로 ‘건너편’ 서쪽에 온 동베를린 주민들이 구경삼아 들어갔다가 물건에 붙어 있는 엄청난 액수의 가격표를 보고 화들짝 놀라서 성급히 나왔던 곳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카데베 앞을 지날 때마다 종종 들었던 생각은 독일이 통일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 백화점이 여전히 서베를린의 느낌이 드는 ‘서부 백화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가 보여주듯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동서독 분단 이전부터 운영되고 있었던 곳이기에 백화점의 이름이 동서독 분단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서독 통일을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동서를 가로질러 서 있던 베를린 장벽이 관광객의 볼거리가 된 상황이었으므로 백화점 이름을 동서독 통일과 통합의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 바꾸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언젠가 7∼8명의 박사과정생이 모인 수업 시간에 카데베에 대한 내 의견을 이야기하자 여럿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인데 일리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독일 생활 경험이 쌓이면서 뭐든 쉽게 바꾸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곳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태도가 차츰 이해됐다. 정당명이나 기업 상호, 심지어 수십 년간 불리던 자기 이름까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바꾸는 것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살아온 내 견해가 그곳 사람들에게는 조금 새로운 것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분단 이전부터 존재했던 카데베가 지금도 여전히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통일과 함께 동서독 주민이 직면했던 상황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통일과 더불어 동서독은 양쪽 모두 새로운 역사의 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동독인에게는 이전 삶의 방식으로부터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급격한 변화(단절의 코드)가 발생한 반면, 서독인의 경우는 이전의 삶이 거의 변화 없이 유지(지속의 코드)되고 있는 독일 통일의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독인들이 겪어야 했던 상황을 나타내는 단적인 표현으로 “통일 후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사회 체제로 내던져졌다.”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현실화된 사회주의 실험 공간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아오던 동독인들이, 비록 직접 선택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직면하게 된 새로운 체제와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바뀐 체제가 이전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라면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통일과 함께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체제에 직면한 동독 주민
통일과 함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 경제 체제가 급격한 방식으로 이식되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이 동독 지역에서도 ‘삶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식된 체제의 특성이 반영된 질서, 규율, 도덕 등이 삶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제시됐고, 그에 맞는 정치, 경제적 능력이 새로운 사회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핵심 역량으로 개인에게 요구되었다. 다시 말해, 통일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에서 살아왔던 동독 주민에게 삶의 방식에 있어 일대 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관계를 중요시하던 삶의 방식은 성과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했고, 정해진 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획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역량이 중요하게 강조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해도 개인의 삶의 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뀐 체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동독 주민들은 통일 이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냉혹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직업 생활과 관련해서 통일 후 80% 이상의 동독인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직업을 포기하고 새로운 직업을 갖거나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는 것은 그들이 직면했던 어려움의 대표적인 예다.
통일 초기에 동독 지역에 도입된 8만여 개에 달하는 법 조항은 동독인들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대규모 실업 상황에서 창업 등 경제적으로 무엇이든 시작하고 싶어도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정보와 지식과 경험이 충분치 않은 동독인들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뭔가를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자본이 없다는 것도 결정적인 문제였다.
임금이 오르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껑충 뛰어오른 집세,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지는 수많은 종류의 보험,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소득신고 등 이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이 가져온 크고 작은 많은 과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통일 초기에 동독인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체제가 가져온 수많은 변화는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개인 일상의 소소한 영역에서도 쉽게 발견되었다. 통일과 함께 이전의 일상을 채우고 있던 익숙하고 친근했던 많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그 자리에는 낯선 서독의 것들이 채워졌다. 버터, 초콜릿 크림 등 매일 아침 식탁에 오르던 낯익은 음식들은 상점 진열대에서 사라지고 서독 상품으로 대체되었다. 낯선 독일어를 구사하는 서독 출신의 앵커가 구동독 지역방송과 TV 뉴스의 화면에 등장했다. 주민투표를 거치기는 했지만 살던 동네와 거리의 이름이 바뀌었고 새로운 우표와 버스표 등 일상에서 바뀌지 않은 것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정말 ‘나’ 말고는 바뀌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전에 회자되던 농담마저 의미를 상실했다. 하루아침에 낯설게 바뀐 삶의 환경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동독인들은 큰 심리적 공황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이 가져온 자유와 풍요, 그러나
통일과 함께 맞이한 변화된 환경이 개인의 삶에 가져온 긍정적 변화를 물론 무시할 수 없다. 오전 10시가 넘으면 빵 가게의 빵이 동나는 것이 일상이었고, 자동차를 구입하려면 10년 이상 기다려야 했던 동독 시절의 만성적 부족에서 벗어나 통일 초반 시기, 동독인들은 통일이 가져온 넘치는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일부 계층에게는 고등교육과 직업의 기회가 제한되는 등 크고 작은 제약이 존재했던 동독 시절과 달리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능력에 따른 자기실현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새로운 사회가 동독 주민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공간으로 인식됐다. ‘동독 시절이었다면 나는 대학에 오지 못했을 거야. 그때는 정말 소수만 대학에 갈 수 있었거든’이라고 말하던 동독 출신 친구에게 정말 그것은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전과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 여행의 자유 등 통일이 이전에 누릴 수 없었던 많은 자유를 동독 주민들에게 가져왔다는 것은 자명하다.
