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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 ISBN : 9788970909721
· 쪽수 : 504쪽
· 출판일 : 2013-11-05
책 소개
목차
사진으로 보는 60-70년대 한국 현대사
서문_민주화와 산업화, 상생의 통합적 역사 인식 없이 ‘통일 한국’은 없다
1부. 우연의 역사는 없다
4·19와 5·16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나
그 시절, ‘민주주의’는 목숨과 맞바꾼 갈망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태동, 4·19혁명
분노의 단순폭발에서 시민혁명으로
‘배고픈 자유’만 안겨준 미완의 혁명 4·19
4·19 이후의 김지하
진정한 진보주의자 죽산 조봉암
가난했던 청춘들
새벽을 가른 총성, 5·16군사쿠데타
얼어붙는 정국
박정희 정권의 첫 실패작, 화폐개혁
6·3의 도화선이 된 한일국교정상화 추진
굴욕외교인가? 실리외교인가?서울대 교정에 울려 퍼진 김지하의 조사 ‘시체여!’
방관자에서 주모자로!
박정희 정권 첫 계엄령,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내리막길
“이 빨갱이야! 다시는 감옥 가지 마라”
삶의 방향도 잃고 건강도 잃고…
2부. 가난의 시대 딛고 고도성장의 시대 열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골 깊은 반목
경제성장의 견인차, 한일협정과 월남 파병
청와대 기습한 김신조,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아침이슬! 광야로 나설 운명임을 예감하다
나라 좀먹는 부정부패세력 고발한 <오적> 필화사건
법정에 선 저항시 <오적>
포항제철 첫 삽 뜨고 경부고속도로 뚫리다
한국 노동운동의 불쏘시개가 된 그 이름, 전태일
유신의 서막, 3선 개헌
거물급 야당정치인 김대중의 부상(浮上)
사법파동, 집권층 심장부에서 정권에 반기를 들다
도시빈민의 피눈물, 8·10 광주대단지 사건
양극화의 비극은 분노의 불길로 타오르고…10·5원주시위, 보수 가톨릭 교단마저 일어서다
민주화운동사의 거룩한 영웅, 조영래
위수령에 비상사태 선포까지 살얼음판 정국
북한의 도발, 주한미군 철수… 증폭되는 안보불안
무소불위 권력 앞에 세상도 숨죽이다
저항시인과 정보부요원의 아름다운 인연
“김지하를 사형에 처하면 대사관을 폭파하겠다”
김수환 추기경, 김지하에게 ‘가톨릭의 길’을 묻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과의 인연
온몸으로 ‘이념시대’를 살아낸 김지하의 장모, 박경리
통일의 희망으로 설렌 7·4남북공동성명
급변하는 국제정세, 미국도 중국도 더는 못 믿겠다!
8·3 사채동결 조치, 국민의 돈으로 재벌사채 갚아주기?
8·3조치의 최대 수혜자는 기업, 희생자는 중산층
3부. 유신의 빛과 그늘
경제우위 안보우의의 시대, 신음하는 민주주의
유신의 시작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쓰다
남진 나훈아 노래에 담긴 70년대 정서
경제강국을 향한 꿈,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라!”
“무기 만들어야 힘 있는 나라 된다”
유신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박경리 딸 김영주와 결혼하다
김대중 납치사건, 흔들리는 박정희 정권
의혹의 눈길은 정권의 심장부를 향하고…
대학가 반정부 반독재 시위 불붙다
DJ 납치, 최종길 교수 고문살해… 중정의 잇단 자충수
김옥길 총장, 박 정권에 “중앙정보부 개혁하라” 돌직구
유신헌법개정운동, 들불처럼 번지는 시국선언
암흑정치에 경제난까지 덧씌운 1차 오일쇼크
공포정치의 시작, 긴급조치의 시대 열리다
‘사형’ 포고령, 긴급조치 4호의 선포
내란선동 사건으로 비화된 민청학련 사건
불안한 도피생활, 다시 영어의 몸이 되다
정보부와 가톨릭교단 발칵 뒤집은 김지하의 자백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의 독대
육영수 여사 흉탄에 지다
청와대 속 야당 자처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
가뭄에 양수기 끌어안고 울어버린 육영수 여사
박근혜 대통령, ‘나의 어머니 육영수’
긴급조치 해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박정희의 폭탄선언 “투표에서 지면 하야하겠다!”
