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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영미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84375093
· 쪽수 : 528쪽
· 출판일 : 2025-07-22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의료기기들이 바닥에 널려 있다. 녹슨 외과수술 도구, 깨진 병, 유리 용기, 등받이에 긁힌 자국이 수두룩한 휠체어, 표면에 누런 얼룩이 담즙처럼 묻은 매트리스가 벽에 구부정하게 기대 세워져 있다.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든 다니엘 르메트르는 혐오감이 솟는다. 건물의 영혼을 집어삼킨 시간이 그 자리에 썩고 병든 잔해만 남기고 사라진 것 같다. 다니엘이 발걸음을 재촉해 복도를 걷는 동안 타일 바닥을 때리는 발자국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문만 보고 걸어. 뒤돌아보지 말고.
바닥에 나뒹구는 의료기기들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며 저마다 억울한 사연을 토로한다. 가슴을 부여잡고 터질 듯 기침하는 환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문득 지난날 이 건물에 질펀했던 냄새, 수술 병동 공기 중에 떠돌던 메케한 화학약품 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는 느낌이다.
다니엘은 복도를 반쯤 걷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도록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주위가 온통 어두워 흐릿하게 형체가 왜곡되어 보이긴 했어도 맞은편 방에서 분명 뭔가 움직였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방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 산소호흡기의 비틀린 관들, 구속 벨트가 너덜너덜하게 늘어져 있는 침대가 눈에 들어온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지만 건물 안은 깊은 정적만이 감돈다.
다니엘은 무거운 숨을 토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거야.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이다가 새벽에 일어난 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크란 몽타나의 고원지대에 문을 연 <르 소메> 호텔 재건축 공사는 스위스의 부동산 개발업자 루카스 카롱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8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요양원 건물이 럭셔리 호텔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19세기 말에 루카스 카롱의 증조부 피에르 카롱이 처음 설계해 건설했고, 항생제 개발로 용도가 변경되기 전까지 결핵 치료 요양원으로 사용되었다. 1942년에는 혁신적인 건축물로 평가받으며 스위스 건축 어워드에서 입상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크란 몽타나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통유리 창과 평평한 지붕, 기하학적인 선과 면이 어우러져 우아한 조형미를 풍기는 이 건물에 대해 어워드의 심사위원은 “내부 공간과 바깥 풍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병원 설립의 목적과 기능에 충실한 설계가 돋보입니다”라고 평했다.
루카스 카롱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건물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때가 되었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미래 비전을 바탕으로 이 유서 깊은 건물을 호텔로 재건축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습니다.”
스위스 건축설계회사 <르메트르 SA>가 중심이 되어 재건축 사업과 최첨단 스파 설립, 다목적 센터를 증축하는 팀이 꾸려졌다. <르 소메> 호텔은 현지에서 조달 가능한 목재와 석재, 점판암을 사용해 혁신적인 건물로 꾸밀 예정이다.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면 이 건물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과거의 영광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발레 투리즘>의 CEO 필리페 볼켐은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휴양 시설이 될 <르 소메> 호텔은 고객들에게 각별히 주목받는 명소가 될 겁니다.”
검은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홀로 수영하고 있다. 탄탄한 근육질 몸이 물 아래 조명을 받아 빛난다. 여자의 팔다리가 힘차게 물을 가르기 시작한다. 자유형으로 수영하는 여자의 실력이 마치 선수처럼 뛰어나다.
아이작이 인상을 찌푸린다. “세실이 수영하고 있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로라의 몸이 굳는다.
“세실?” 엘린이 호기심을 느끼며 되묻는다.
“이 호텔 지배인인 세실 카롱이야.” 그렇게 말한 로라의 말투가 퉁명스럽다. “이 호텔 대표인 루카스 카롱의 여동생인데 매일이다시피 수영을 해. 전국대회에 선수로 나간 적도 있대.”
엘린은 여자가 시원하게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며 대꾸한다. “선수 출신이라 역시 실력이 출중하네.”
로라가 주제를 바꾼다. “엘린, 아직도 수영 좋아해?”
엘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열기 탓에 붉게 달아오른다.
익숙한 감정이 그녀를 집어삼킨다. 당혹감, 공포, 좌절감.
돌아서는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샘이 죽고 나서 그들 가족이 어떻게 변했는지 아이작이 아직 로라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