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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79736052
· 쪽수 : 216쪽
· 출판일 : 2023-07-1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기억의 방식
빨간 눈표
서술어 사전, 펠롱
오이 꼭다리 쓴맛, 호박잎 된장국
포수와 식탁
곱은달 이행기
작품 해설_이원화/상처의 치유와 밥의 미학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오이 꼭다리 쓴맛, 호박잎 된장국
나는 다만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일은 몸의 통증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내 몸의 통증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그날 이후 일어난 일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몸, 특히 내 위장은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챌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날숨과 들숨을 크게 내쉴 때면 ‘꾸르르’ 소리를 내고, 빼빼한 몸매에 볼록하니 나온 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스를 만들어 밖으로 배출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그날부터 기습적으로 나타난 통증은 이전의 그 익숙한 통증과는 달랐다. 추웠다. 아직 여름 기운이 남아있는 선선한 초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추위로 통증은 시작됐다. 추워서 한겨울 패딩을 입고 보일러를 켜고 돌침대의 온도를 올리고 머리카락이 한 올도 빠져나오지 않게 들어간 이불 속에서 웅크린 채 벌벌 떨 만큼 추웠다.
일요일 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자정 무렵의 텅 빈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낮에 내과를 찾지 않고 미련하게 버티다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게 된 일을 후회했다.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을 나와서 다섯 번의 신호등을 지나는 동안 어둠은 도로 양쪽의 가로등 불빛과 대치상태였다. 어둠과 밝음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대치한 팽팽한 긴장감에 온몸이 더 떨렸다. 텔레비전 뉴스로 볼 때,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우주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응급실의 그들은 마치 비밀작전이라도 수행하고 있는 듯 엄숙하고 조용하고 날렵하게 움직였다. 남편과 내가 입구에서 손 소독을 하고 두리번거리자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 중에 한 명이 다가와 체온을 쟀다. 체온을 재는 그의 의심스런 눈빛을 향해 말했다. 열은 없어요, 너무 추워서 왔어요, 마스크 쓴 그의 눈을 보며 의심을 짐작해 말했다.
정상체온이 지구 곳곳의 출입문을 통과하는 필수 조건인 때인 만큼 흰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체온을 재는 동안 자칫하면 음압병실에 갈 수도 있다는 긴박감으로 가슴 두근거림 증상이 심해졌다. 흰 방호복을 입은 남자는 37도를 조금 웃도는 체온을 확인하고서야 응급실 입구에서 다음 칸으로 가는 문으로 안내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타난 좁은 통로 벽에 바짝 붙은 길쭉한 작은 테이블에는 간단한 신상정보를 쓰는 출입명부가 놓여있었다. A4 용지 몇 장이 접혀서 뒤로 젖혀진 서류철의 빈칸에 이름과 주소, 연락처와 체온을 적은 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통로보다 조금 더 큰 공간은 흰 방호복과 흰 의사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흰 가운을 입은, 흰 방호복이 아니라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응급실을 찾은 이유를 물었다. “옷을 여러 겹 껴입어도 추워요.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울릴 정도로 크게 들리고요.”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빠트린 내용이 없는지, 내 증상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낱말이 무언지 생각했다. 상대방의 감정변화와 의도를 마스크로 가린 얼굴의 두 눈만으로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이곳에서 해줄 있는 게 없습니다. 목 시티를 찍어볼 수는 있지만, 어차피 결과는 내일 진료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학병원인데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말에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입원이라도 하면 안 될까요?” 그날 밤을 집에서 보내는 것이 무서웠다.
“입원을 원하시면 2차 진료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도 우리도 잠시 말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차라리 극심한 통증이라면 치료에 접근하는 방법이 훨씬 쉽지 않을까? 해열제가 필요할 정도로 고열도 아니면서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떨쳐버릴 수 없는 추위가 가져오는 불안과 공포가 응급실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당직의 말대로 차라리 준종합병원으로 가서 입원이라도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염병은 흩어졌던 가족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먼저 큰아들이 기숙사가 폐쇄될 때까지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들은 밤늦게 자고 오전 온라인 강의가 있는 날은 한낮이 되어야 자기 방에서 나왔다. 나는 큰아들에게 내 몸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하지 않았고, 큰아들은 엄마가 밤마다 잠을 못 자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걸 알지 못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다녀온 그 밤에, 큰아들이 자신의 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어디 갔다 오시는 거예요?”
“대학병원 응급실.”
“왜요?”
“어… 너무 추워서.”
“좀 괜찮으세요?”
“응급실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해서 그냥 돌아왔어.”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가 두 분이 안 계셔서 놀랐어요.”
큰아들은 방으로 들어가야 할지 그대로 서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뜬눈으로 밤샘을 하고 다음 날 나는 다니던 내과 의사 앞에 앉아 제발 살려달라고 말했다. 의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봤다. 그는 꽤 소문난 의사다. 포털로 검색하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내과로서는 늘 상위권에 있고, 댓글의 반응도 좋았다. 얼굴이 통통한 남자 의사의 안경 안쪽 두 눈알이 금방 눈꺼풀 아래로 덮여버렸다. “살려달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의사의 눈에는 어쩌면 내가 제정신이 아닌 여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그녀가 떠났고, 그녀의 부고를 듣고 난 뒤 추워 떨며 잠을 한숨도 못 잔다고 말했다. 침대마다 커튼이 쳐진 수액실에서 링거를 맞고 수면제를 받아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여전히 추웠다. 반팔 티셔츠를 입고 지나치는 사람들 속에서 칙칙한 겨울 패딩점퍼를 입고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걷고 있는 내 모습은 마치 서로 엇갈린 두 세계의 한 편에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