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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불교 > 불교 경전/법문
· ISBN : 9788974799434
· 쪽수 : 480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서설_산스끄리뜨본 금강경 사본의 현황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제2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4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제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제9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제12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제13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15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제16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제17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제20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2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제24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제25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제28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제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미주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출가한 비구가 지닐 수 있는 여섯 가지 물품[比丘六物] 가운데 세 벌의 옷과 한 벌의 발우[三衣一鉢]가 있듯이, 출가 수행자의 옷은 ① 내의(內衣)로 불리며 취침 등 일상생활 때 항상 입고 있는 바탕옷인 안타회(安陀會, antarvāsas)와 ② 상의(上衣)로 불리며 예불·청강·포살 등 각종 법회 때 덧입는 윗옷인 울다라승(鬱多羅僧, uttarāsaṁga), ③ 대의(大衣)로 불리며 설법할 때와 탁발하러 나갈 때 그리고 왕궁에 들어갈 때 입는 정장인 승가리(僧伽梨, saṁghāṭī)로 나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은 중국의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며, 인도 초기 승가의 삼의와 다르다. 초기 승가에서는 더운 여름에는 한 겹의 옷인 안따르와싸스(antar[안쪽]+vāsas[옷])를 입고 지내다가 조금 쌀쌀해지면 덧옷인 웃따라쌍가(uttara[위에]+āsaṁga[걸치는])를 입었으며, 상가띠(saṁghāṭī[연결해주는 것])는 옷의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일종의 예복이자 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밀의 산스끄리뜨인 빠라미따(pāramitā)는 '피안으로(pāraṁ) 건너가는(√i) 것(tā)'이라는 의미이다. 보시바라밀은 '보시+피안으로+건너가는+것'이란 구조의 복합어인데, 이 복합어를 문법적으로 어떻게 풀이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우선 '피안으로+건너가는+것' 부분은 피안(pāra)에 격조사를 갖춘 상태이므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란 의미로 확정되어 있다. 따라서 '보시'에 어떤 격조사를 붙이는가에 따라 전체 의미가 결정된다. 총 일곱 가지 격조사 가운데 문맥상 가능성을 지닌 경우는 도구격과 소유격이다. ① 도구격을 적용하면 '보시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 되니 보시를 뗏목 삼아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이며, ② 소유격을 적용하면 '보시의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 되니 보시라고 일컫는 피안으로 온전히 건너가는 것이란 의미이므로 흔히 일컫는 '보시의 완성'에 해당한다. (…중략…) 만약 위격(爲格)을 적용한다면 '보시를 위해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 되니, 보시를 행하기 위해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피안은 보시를 행하기에 아주 좋은 보시정토(布施淨土) 같은 곳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중국에 정착된 사상의 개념은 앞서 산스끄리뜨 원전을 통해 살펴본 원래의 개념과 제법 차이를 보인다. 이는 사상의 개념이 잘못된 내용으로 전달되었다거나 후대의 주석가들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였다기보단 달마의 가르침이 중국 특유의 조사선불교로 정착하였듯이, 그것을 자신들에게 필요한 내용으로 각색하여 이해하고 신행이나 수행에 접목시킨 것이라 보인다. 아무래도 인도인에 비해 해탈의 개념이 피상적으로밖에 와닿지 않음은 물론, 아뜨만을 고유불변의 실체로 여기고 말고와 관련된 흔적을 자국 문화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중국으로선 굳이 그 개념을 도입해서 자국 문화에 심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좋다는 것도 아니요, 결국엔 흔적도 없이 없애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임에랴. 그러다 보니 아상류(我相類)에 속하는 모든 상은 원래의 개념, 즉 무엇은 어느 외도 집단에서 혹은 내부의 특정 부파에서 고정불변의 실체로 산정하였다는 등의 내용은 아뜨만과 더불어 간과되고 새로운 내용으로 풀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생상의 중생(sattva)이라는 개념 또한 인도의 원죄론(原罪論)과 중국의 군집론(群集論)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메꿔지기 어려운 까닭에 중국에선 달리 해석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 내용이 우리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니, 그래선지 ‘아상이란 '나입네' 하는 생각이고, 인상이란 '나는 사람입네' 하는 생각이며, 중생상이란 사람인 우리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고, 수자상이란 우리는 모두 고귀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라는 내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