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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미술가
· ISBN : 9788970844039
· 쪽수 : 192쪽
· 출판일 : 2009-07-31
책 소개
목차
[머리글] ‘착한’ 그림을 그리며 ‘진짜’를 꿈꾸었던 화가
적정 온도 36.5도를 머금은 인간애
재래의 가치를 입은 사람들
맑은 정신으로 흐린 세상을 건너다
‘따로’ 또 ‘함께’ 가는 길
덜 가지고도 더 존재하는 이들
무딘 칼로 새긴 것이 오래간다
고난의 길에서 배운 인내
켜켜이 쌓인 기다림의 시간을 완주하다
박수근 연보
주
참고문헌
본문에 사용된 목판화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수근과 박완서가 만난 것은 1951년 겨울이다. 장마도 허기도 길고 지루하던 때였다. 거리의 우유죽 배급소에서 허겁지겁 굶주림을 피하며 막노동과 날품팔이로 이어가야 했던 삶은 불안했다.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어린 조카와 노모를 책임져야 했던 박완서와 밀레와 같은 화가를 꿈꾸었으나 당장 가족들의 거처가 절실했던 수근에게 미군부대 피엑스는 위태로운 삶을 간신히 잡고 있기 위한 절실한 임시방편이었다. 위탁매장의 어린 박완서가 한참 나이가 위인 수근을 ‘박 씨’로 호령했던 것도, 간판장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수근이 그러려니 한 것도 이런 시대가 짐 지운 굴레였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하는데. 퇴짜를 맞으면 어쩌지.”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는 수근을 따뜻하게 배웅해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도 어김없이 주린 눈으로 아빠의 얼굴보다 손을 먼저 쳐다볼 아이들의 눈초리가 생생했다. 만약 미군이 스카프를 끝내 가져가지 않는다면 천 값에 해당하는 1달러 30센트는 고스란히 수근의 몫이었다.
미군이 떠난 초상화부 안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사진 좀 똑바로 보고 그려요. 원 눈을 감고 그리나, 발가락으로 그리나……. 이렇게 그려 놓고 빠구 받으면 내 탓처럼 굴겠지.” 한참 어린 중재자의 악다구니를 들으며 수근이 할 수 있는 일은 붓 꾸러미를 만지작거리는 것뿐이었다. 붓은 초상화부 안에 있으니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수근이 품에 끼고 살 만큼 아끼던 바로 그 붓 꾸러미였다. (122~123쪽)
어느덧 겨울이 왔다. 수근은 홀로 있는 평양이 몹시 춥다는 내용의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수근이 머물던 당시 평양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되고 있었다. 춥기는 아내나 수근이나 마찬가지인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 아내의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편지를 다 읽은 아내는 수근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솜씨가 좋았던 아내는 예쁜 털실로 수근의 스웨터를 짜서 평양에 보내주고 싶었다. 굴뚝같은 것은 마음뿐이었다. 새로 털실을 살 만큼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 궁리 끝에 아내는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수근의 스웨터를 짜기 시작했다. 문제는 털실의 색깔이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아내는 빨강색 털실을 남색으로 염색했다. 염색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결국 털실은 붉은색을 띤 남색 즉 보랏빛이 되었다. 목도리를 푼 털실로 스웨터는 무리였다. 계획은 스웨터에서 조끼로 바뀌었다. 낮에는 들에 나가 일을 했기 때문에 뜨개질할 시간은 밤뿐이었다. 마침내 조끼는 완성되었고, 아내는 피로로 눈병에 걸렸다.
얼마 후 완성된 보랏빛 조끼가 수근에게 전해졌고, 다시 며칠 뒤 조끼를 입은 사진을 동봉한 수근의 답장이 도착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빼곡한 답장이었다. 털실 하나도 마음에 드는 색깔로 살 수 없을 만큼 세상이 각박해서였을까. 보랏빛 조끼가 전하는 여운은 꼬리가 길다. (26~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