유신정권에 면죄부가 되고 만 유신헌법국민투표
그 겨울 교도소 앞 풍경 속의 또 한사람!
김지하에 의해 폭로된 인혁당 고문조작 사건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고행’의 길
베트남·캄보디아 공산화, 반공 구호에 묻힌 민주화 열기
민주화운동사의 숨은 조연, 민주교도관들
감옥으로부터의 서신, ‘양심선언문’ 반출작전
종이도, 접견도, 운동도 금지된 처참한 감옥생활
중동특수가 가져다 준 사상최대의 경제호황기
‘무작정 상경’한 누이들의 영화 전성시대
개인 취향마저 단속하던 그때 그 시절, 유신의 추억
‘재야의 대통령’ 장준하 의문사 이후의 민주화운동
최후진술 “박정희와 중정요원들에게도 하늘의 은총을”
감옥에서 생명사상을 깨치다
4부. 반목을 딛고 통합된 미래로!
역사의 주역은 민중이었다
카터 정부 등장 이후 고조되는 한미갈등
역대 최악의 한미 정상회담
수치로만 배부른 고도성장, 인플레이션
박정희와 김영삼의 영수회담
김재규와 차지철의 첫 갈등 ‘백두진 파동’
취기가 빚은 일화, 동아일보 기자 박치기 사건
제1야당 당수 김영삼의 정면도전
독재정권의 맨얼굴 드러낸 YH 폭력진압 사건
YH 여성노동자, 김경숙의 죽음
김영삼 정계 추방작전
칼끝대치 속 마침내 닥치고 만 ‘제명전야’
부마항쟁의 도화선, 김영삼 의원직 제명
부산항쟁, 유신의 종말 재촉하다
부산보다 격렬한 시민혁명, 마산항쟁
파국으로 가는 사다리, 차지철
불길한 갈등의 증폭
10·26 운명의 그날!
“오늘 차지철을 해치울까요?”
유신의 심장을 겨누다
느닷없는, 그러나 예고된 종말
“총을 맞은 순간 대통령은 체념한 듯 보였다”
비밀에 붙여진 대통령 서거소식
누구도 상상 못한 범인의 실체
‘인간 박정희’를 보내다
“안녕히 가십시오.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5년 9개월만의 석방
그리고 남은 이야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 시절, ‘민주주의’는 목숨과 맞바꾼 갈망이었다!
“이철 사형! 유인태 사형! 김병곤 사형! 나병식 사형! 여정남 사형! 김지하 사형! 이현배 사형!”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늪과 같이 적막하던 법정에 검찰관의 긴장된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방청석에서 낮은 비명이 새나왔다.
1974년 7월 9일 서울 용산구 육군본부 건너편 비상군법회의 법정. 유신시절 최대 반독재투쟁사건이라 할 만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의 구형이 내려지고 있었다. 재판은 6월 15일부터 진행됐지만 엄격한 보도통제가 취해지고 있었다. 법정은 바깥세상과는 유리되어 밀폐된 진공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중앙 정면 단상에는 붉게 상기된 얼굴의 재판부가 앉았다. 복도는 물론이요, 법정 안까지 총을 든 헌병들이 늘어섰다. 흉가(凶家) 같은 막사를 개조해 만든 서른 평 남짓 법정 안은 30도가 넘는 바깥의 찌는 듯한 폭염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상한 한기(寒氣)가 감싸고 있었다. 칼날이 선 것처럼 날카로운 재판정은 살기(殺氣)까지 느끼게 했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매미 울음소리만 쏟아져 들어왔다.