문제는 삶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환경은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개인의 인식과 행동양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가져왔지만 또 그만큼 낯설게 바뀐 환경 속에서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과 생각과 생활양식 등이 하루아침에 가치를 상실한 가운데 짧은 시간 내에 모든 것을 새로 익히고 배워야 하는 과정에서 동독인들은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었지만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사회주의 체제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오던 동독인들에게 오리엔테이션의 기회도 없이 다가온 새 체제는 엄청난 삶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던 동독 사회는 개인의 삶에 안정감을 보장했었다.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부족은 있었지만 적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느낄 필요가 없었다. 반면 자유와 풍요가 주어졌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새로운 체제에서 동독인들은 미래에 대한 적지 않은 불안을 느꼈다.
구동독 인권운동가 출신의 전 연방대통령인 요아힘 가욱Joachim Gauck은 2005년 베를린에서 있었던 한 강연회에서 통일 후 동독인이 느꼈던 감정을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설명했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주어진 삶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은 동독 주민에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는 큰 두려움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새 체제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과정 없이 어느날 갑자기 직면한 새로운 환경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을 단기간에 습득할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깊은 자국을 남긴 단절의 경험
하루아침에 주어진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전체 삶의 영역에서 분투하는 사이, 어느덧 한 세대의 시간이 지났고 동독 주민은 서독으로부터 이식된 체제를 더 이상 낯설게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독인들이 겪어야 했던 이전 삶으로부터의 극단적 단절의 경험은 그만큼 그들의 기억에 깊은 자국을 남겨 놓았고 한 세대가 지난 지금도 동독인은 여전히 그 여파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언제쯤 그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단절의 코드’와 ‘지속의 코드’로 설명할 수 있는 동서독 주민의 통일 후 삶의 모습은 남과 북의 하나됨이 어떤 방식,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메시지를 던진다. 변화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 변화의 시작은 어느 한쪽의 일방성이나 이전 삶과의 급격한 단절이 아닌, 양쪽이 긴 호흡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시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 아닌 상생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구동독의 어느 주택가 이야기통일 전 동독에서 20여 년간 기계생산 분야에서 일했던 헬무트 씨. 그는 직장에서 존경받는 기술인이었고 가정에서는 충실한 가장이었다. 독일 통일 후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가 된 그는 구직을 위해 자동화 설비 관련 직업교육을 받았다.
실업 수당을 받고 있어 당장 생계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직업교육이 끝난다고 해도 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이었다. 헬무트 씨는 그나마 아침마다 집을 나서는 자신을 창밖으로 물끄러미 내다보는 이웃 남자를 보면서 위안을 얻었다. 50세를 갓 넘긴 그의 이웃은 직업교육의 기회를 얻는 것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다.
서독으로의 편입 후 몰아닥친 실업
통일 후 구동독 지역은 서독을 지칭하는 ‘구(舊)연방주(Alte Bundeslaender)’라는 단어에 대비되는 ‘신(新)연방주(Neue Bundeslaender)’라는 용어로 지칭됐다. 2차 대전 패전 후 독일이 분단되면서 폐지됐다가 통일 직전에 다시 도입된 구동독의 5개 주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재편입되는 형식으로 통일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연방주, 즉 구동독 지역에서 통일 이후 대규모로 실업이 발생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공식 통일에 앞서 1990년 5월, 동서독 간에 체결된 경제, 화폐, 사회 통합 조약을 기반으로 동독 체제의 전환이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통일 초반에 980만 명가량에 이르던 동독 생산 인구 중 300만 명가량이 실업자가 됐다.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된 동독 기업을 공격적으로 청산하면서 대규모로 실업자가 발생한 탓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수치는 그 자체로도 굉장히 높았는데 실제의 실업률은 그보다 더 높았다. 40만 명에 이르는 조기 은퇴자뿐만 아니라 직업교육 등 각종 고용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은 공식 실업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의 혹은 자의로 실업자와 유사한 상황에 있었으나 통계에는 포함되지 않은 숫자를 모두 포함하면 통일 초반 구동독 지역의 실제 실업률은 40%가 훨씬 넘었다.
모든 것이 좋아질 것으로만 생각했던 새로운 사회에서, 동독 시절 생산인구의 절반가량이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인생의 커다란 위기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