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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액션/스릴러소설 > 외국 액션/스릴러소설
· ISBN : 9788984375277
· 쪽수 : 420쪽
· 출판일 : 2026-07-21
리뷰
책속에서

반년 전, 내 전임자 큉글리는 정확히 이 자리, 내가 근무하는 <코블 앤 로이>의 25층 건물 부사장실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큉글리는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창문 틈새로 몸을 구겨 넣어보려 했는데 연락받고 급히 달려온 보안요원에게 제지당해 결국 그의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요즘 그는 뉴욕 북부에 있는 요양원에서 데이지를 뽑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충격요법을 받으면서 지내고 있다.
큉글리가 앉아있던 부사장 자리는 내 차지가 되었다. 내가 <코블 앤 로이>에 입사한 순간부터 목표로 정했던 자리다. 이 회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요직이니까. 큉글리가 자살 소동을 벌이고 떠난 이후 이 자리를 차지하려는 각축전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내가 최종 승자로 결정되었다.
내가 일하는 부사장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자면 경이로울 따름이다. 내 사무실 갈색 가죽 의자는 내 척추 곡선에 완벽하게 맞도록 맞춤 제작되었다. 의자 하나 가격이 내가 처음 샀던 차보다 비싸다. 사무실 중앙에 자리 잡은 내 책상은 페루산 떡갈나무로 만든 책장과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건 내 책상에 놓인 황금빛 명패다.
부사장 블레이크 포터
나는 창밖으로 눈을 돌려 마천루가 솟아 있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본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보기 싫을 정도로 자주 보게 되었다. 25층 빌딩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들처럼 보이고,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은 어릴 때 엄마가 동네 벼룩시장에서 용케 찾아내 사주었던 장난감 자동차처럼 작아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런 호사를 누리면서도 투신자살을 시도한 큉글리는 정말이지 한심한 사람이다. 그는 부사장이라는 직책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숨을 던지려고 했지만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어퍼웨스트사이드의 가로수 거리에 있는 브라운스톤 2층 방, 즉시 입주 가능. 가구 완비, 커다란 창 두 개, 수납공간 충분. 주방, 식탁, 거실 공동 사용. 근처에 지하철역 있고, 반려동물 키울 수 없음, 주차 공간 없음
앞으로 한 시간 이내에 두 사람이 방을 보러오기로 했다. 크리스타가 부동산중개소에 방을 내놓고 나서 지금까지 방을 보러 온 사람은 열 명 남짓인데 다들 하나같이 상태가 끔찍했다. 자칭 킥복싱을 배웠다고 한 사람은 자기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답시고 벽을 발로 차 구멍을 냈다. 어떤 여자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본 개 가운데 가장 포악하게 생긴 맹견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는 온순한 개라고 주장했지만 내 눈에는 늑대나 사냥개의 일종으로 보였다.
이틀 전 방을 보러 온 남자야말로 최악이었다. 리눅스 로고가 있는 하얀 모자를 쓰고 턱에 염소수염을 기른 자그마한 남자로 장장 20분 동안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사양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내가 아무리 시답잖은 질문을 해도 꼬박꼬박 대답해주었는데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등에 메고 있는 배낭에서 드릴을 꺼냈다. 인터넷 배선을 확인하려면 드릴로 벽에 구멍을 뚫어 봐야 한다면서. 나는 그를 제지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브라운스톤 벽에 구멍을 뚫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5분 후에는 엘리자베스, 30분 후에는 휘트니라는 여자가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 집을 보러온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온통 진이 빠진 나는 두 여자 역시 앞서 방문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내 짐작이 틀리길 바라면서 우리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청소를 말끔히 했다. 그들이 혹시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볼지도 몰라 냉장고 내부도 깨끗이 닦았다.
크리스타가 갓 구운 초콜릿 칩 쿠키 한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는다. 내가 얼른 쿠키를 먹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그녀가 내 손등을 찰싹 때린다. “손님들 주려고 만든 거야.”
“고작 두 사람이 방문하는데 쿠키가 스무 개나 필요해?”
크리스타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얼른 손을 거둔다. 그녀가 나를 자세히 훑어보며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이 자리에 잘 어울리는지 점검한다. 집에서 지낼 때는 주로 파자마 차림인데 지금은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심지어 실업자 인상을 풍기지 않으려고 면도도 말끔히 했다.
“이 정도면 괜찮지?”
크리스타가 입을 삐죽거린다. “아마도.”
내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한다. “당신 티셔츠에 밀가루가 묻었는데, 괜찮겠어?”
크리스타가 고개를 숙이더니 밤색 탱크톱에 덕지덕지 묻은 밀가루를 내려다보며 화들짝 놀란다. 손바닥으로 밀가루를 털어보지만 여기저기에 하얀 자국이 더 생겨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