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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앞에 설 때

그분 앞에 설 때

정용치 (지은이)
  |  
KMC(기독교대한감리회)
2010-06-24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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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앞에 설 때

책 정보

· 제목 : 그분 앞에 설 때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 ISBN : 9788984304833
· 쪽수 : 240쪽

책 소개

감리교회 월간지 <기독교세계> '말씀의 창가'에 2년간 연재해 독자들에게 영성의 큰 울림을 주었던 감리교 연수원장 정용치 목사의 글을 책으로 펴냈다. 제1부 한국교회를 향한 외침, 제2부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신앙, 제3부 영성을 찾아가는 길, 제4부 나의 삶, 나의 교회 등 총 4부로 구성하였다.

목차

이해할 수 없지만 신뢰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10
욕망과 행복 20
거짓된 확신 30
복 있는 사람 39
소박한 삶 48
어리석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 58
유일한 청중 68

눈물을 다시 찾는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진리의 보루인 교회 80
큰 사람, 센 사람 89
부족하지 않은 복음인데... 99
교회를 지나치게 섬기기보다는 109
메시아가 있는 교회 119
잃은 것을 찾아야 할 기독교 128
예수와 그리스도 138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 148
눈물이 있는 곳에 157

영성회복,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영성을 회복하면 168
설교가 듣고 싶어서 176
목회가 힘듭니까? 186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196
가장 큰 죄 205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희망을 봅니다 215

나의 삶, 나의 교회

목회자로 부름받아 살아온 삶 226

저자소개

정용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42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 경남 진주에서 성장,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0년에 감리교신학대학을 입학하였다. 1968년부터 강화 동막교회, 인천 선린교회, 서울 진관교회를 섬기다가 1984년 미주지역 선교 동역자로 파송되어 미국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 한인 감리교회를 개척 시무한 후, LA 지역에서 글렌데일 연합감리교회(현재 드림교회), 밴나이스 연합감리교회를 섬기면서 19년 동안 이민교회 목회를 하였다. 2003년 말 귀국하여 감리교 본부 연수원장으로 사역하면서 2005년부터는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제자국으로부터 <엠마오 가는 길>(Walk to Emmaus) 영성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현재 한국 엠마오 공동체 대표로 있다. 미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아주사(Azusa Pacific) 신학대학(M. Div)과 훌러(Fuller) 신학대학(D. Min)에서 수학하였다. 엠마오 공동체를 통해 훈련을 받은 이들의 소감을 모아 <나의 눈물 주의 병에 담으소서>(영혼의 약국)를 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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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가정예배서 「하늘양식」으로 기도회를 합니다. 인도자가 말씀을 읽고 묵상한 후, 그날의 메시지에 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집니다. 어느 날 아침,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한 후 ‘주님이 당신의 삶 속에 언제 동행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다양한 대답들이 나왔습니다. 교통사고에서 건져 주셨을 때나 군 복무 중 위험한 순간에 건짐을 받았다는 등,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거나 죽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은 것입니까?” 이 돌발적인 질문에 얼마간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대답을 주어야 할 책임을 느꼈지만,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 역시 제 삶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수차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40여 년 전 목회 초임지 교회 앞마당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다가 터진 포탄의 그 파편이 제 오른쪽 눈에 박혀 실명했습니다. 상처 난 동공을 적출하고 병원에 누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불행을 주십니까?’ 하며 한동안 주체할 수 없는 원망과 불만을 토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30여 년 전에는 교회를 건축하다가 완공 단계에 있는 교회 건물이 철거를 당하는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있었을 때도 역시 ‘왜 하나님은 가난한 성도가 피와 땀으로 바친 헌금으로 지은 당신의 교회를 이런 쓰레기 더미가 되게 하십니까?’ 하고 금식하며 원망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수년 전 제가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할 당시, 제 막내아들이 대학 4학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같은 또래 네 사람과 탄 자동차가 사고를 당해 우리 아이와 함께 목회자 아버지를 둔 또 한 청년이 세상을 등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당할 때마다 내 신앙은 인내의 한계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은 ‘저가 과연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런 시련을 당하는가?’ 하는 인과응보의 잣대로 바라보는데, 그런 시선을 견디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면 징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악인과 선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사고를 당해 탑승객 전원이 화를 경험하는 일도 있습니다. 불행은 악인의 전유물이 되지 않고 착한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닥칩니다.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사고나 위험이나 질병이나 죽음에서 전적으로 면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입니까?
가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하나님이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셨다는 말을 하는 이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나는 혼란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들은 하나님께서 죽였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악하게 사는 사람들도 건강하게 사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하필이면 이런 암(癌)을 주시는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일을 내가 했던가?’ 하고 때로는 분노에 못 이겨, 때로는 자기 연민이나 절망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나인가?(Why me?)”라는 질문은 인생의 부조리를 향한 항변입니다. 물론 우리는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지 않으며, 또 결함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공로를 따라 우리를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닭 없이 당하는 시련이라고 여겨질 때는 하나님의 공의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무고한 사람들만 불행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은 닥치는 대로 일어난다.”는 것도 현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사고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얼마 전 제가 아는 어느 교회 권사님은 새벽기도회를 가시다가 자동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후, 그 와중에 살아남은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은 상황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것은 이기적이고 수치스런 일이 아닌가?’ 하고 자책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불행 앞에서 우리는 “왜 나인가?”와 “왜 나는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행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을 모면하는 이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은 무신론자들이나 회의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도리어 믿는 자들이 훨씬 더 절박한 심정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벌거벗긴 채, 무고히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시며 거짓 고소 자들에 의해 희생양이 될 때, 제자들도 그 곁을 모두 떠나버렸을 때, 시편 22편의 첫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와 같은 절규의 목소리는 역사를 통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더욱이 신앙을 가진 수많은 성자들과 의인들의 입에서도 터져 나왔습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작가 C. S. 루이스는 그의 아내 조이 데이비더먼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 깊은 상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이는 가장 큰 불안을 느끼게 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다. 행복할 때, 즉 너무 행복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 그분을 찬양하면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그러나 다른 도움은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그분의 도움만이 절실히 필요할 때 도움을 구하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문전 박대를 당한다. 안에서 빗장을 두 번, 세 번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린 후에 긴 침묵이 이어진다. 그럴 때엔 발길을 되돌리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
이 C. S. 루이스의 진솔한 고백은 9.11 테러로 미국 뉴욕의 쌍둥이 건물이 무너질 때도, 지진과 쓰나미로 온 마을이 하루아침에 폐허로 바뀔 때도, 아우슈비츠 유대인 집단 수용소에서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도 여전히 들을 수 있었던 절규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견딜 수 없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고통이 아무리 극심해도 이유를 알면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는 그 고통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중략)
저 역시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심연에서 삶이 주춤할 때가 있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 만큼 삶에 희망이 전무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붙잡고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유대인 작가 빅토르 프랭크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아서」(Man’s Search for Ultimate Meaning)에서 그가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는 종교적인 믿음이 더욱 깊어진 이들이 많다. 물론 꼭 그런 경험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음을 가진 자들의 숫자가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의 숫자를 상회한 것은 확실하다.”고 피력했습니다. 약한 불꽃이 작은 미풍에 쉽게 꺼져 버리듯이, 약한 신앙은 악과 고통의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 곧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참 신앙은 강한 불꽃과도 같아서 폭풍우가 몰아닥치면 더욱 더 거센 불길이 되어 치솟는 원리와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검증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련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삶을 살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악과 고통을 검증된 삶을 위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시련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해지는 은혜임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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