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69761095
· 쪽수 : 460쪽
· 출판일 : 2014-07-30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밤의 손길 007
1화. 검은 낮, 하얀 밤 013
2화. 빛 속으로 043
3화. 숨 쉴 수 있는 낮 065
4화. 어둠 속으로 103
5화. 찬란한 어스름 141
6화. 빛을 잃은 어둠의 유혹 173
7화. 어둠과 빛의 경계 207
8화. 어둠의 가면을 쓴 탐욕 241
9화. 빛의 신기루 같은 그녀 283
10화. 밤이 삼켜버린 동화 319
11화. 어둠을 삼킨 빛 359
12화. 빛나는 어둠에서, 우리 397
에필로그. 반짝반짝 447
후기. 456
책속에서
“계약 조건을 잊은 건가?”
오늘따라 이언이 참 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물어도 대답조차 시큰둥하더니.
“무슨 조건을 말하는 건지 난 잘 모르겠는데요?”
진심으로 의아했다. 이언이 말하는 계약 조건이 뭘 말하는 건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왜 화가 난 얼굴을 하는지는 더더욱.
크게 감정 표현을 하지 않던 그였다.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거기서 거기인 표정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화도 낼 줄 아네? 그 생각으로 서은은 그를 지나쳤다. 보나 마나 이 시간에 저녁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 이제 제 업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서은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이언을 채 지나치기도 전에 그의 손에 팔을 붙들리고서야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왜, 왜요?”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이언이 제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어떠한 일에서도 존칭을 고수해 달라는 조항을 얼핏 본 것 같은데 그가 먼저 그 계약 조건을 깨다니.
“내게 고용된 순간부터 윤서은은 정이언의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이언이 최우선이어야 하며, 오롯이 정이언에게만 집중해야 한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집에 들어와 그쪽만 전담하고 있잖아요. 하루 24시간 중 몇 시간만 제외하면 온통 그쪽을 위해 일하고 있는데 왜……?”
이언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서은의 대답이 마땅찮았다. 도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이언은 자신이 얼마만큼 화가 났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다니.”
“거짓말이라뇨?”
“최승훈!”
“……!”
서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승훈을 잠시 만났다고 이렇게 화를 내는 건가? 그것도 우연히 부딪친 걸 가지고?
“내가 누굴 만나든, 그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계약 조건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다시 말하지. 윤서은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이언이 최우선이어야 하며 오롯이 정이언에게만 집중한다는 조항을 어겼어. 다른 남자에게 집중하는 시간 동안 윤서은이 그에게 웃어 주던 얼굴을 똑똑히 봤으니까 딴소리할 생각 마!”
기가 막혔다. 제가 알던 정이언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요즘 일이 너무 바쁘고 피곤해 정신이 살짝 어떻게 된 게 아닐까? 누가 보면 질투하는 남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서은은 같이 화를 내면 역효과만 날 것 같아 피식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건 승훈이가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 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좋은 소식을 들으면 당연히 기분 좋은 거 아니에요?”
“그때 내 생각했었나?”
“네?”
서은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점점 대화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수준에서 벗어나 질투하는 연인의 것처럼 변해가는 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 않았겠지, 당연히! 넌 계약 조건을 어겼어!”
화가 폭발했다. 이언은 이성을 잃고 서은의 팔을 잡아당겼다. 맥없이 딸려온 서은이 단단한 이언의 가슴을 느끼는 순간 낯선 감각이 입술을 꿰뚫고 밀려왔다.
‘뭘까……. 이건 뭐지?’
흠칫 굳어진 서은은 거칠게 입술이 짓이겨지는 감각에 몸이 화끈거렸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앞에 검은 막이라도 드리워진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언은 서은의 입술을 삼키자 역으로 제 이성이 그녀에게 삼켜진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맛보는 새로운 미각. 그 미각에 눈을 뜨자 욕망이라는 낯선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탐욕적으로 변해갔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달콤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졸깃한 감촉과 탄력 있는 야릇함.
세상에 그 어떤 음식이 이보다 더 식욕을 돋울 수 있을까!
이언은 굶주린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식탐을 통제하지 못하고 게걸스럽게 서은의 입술을 핥고 빨아댔다. 거친 물살을 만난 배처럼 일렁이는 그의 혀가 더 맛있는 것을 찾아 그녀의 입술을 갈랐다. 예상의 범위에서 벗어난 이언의 행동에 놀라 몸이 굳어버린 서은은 한 번의 반항도 없이 그에게 길을 열어주고 말았다.
“……!”
제 것이 아닌 이질적인 물질이 무람없이 제 입속으로 들어오자 서은은 소스라쳤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녀의 착각에 불과했다. 뜨거운 이언의 혀가 제 혀를 찾아 감아 돌자 또다시 의식이 점점 멀어져갔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달달 떨려 서은은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뿐인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질투 어린 거친 키스를 받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려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승훈과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격렬하고도 낯선 희열.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이언은 서은에게 벌을 준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것이면서, 잠시나마 다른 남자의 것이었던 서은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명백히 계약을 어긴 거니까.
계약을 어기면 분명 이렇게 될 거라고 경고했었다. ‘계약을 어길 시, 정이언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의 명령에 따를 것’이라고.
윤서은은 약속을 어겼고 벌을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