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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77151970
· 쪽수 : 352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 역사와 벗하기를 기대하며
1장 선사 문화와 고대 국가의 발전
01. ‘사람’ 중심의 고대사 복원을 위하여
역사 상식 바로잡기 | 청동기 시대에는 청동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02. 고대사 최대 쟁점, 단군 신화 바로보기
역사 상식 바로잡기 | 단군은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
03. 대륙의 중심은 우리다, 고대 국가의 각축
역사 상식 바로잡기 |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주몽이다?
04. 잊혀진 해상 세력의 맹주, 가야
05. 중원 정벌의 두 주역,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역사 상식 바로잡기 | 삼족오는 고구려의 상징이다?
06. 칠지도는 하사품이었다, 베일 벗은 고대 한일 관계
07. 동북아 강국의 대격돌, 고구려와 수.당 전쟁
역사 상식 바로잡기 | 高句麗는 ‘고구려’라고 읽는다?
2장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01. 삼국 통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 상식 바로잡기|의자왕은 3천 궁녀를 거느렸다?
02. 발해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
03. 신라 붕괴를 부른 귀족들의 권력 다툼
역사 상식 바로잡기|진성여왕은 음란했다?
04. 후삼국의 영웅, 견훤과 궁예 그리고 왕건
3장 고려, 통일 국가의 탄생과 성장
01. 왕권 회복을 위한 두 군주의 선택, 왕건과 광종
역사 상식 바로잡기_고려는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02. 고려와 요, 역사를 두고 맞붙다
03. 무신 정권 100년, 억압과 하극상의 시대
역사 상식 바로잡기 | 격구는 전통 놀이다?
04. 대몽 항쟁 30년, 난세의 영웅은 이름 없는 백성이었다
4장 조선, 유교 국가의 성립과 발전
01. 역성혁명으로 새 나라를 열다
02. 조선의 태평성대를 열다, 세종 시대
역사 상식 바로잡기 | 황희정승은 청백리였다?
03. 정쟁의 기폭제, 훈구와 사림의 대결
역사 상식 바로잡기 | 4대까지 제사 지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오랜 전통이다?
04. 바다에서 건져 올린 승리, 조일 전쟁
역사 상식 바로잡기 | 원균은 비겁한 장수이자 간신이었다?
05. 피할 수 있었던 치욕, 조선과 청의 전쟁
역사 상식 바로잡기 | 나선 정벌은 조선이 러시아를 정벌한 사건이다?
06. 왕의 나라 VS 신하의 나라, 정쟁의 소용돌이
역사 상식 바로잡기 | 사도 세자는 정신병자였다?
07. 개항과 쇄국의 기로, 대원군의 선택
역사 상식 바로잡기 | ‘대명천지’는 ‘밝고 환한 세상’이라는 뜻이다?
5장 근대를 향한 발걸음
01. 부강하고 싶거든 개화하라, 19세기 개화 운동
역사 상식 바로잡기 | 명성황후는 뛰어난 정치가였다?
02. 민중의 횃불, 봉건 조선의 심장을 노리다
03. 조선의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역사 상식 바로잡기 | 고종은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했다?
04. 동조론에서 일체론까지, 일제의 조선 말살 프로젝트
역사 상식 바로잡기 | 친일파들은 모두 창씨개명에 앞장섰다?
05. 한반도를 뒤덮은 태극 물결, 3.1 운동
역사 상식 바로잡기 | ‘남대문’이란 이름은 일제의 잔재다?
06. 좌 . 우 대립을 넘어, 신간회의 결성과 해소
07. 짧은 해방 긴 대립, 분단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역사 상식 바로잡기 | 신탁 통치는 소련이 먼저 제의했다?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고구려가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일반적인 역사책에는 물론 교과서에도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장수왕 때 평양 천도 이후 국호를 바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고구려가 국호를 ‘고려’로 바꾼 것은 고구려인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장수왕의 남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중원고구려비에는 ‘고려 태왕’이란 글자가 있고, 6세기 불상인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에도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분명히 쓰고 있다. 후삼국 시대 왕건이 ‘고려’라고 한 것은 고구려에서 ‘구’자를 뺀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고구려의 나라 이름인 ‘고려’를 그대로 쓴 것이다.
----p.61 중원 정벌의 두 주역, 광개토왕과 장수왕
무신 정변은 우리 역사 속에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정상적인 절차가 아닌 군사력을 이용한 권력 장악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더구나 개혁을 통한 민생 안정보다 자신의 권력 유지와 사리사욕을 탐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우스운 것은 같은 방법으로, 즉 군사력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한 지난 군사 정권 시기에는 무신 정권에 대해 몽골에 대항한 투쟁 의지만을 내세워 매우 높은 평가를 했다는 것이다. 역사 해석이 정치적인 입김에 따라 이루어진 바르지 못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p.168 무신 정권 100년, 억압과 하극상의 시대
이 시기 시각 측정을 얼마나 중요시했으며 또 얼마나 정확했는지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세종 때 일식이 있었다. 그런데 천문학자가 계산한 시각보다 1각, 즉 지금의 시간으로 약 15분 늦게 일식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잘 맞춘 것 같지만 이로 인해 이 천문학자는 곤장을 맞았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말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그저 식사 때 정도나 구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때도 대단히 정확한 시각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p.207 조선의 태평성대를 열다, 세종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