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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잠언

피터 S. 럭크만 (지은이), 윤지영 (옮긴이)
말씀보존학회
35,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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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잠언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목회일반
· ISBN : 9788988795064
· 쪽수 : 784쪽
· 출판일 : 2024-02-29

책 소개

잠언에는 세상 어떤 사상가의 조언에서도 얻을 수 없는 심원하고, 고귀하고, 정직하며,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을 얻을 수 있다. 한글 개역성경은 특히 잠언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어 조언과 지침을 믿고 따를 수가 없다.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이 성경으로 증명하고 해석한 참다운 잠언 주석으로 공부하여 자신의 성숙은 물론, 이 아름다운 지식을 주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이 책을 내면서 / 7
서 문 / 9

잠언 1장 / 21
잠언 2장 / 45
잠언 3장 / 59
잠언 4장 / 86
잠언 5장 / 105
잠언 6장 / 117
잠언 7장 / 130
잠언 8장 / 141
잠언 9장 / 160
잠언 10장 / 168
잠언 11장 / 185
잠언 12장 / 205
잠언 13장 / 231
잠언 14장 / 255
잠언 15장 / 294
잠언 16장 / 339
잠언 17장 / 376
잠언 18장 / 414
잠언 19장 / 443
잠언 20장 / 478
잠언 21장 / 515
잠언 22장 / 548
잠언 23장 / 574
잠언 24장 / 594
잠언 25장 / 614
잠언 26장 / 638
잠언 27장 / 660
잠언 28장 / 680
잠언 29장 / 707
잠언 30장 / 732
잠언 31장 / 758

추 신 / 777

저자소개

피터 S. 럭크만 (지은이)    정보 더보기
피터 럭크만 박사(1921-2016)는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에 있는 성경침례교회(Bible Baptist Church)의 목사였으며, 펜사콜라 성경 신학원(Pensacola Bible Institute)의 설립자이자 원장으로서 50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럭크만 박사는 밥 존스 대학교(Bob Jones University)에서 Ph.D.를 받았지만, 그 학교의 신학 노선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저자는 존 칼빈 이래로 500여 명 이상의 유명하다는 성경 주석가들이 주석서에 범해 놓은 주요 오류들을 일일이 지적하여 바로잡았으며, 창세기, 출애굽기, 욥기, 시편, 잠언, 소선지서,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의 주석서를 저술함으로써 올바른 성경 진리를 밝히고 있다. 또한 럭크만 박사는 <킹제임스성경>이 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권위 있게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는 독보적인 학자로 일했다. 특히 그의 저서 <필사본 증거>, <알렉산드리아의 이단들>, <신약교회사>,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등에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는 주석서와 성경 교리에 관한 160여 권이 넘는 책의 저자이며, 세계 전역에 있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존경받는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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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서문

이 책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시리즈”가 다 그렇듯이) 현재 우리가 지닌 <킹제임스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이며, 어떤 오류도 섞이지 않고 보존된 말씀이라는 “주관적 편견”으로 시작된다. 다른 주석서 서문에도 언급된 것처럼 이 “편견”은 이 세대의 95%의 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이 가진 편견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중략)...

잠언에 관한 문헌은 실로 방대하다. 잠언을 공격한 첫 번째 인물은 오리겐인데, 그는 능력이 닿는 한 최대로 성경 본문을 공격했다. 바실과 비드(Basil and Bede, 672)도 주석을 썼고, 델리취(Delitzsch, 1878), 클라크(Clarke, 1878), 플럼터(Plumptre), 워즈워드(Wordsworth), 미카엘리스(Michaelis, 1720), 멜랑히톤(Melancthon), 로웬슈타인(Lowenstein, 1838), 버토우(Bertheau, 1847), 힛직(Hitzig, 1858), 조클러(Zockler, 1867), 에왈드(Ewald, 1837), 엘리콧(Ellicott, 1889) 등도 잠언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썼다. 교훈적인 면에서 이들 주석에서 얻을 만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 통찰력이나 정확한 교리적 해석, 예언적 적용, 성경 본문에 대한 믿음에 관해서는 상당히 부족하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계시록> 서문 참조).

