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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88984370913
· 쪽수 : 316쪽
· 출판일 : 2009-02-12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담은 우리 시대의 희생양입니다. 정확히 말해 우리 시대에 널리 떠도는 담론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죠. 요즘은 어딜 가나 외모가 최우선이라고 떠들어대며 겉모습을 바꾸거나 꾸며주는 물건 혹은 서비스를 사라고 부추깁니다. 옷이며 액세서리며 식이요법이며 미용시술이며 화장품이며 건강보조식품이며 사치품들이며 더 좋은 자동차며 이름난 휴양지 순례며 성형수술 등등. 아담도 그 함정에 빠진 겁니다. 겉모습이라는 것에서 자신을 찾으려다 끝내 찾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그때 마침 참신하고 눈에 띄는 외모를 선사하겠다는 사기꾼을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아담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말았어요. 나는 그 시기에 아담을 만났고요.”
“왜 제우스 페테르 라마 선생을 사기꾼이라고 부르십니까?”
“달리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국가 측 레비아탕 변호사와 제우스 페테르 라마와 뒤랑뒤랑이 일제히 항의를 했다. - 282쪽 중에서
전에 장인어른은 곧잘 이렇게 말씀하셨다. “명성이라는 건 말일세, 죽은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거라네. 살아 있는 사람에겐 빌려 입은 옷처럼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그분은 거추장스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내내 가난했고 몇몇 사람들에게만 뛰어난 예술가로 존경받았으며 오직 자식 내외의 사랑과 믿음 말고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었으니까. 내가 장인어른을 세상에 알리는 데 한몫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겠지. 하지만 오랜 세월 내가 장인어른에 대한 글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고 각종 강연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그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때마다 장인어른은 폭소를 터뜨렸다.
“자넨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 같아.”
“그 누구도 지나치게 사랑할 순 없어요.” - 305~306쪽 중에서
“스물네 시간만 기다려주시오!”
멋지고 우렁찬 남자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렇소, 스물네 시간이오. 그 이상은 한 시간도 더 기다려달라고 하지 않겠소. 그 정도면 충분할 테니까.”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흰옷을 입은 남자가 접이식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상아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에 손을 얹은 채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물건을 감상하듯이.
“물론 상상력을 발휘해야겠지만 그거야 뭐…… 안 그렇소……흐흐…… 흐흐…….”
남자는 마른기침 같은 웃음을 딸꾹질처럼 뱉어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서슬에 가늘게 손질한 콧수염 아래 이가 드러나더니 어느 순간, 무지갯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뭔가 싶어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의 이라는 이에는 모조리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내가 이 미터 앞까지 다가가자 남자는 보석들을 도둑맞기라도 할까봐 겁이 나는지 웃음을 멈췄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자살하려다 만 거지? 저 남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나는 남자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말 걸지 말아요. 자살하려는 중이니까.”
“암, 그러시겠지……. 알고 있었소. 그 자살, 스물네 시간만 미뤄주실 수 없겠소?” - 11쪽 중에서
“괜히 에둘러가진 않겠소. 나는 천재요. 그걸 모른다면 천재라고 할 수도 없겠지. 열다섯 살 때 검정 비누에 그린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후 스무 살엔 빨대 조각품으로, 스물두 살엔 다뉴브 강 염색으로 명성을 확고히 한 다음 스물다섯 살엔 파리잡이용 종이로 자유의 여신상을 포장했다오. 서른 살 때 첫 번째 ‘꿀 흉상 시리즈’를 완성한 후로 나는 계속 탄탄대로를 달려왔소……. 난 말이오, 젊은 친구, 싸구려 스파게티나 광우병 걸린 소고기 따위로 끼니를 때워본 적이 없소. 늘 비단방석 위에서 굴러다녔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각광받는 예술가니까. 뭐 가끔 형씨 같은 얼간이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면 어떻소, 내가 손 한 번 움쩍하면, 낙서 한 번 찍 하면 선생들이 한평생 모아도 못 모을 엄청난 돈이 들어오는걸. 정말이지 나는 배불러 죽을 만큼 부자요. 뭐 그렇다고 배불러 죽지는 않겠지만 말이오. 요컨대, 그러니까 몇 마디로 간단히 줄이자면 나는 천재성과 그에 합당한 명예와 돈, 그리고 잘생긴 얼굴을 다 갖추고 있다는 얘기요. 짜증나지 않소, 응?”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바싹 다가서더니 콧수염 아래 ‘보석 진열창’을 슬쩍 드러내 보였다.
“게다가 나는 침대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는 정력가라오.”
나는 인정하고 항복했다.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나가는데 반박할 도리가 없잖은가. - 30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