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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윤선도, 정철, 박인로 (지은이), 김하명 (옮긴이)
보리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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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 분류 : 국내도서 > 고전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88984282230
· 쪽수 : 521쪽
· 출판일 : 2005-11-15

책 소개

정철, 박인로, 윤선도가 쓴 시들 가운데 우리말로 쓴 가사와 시조 작품들을 싣고, 널리 알려진 한시도 골라 함께 엮었다. 가사는 어려운 한자말과 고어를 요즘 쓰는 말들로 고쳐 놓았으며, 시조는 표기법을 고치고 주석을 달아 내용과 가락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했고, 한시는 읽기 편안한 입말로 국역했다.

목차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정철
강호에 병이 깊어
관동별곡 / 사미인곡 / 속미인곡 / 성산별곡 / 장진주사

다만당 님 그린 탓으로
밤비 뿌려 대숲 설레고

박인로
뱃전에서 탄식하노라
태평사 / 사제곡 / 누항사 / 선상탄 / 독랑당 / 영남가 / 노계가

천지간 만물 중에 가장 귀한 이
이름 없는 낚시꾼 되어

윤선도
어부의 사철 노래
어바사시사

다툴이 없는 강산을 지키라 하시도다

평론과 자료들

저자소개

윤선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시조 작가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字)는 약이(約而)이며, 호(號)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이다. 1612년 26세의 나이로 진사(進仕)에 급제했고,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1616년 당시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병진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 유배지에서 <견회요>와 <우후요> 등의 시조를 창작했다. 1618년 유배지가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졌다가, 인조반정(1623) 직후 대사면령이 내려 유배에서 풀려 전라도 해남으로 돌아갔다. 남인(南人)에 속했던 윤선도는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유배를 떠나는 등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42세(1628)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해, 당시 이조판서이던 장유(張維)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47세 때인 1633년에 다시 증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에서 생활하던 무렵,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자 향족(鄕族)과 집안의 노복(奴僕)들을 이끌고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 인근에서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이미 적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던 중, 태풍을 피해 잠시 머물던 곳이 바로 보길도였다. 이후 윤선도는 자연 풍광이 수려한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다. 52세 때인 1638년에는 병자호란 당시 서울을 지척에 두고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不奔問)’는 혐의로 탄핵을 받고,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게 된다. 이후 해남에 돌아와 집안의 대소사를 차남에게 맡겼으며, 1640년부터 해남의 금쇄동에 거처를 마련해 은거했다. 이후 10여 년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보길도와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나이 56세 때인 1642년에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연작 18수의 시조 작품을 창작했으며, 2년 후에는 <산중속신곡> 2수와 <증반금> 등의 시조를 짓기도 했다. 윤선도가 63세 되던 1649년 인조(仁祖)가 승하하고, 세자로 있던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즉위했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시절 사부를 지낸 바 있었기에, 이해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요체를 논한 <기축소(己丑疏)>를 올렸다. 1651년에는 자신이 거처하던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다. 66세가 되던 1652년에는 왕의 특명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이때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있는 별장에 머물면서 <몽천요> 3수를 창작했다. 하지만 이내 효종에 의해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조정에 나아갔고, 당시 권신인 원두표(元斗杓)의 비리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당해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7년(71세)에는 조정에 불려 갔다가 다시 관직에 제수되었고,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해 왕릉을 정하는 산릉의 간심(看審)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인을 대표한 논객으로 예송(禮訟)에 참여했다가 패배해, 당시 권력을 장악한 서인들에 의해 1650년 함경도 삼수에 유배되었다. 1665년(79세)에는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백운산 아래의 옥룡동에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2년 후인 1667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에 있는 거처 낙서재(樂書齋)에서 운명해, 해남의 금쇄동에 묻혔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윤선도의 삶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부로 있었던 봉림대군이 후에 효종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생애의 절반 이상을 관직보다는 유배지 은거지에서 지내야만 했으며, 반대 당파의 비방에 결연하게 맞서며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사(經史)에 해박했으며, 의약과 복서 및 지리 등에도 널리 통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6권 6책)가 있다. <어부사시사>·<오우가> 등 75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작품들로 인해 ‘자연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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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웠으며,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같은 유학자들과 교유했다. 26세에 진사시에 1등으로,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사헌부지평을 거쳐 좌랑·현감·전적·도사를 지내고,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고, 이어 함경도암행어사가 되었다. 32세에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40세에 낙향했다. 43세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해 출사했다. 이후 사간·집의·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했다. 45세 되던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관동별곡(關東別曲)〉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가사와 시조 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48세에 예조판서로 승진해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역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에 사직하고 고향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했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의 가사와 수많은 시조·한시 등을 창작했다. 54세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가 되어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을 배제하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1591년 건저 문제(建儲問題)로 진주로 유배,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부름을 받아 의주까지 호종했으며,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충청·전라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지내고, 다음 해 명나라에 사은(謝恩) 행차를 다녀왔다. 이 사은사 행차가 빌미가 돼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寓居)하다 이듬해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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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박인로(1561~1642)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이 되어 전쟁터에서 싸웠다. 전쟁터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태평사, '선상탄'을 썼다. 무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서 '누항사'와 '밭갈이 노래', '가난의 노래'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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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명 (옮긴이)    정보 더보기
192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북의 국문학자로, 서울 대학교 사범 대학을 다니던 중 월북하여 1948년 김일성 종합 대학을 졸업했다. 북한의 초창기 국문학 연구에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1982년부터는 사회과학원 주체문학연구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조선문화사 15~19세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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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솔뿌리 베고 누워 풋잠이 얼핏 드니
꿈에 한 사람이 날더러 하는 말이
"그대를 내 모르랴 하늘의 신선이라.
황정경 글 한 자를 어찌하여 잘못 읽고
인간 세상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는가.
잠깐만 가지 마오 이 술 한잔 먹어 보오."
북두칠성 기울여 창해 물을 부어서
저 먹고 날 먹이며 서너 잔 마시니
봄바람이 솔솔 불어 두 겨드랑이 추켜드네.
구만리 장천에 좀 더하면 날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온 세상에 고루 나눠
억만 백성이 다 취케 만든 후에
그때야 다시 만나 또 한잔 하자꾸나."
말 마치자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니
공중 옥저 소리 어제런가 그제런가
나도 잠을 깨어 바다를 굼어보니
깊이를 모르거나 가인들 어찌 알리.
명월이 온 세상에 아니 비친 데 없다. - 본문 30쪽,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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