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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9544473
· 쪽수 : 174쪽
· 출판일 : 2010-06-18
책 소개
목차
제1부 놓쳐버린 추억 / 9
제2부 1·4후퇴 / 55
제3부 새로운 세상 / 115
제4부 끝맺음 / 169
저자소개
책속에서
기총소사 소리가 귀를 찢는 순간, 우리는 길옆 도랑으로 후닥닥 뛰어들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그 곳에 어떻게 뛰어갔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저 머리를 틀어박고 있었다. 총소리가 잦아들었다. 전투기들이 돌아갔나 보다 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순간, 무스탕전투기 한 대가 바로 내 눈앞에서 신작로를 따라 낮게 날아오면서 기관총을 쏴 대기 시작했다. 총알이 땅에 부딪히면서 땅에 쌓인 눈이 가루처럼 포르르 일어났다. 멀리서부터 그 눈가루가 팍팍팍 내 쪽으로 가까이 왔다. 그러고는 휙 지나가 버렸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기의 공습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다른 날보다 폭격이 심했다. 한 편대의 전투기 네 대가 교대로 오르락내리락하며 퍼붓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은 우리도 죽는구나.’
아버지도 나처럼 생각한 듯했다. 아버지는 지고 있던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펼쳤다. 그건 태극기였다. 아버지는 태극기를 하늘에서 잘 보이도록 배낭 위에 펼치더니 내 손목을 꽉 잡고 길로 냅다 뛰어 나갔다. 나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하지만 아버지의 힘에 끌려 길 위로 나가고 말았다.
“뒤돌아보지 말아라!”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었다. 나는 끌려가면서도 뒤를 돌아보았다. 전투기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두려웠던 것이다.
그 때 전투기 한 대가 우리 바로 뒤에서 우리를 목표로 해 급강하하고 있었다. 전투기 모양이 일직선이라는 것은 전투기의 총구가 우리를 겨냥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종사가 나를 조준하고 있다는 느낌이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그 순간은 너무나 길고 무서운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 손목을 꽉 쥔 채 꿋꿋하게 앞만 보고 걸었다. 전투기 조종사가 아버지 등에 있는 태극기를 본 건지, 아니면 총알이 없었던 것인지 모른지만, 아무튼 전투기는 우리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그냥 앞으로 지나가 버렸다. 뒤따르던 다른 전투기들도 먼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나와 아버지는 살았다는 희열을 느끼며 신작로를 단 둘이서 걸었다. 신작로가 갑자기 넓게 느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넋이 거의 나간 상태로 걸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죽고 아버지와 나, 딱 두 사람만 살아남은 것 같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길 양쪽에 흩어져있는 시체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총을 맞지 않은 사람들이 일어나 우리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날의 공습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아버지가 한없이 훌륭하게 보였다. 언제 태극기를 짐 속에 넣고 그 위험한 피난길을 떠났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