흰 죄수복을 입은 피고인들은 오랏줄에 묶이고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나란히 앉았다. 지난 2개월간 조사를 받으며 몽둥이 고문, 잠 안 재우기 고문, 전기 고문 등 온갖 고문을 다 당해 거의 초주검이 된 모습이었다. 피고인 1인당 가족 1명으로만 제한된 법정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족들도 모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중략)
“사형을 주시니 영광입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특정 사건 하나만을 겨냥해 만든 법률이라는 점에서 초유의 법령이었다. 우선 수사 대상자가 엄청났다. 중앙정보부는 총 1024명(자수 266명)을 조사했고 이 중 745명을 훈방하고 253명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했다. 그 가운데 기소된 사람은 180명이다. 비상군법회의는 초스피드로 재판을 진행해 첫 공판을 연 지 불과 24일 만인 7월 9일 1심 공판에서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2명에게 징역 20년과 15년, 6명에게 징역 15년 등의 중형을 구형했다(《인권변론자료집》).
엄청난 형량에 변호인들이 당황하고 흥분했다. 세 번째로 나선 강신옥 변호사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과연, 법은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하고 느낀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랏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빨갱이로 몰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다. 이는 사법살인 행위가 될 수가 있고….”
그의 폭탄발언에 법정 안의 긴장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본 변호인은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그리고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를 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변론은 중지 당했고 재판장은 휴정을 선언했다. 결국 강 변호사는 일주일 뒤 법정모욕죄로 구속된다. 변호사가 변론 때문에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중략)
사형을 구형받은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시작됐다. 모두 비장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김지하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참새도 죽을 때 짹 하는 법이다. 사람이라고 짹 소리 못 할까보냐. 법을 이렇게 끌고 가면 앞으로 어느 미친놈이 법을 지키겠느냐. 법이 없어지면 뭘로 민주주의를 할 거냐. 군인들이 다 할 거냐.”
이날 압권은 김병곤이었다. 그는 1971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3학년 때 민청학련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됐고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다 1990년 위암으로 숨진다. 김병곤은 최후진술 순서가 되자 재판정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런데 모두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던 것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民生)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의 눈길과 자태에서 속된 삶의 욕구를 훌쩍 뛰어넘은 ‘무념의 경지’가 느껴졌다. (중략)
민주화운동사의 거룩한 영웅, 조영래
서울에 위수령이 떨어지자 대학가는 침묵에 들어갔다. 주요대학에는 군 병력이 진주했다. 그렇지 않아도 쌀쌀한 날씨에 정국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했다.
서울에 머물며 몸을 숨기고 있던 김지하는 1971년 11월 초순 어느 날 명동입구 흥사단본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며칠 전 조영래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곧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약속장소에 조영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지하를 대신 맞은 함석헌 선생 말이 “잡혀갔다”고 했다. (중략)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은 불법연행, 고문수사, 자백강요, 정보기관의 재판간섭, 공소장을 베낀 판결문 등 당시 주요 시국사건의 처리절차를 그대로 답습한 사건이었다. 재판은 대법원까지 올라가 72년 12월 27일 장기표, 심재권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이신범 징역 2년, 조영래 징역 1년 6개월이 각각 선고됐다. 당시를 회고하던 김지하는 “조영래의 부재가 준 허탈과 충격이 너무 컸다”고 말했다.
“영래가 없다니… 상실감이 너무 커서 한동안 얼이 빠져 지냈다. 한 사람이 옆에 있고 없다는 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더구나 조영래가 누구인가. 우리의 기둥이었고 자랑이었던 사람 아닌가.”
그러면서 평소 그의 인품이 어땠는지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며 소개했다.71년 10월 김지하가 ‘원주 시위’를 지휘하며 조영래와 긴밀하게 연락할 때였다. 모든 일을 척척 완벽하게 처리하는 그에게 김지하가 “조 형, 참 대단하오. 대단해”라며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영래의 답이 “안 듣겠습니다”였다. 다시 김지하가 “이 모든 일들을 어찌어찌 해나가고 있는지 말해 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모르십시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김지하의 말이다.
“모르십시오…라. 나는 그 뒤부터 조영래를 생각할 때마다 이 말을 생각하며 혼자 웃곤 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 조영래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