...(중략)...

잠언은 31장, 915절, 15,043단어로 되어 있다. “잠언”(proverb, 히브리어로는 “마샬”)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1. 비슷하게 만들다
2. 지배하다
3. 비유와 직유
4. 함께 놓다, 나란히 두다

이것은 호세아 12:10(『내가 또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하였고, 내가 환상들을 많이 늘렸으며,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비유를 사용했노라.』)이 지혜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이며, “원어”를 몇 년 동안 공부하는 것보다 “as”나 “like”(-처럼, -같이) 같은 사소한 말들이 더 많은 진리를 보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잠언은 (성경의 모든 진리가 그렇듯이) 영적인 일들을 영적인 일들로 비교함으로써(고전 2:13) 지혜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에 사용된 어떤 단어의 의미를 논할 때 성경이 말하는 그 단어의 정의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폐기하는”(막 7:13) 결과를 낳게 된다. 성경이 기록된 이래로 성경을 비평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방법을 쓰고 있으며, 오늘날 미국의 믿을 만한 신학교들도 바로 그 방법대로 가르친다.

오리겐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했다. “Proverbs”(“잠언,” 히브리어로 “마샬림”)이 비교, 즉 “진리를 병행하여 제시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는지, 오리겐은 성경을 인용한 뒤 인용한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자신의 생각을 열거했다. “현대” (불가지론의) 신학도 오리겐과 똑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주석가나 신학자가 성경 본문의 뜻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바꿈으로써 현대의 사사로운 신학 해석이 나온 것이며, 이러한 20세기 신학의 성향은 다음의 사항들과 일치한다.

1. 세계 평화
2. 완전 통합
3. 인간 지혜의 고양
4. <킹제임스성경> 본문을 파괴시킴
5. 로마 카톨릭 교회 전통의 장려

그와 같은 성경 해석 방법은 성경을 종교 정치가들의 교과서로 전락시키며, 결과적으로 “역본들”과 “번역본들”은 아무런 객관적 기준도 없이 번역자나 발행인의 주관적 기준만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잠언에 나오는 모든 단어, 상징, 예표, 활동의 정의를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잠언 연구에 들어간다. 그 정의들이 교회 공의회, 주석가, 신학자, 종교 정치가들의 정의와 상치될 때에도 우리는 성경이 내린 정의를 절대 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공회나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을 <킹제임스성경>의 절대 무오한 권위 아래 굴복시킬 것이다.

잠언을 주해하면서 1881, 1901년 성경 개정 위원회가 만든 수많은 오류들을 일일이 지적할 뿐 아니라, 학자들이 “원문의 뜻을 살린다”는 등의 위선적인 변명을 해 가며 히브리어를 들먹거리면서 본문에 변개를 가해 놓은 부분들도 지적할 것이다.

학자들은 잠언이 대구(對句), 삼행절, 사행절, 오행절, 육행절, 칠행절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기를 이미 거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길고 어려운 단어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어떤 학자는 잠언의 구절들을 “동의어 나열형,” “대구형,” “합성형,” “통합형,” “발전형,” “비유형,” “수(數)형”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이 참으로 똑똑하며, 몇 년 동안 비싼 강의료를 내면서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깊이 있게” 배우는 것이 참으로 멋진 일임을 과시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런 용어들을 나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잠언 5:4; 6:13; 7:10; 8:9; 11:30; 12:4; 18:1,2; 20:26; 25:7,27; 26:27; 27:24; 30:5,6,14, 16,20,30,31; 31:4,8,9을 명확하게 주해하지 못했다. 긴 단어(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헛된 말들 - 벧후 2:18, 유 16)가 신실한 가르침, 믿음으로 하는 성경 공부, 영들을 분별함, 사실의 명확한 제시, 신실한 주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즉 언어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며 그 말씀을 많은 전리품(시 119:162)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상한 영과 참회하는 마음을 결코 대신할 수 없다.

