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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북유럽소설
· ISBN : 9788984371187
· 쪽수 : 456쪽
· 출판일 : 2012-10-12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는 지폐 뭉치가 담긴 상자를 들고 창구로 돌아와 돈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는 잠시 지폐들을 들여다보았다. 리스벳이 곧 발랄한 동작으로 들어와 활기찬 이야기를 늘어놓으리라. 그다음은 무뚝뚝한 알베르트가 뻣뻣한 목례를 하며 들어서리라. 마지막에는 늘 근심스런 표정을 짓는 미아가 늘어뜨린 앞머리 밑으로 눈을 흘끔거리며 들어서리라. 리스벳이 창문을 열어 텁텁한 실내공기를 밖으로 몰아내고 나서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내리면 은은한 커피향이 사무실을 가득 채우리라. 그다음에는 일을 보러 온 고객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리라. 낡은 수표책과 씨름하는 농부, 출금액을 꼼꼼하게 수첩에 기록하는 주부, 고양이 사료를 먹고 살아야만 하는 처지를 벗어나려고 전전긍긍하는 연금수급자 등등.
도시 규모가 점차 축소되면서 은행의 영업이익은 나날이 감소했다.
그는 501게임을 하려고 칸막이를 돌아갔다. 20점 트리플 두어 번과 싱글 불 몇 번으로 점수가 확 줄어들었다. 그가 던진 다트는 평소처럼 의도한 지점으로 날아갔다. 그의 다트는 날아가면서 흔들리는 게 특징이었고, 매번 표적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87점을 남겨두고 있을 때 알람시계가 울렸다.
9시 30분.
그는 은행 문으로 걸어가 자물쇠를 열었다.
모든 게 평소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스웨덴사회에서 중년남자의 기준이 되는 요소에는 뭐가 있더라?’
옐름은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를 꺼내며 그런 생각에 잠겼다.
먼저 정규직 직장이 있어야 하고, 백인이어야 하겠지. 피부색이나 외모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겠지. 말투 역시 중요한 변별 요인일 거야.
동성애자가 아니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와 ‘분명’ 다른 존재다. 동성애자나 젊은 남자는 이성애자나 중년남자와 구별된다. 그런 것들이 스웨덴사회의 겉모습이었다. 경계선 안쪽에 이성애자와 중년의 백인이 있고, 경계선 바깥쪽에 동성애자와 유색 인종이 존재한다.
옐름은 소파에 앉아 있는 가족들을 쳐다보았다.
실라의 나이가 몇 살이더라?
거실 소파에는 서른여섯 살인 실라와 열두 살짜리 딸 토바가 앉아 있었고, 다른 방에서는 퍼블릭 에너미의 힙합음악이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옐름은 짙은 어둠 속에서 소변을 보느라 오래도록 서 있었다. 늦은 밤에 맥주를 다섯 병이나 마셨으므로 잠들기 전에 어차피 한 번은 용변을 봐야 했다. 변기에서 지린내가 풍기며 화장실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화장실에서 빛은 겨우 형체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만 존재했다. 30초 전, 화장실 안이 심하게 어두웠을 때만 해도 주변은 온통 암흑처럼 캄캄해 마치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소변을 털어내고 주변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면서 비로소 어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옐름은 변기의 물을 내리고 다시 어둠을 에워싸고 있는 희미한 빛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모습만 비추었던 어둠 속에서 ‘당신의 마음을 한 번 깊숙이 들여다봐요, 옐름.’이라고 말하는 그룬드스트룀을 보았다. 이어서 모르텐손이 ‘아직은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옐름.’이라고 말했고, 에른스트손이‘기다려.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하지 마.’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그때 빛의 경계에서 아들 단네가 공포에 사로잡힌 사춘기 소년의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프라쿨라가 나타나 ‘모두가 내 가족들을 위한 거요.’라고 말했다.
‘당신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봐요, 옐름.’
너무나 허망하고, 끔찍이도 공허했다.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다음 순서는 정직, 해고, 실업수당 수령이 될지도 모른다. 실업수당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생이 보이는 듯했다.
경찰에서 쫓겨난 형사를 어느 누가 고용할까?
옐름은 복지혜택을 받고 사는 사람들, 공공의 지원을 받아 살아가는 하층민을 마냥 호의적으로 볼 수 없었다. 이제 그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발밑을 지탱하고 있던 바닥이 사라졌다. 그는 무시무시한 허공을 떠도는 존재가 되었다.
‘상관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모두들 나를 버린 것인가?’
화장실 구석구석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밤으로부터 빛이 끌려나왔다. 그의 눈이 빛을 끌어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
‘당신의 마음을 한 번 깊숙이 들여다봐요, 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