...(중략)...

잠언의 저자는 솔로몬이다(잠 25:1). 솔로몬은 자신의 글에 르무엘과 아굴의 잠언도 덧붙였는데(잠 30:1; 31:1), 이 사실 때문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잠언이 여러 사람의 글들을 모아 솔로몬의 이름만 붙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익히 들어 온 바다. (계시록을 사도 요한이 아닌 장로 요한이 썼다고 한 유세비우스, 이사야를 두 사람이 썼다고 한 교황 요한 23세.) 솔로몬이 잠언의 저자이다(잠 1:1). 이것은 신명기 34장과 창세기 14:14에서(주석 참조) 제기되는 문제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강단 주석>은 한 사람이 잠언을 썼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문체로 써야 하며,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사람의 글을 모은 것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론적인 발상보다 상식이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여러 종류의 문체로 글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지혜를 가르친다는 저자가 동일한 주제를 반복할 때마다 똑같은 표현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중요한 주제를 반복해서 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

학자들은 잠언이 솔로몬이 죽고 나서 200-300년 후에(또는 그보다 더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 추정은 B.C. 200-600년경의 헬라 철학자들의 주가가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게 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인 솔로몬의 글이 헬라 철학이 자랑하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기록되었다면, 헬라의 “과학과 철학”은 진리를 모방한 싸구려 “모조품”임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대의 제임스, 듀이, 러셀, 키에르케고르, 아인슈타인 등이 남긴 말은 그 어떤 것도 <킹제임스성경>을 따라잡지 못했다. 현대 철학자들이나 그들의 조상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은 뭔가 “독창적인” 말을 남기기에는 이미 200-400년이나 늦어 버렸다. 솔로몬이 이미 다 말해 놓았기 때문이다(전도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비 지식을 통해 우리는 이제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에서도 가장 위대한 책 중의 하나인 잠언을 공부할 준비가 된 셈이다. 힌두교나 브라만교에서 발견되는 소량의 지혜는 그나마 이 책(욥기와 전도서를 포함해서)에서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은 서른 한 장 안에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격언과 경구, 잠언, 훈계가 응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을 공부해 나가면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욥기는 생의 중요한 문제, 즉 고난, 악, 죽음, 응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세력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반면, 잠언은 일들의 원인, 결과, 선하거나 악한 가치관을 제시하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절대 무오의 법을 정립하여 인류로 하여금 하늘의 주(잠 2장)를 대적해서 연합하는 것을 막고 있다. 잠언의 내용은 “차든지 덥든지” “위 아니면 아래” “의 아니면 악” “공의 아니면 불의” “하늘 나라 아니면 지옥” “옳은 것 아니면 틀린 것”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런 주제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제롬이 변개시킨 로마 카톨릭 성경, 누가복음 2:14, 잠언 1:11 주석 참조)를 가져오기 위해 진리를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귀에는 거슬리는 주제들이다.

이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열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다”(히 4:12)는 점을 명심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은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앉은 우상의 수에 반비례한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겔 14:1-7). 우상이 완전히 제거된 머리와 마음으로 계시의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진리만을 믿어야 한다. 성경에 접근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전통이나 교회, 종교, 학위, 언어학적 재능, “과학,” 교육, 철학, 문학의 우상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판사들이 소송 사건을 다루듯이 <킹제임스성경>을 다룰 것이다. “피의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객관적 증거”로써 유죄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죄이다. 따라서 <킹제임스성경>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객관적 증거”로써 유죄가 판명될 때까지 우리는 로마의 종교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성경을 다룰 것이다.

잠언은 철학가들의 철학서요, 교육가들의 교육 지침서이다. 솔로몬이 기록했고, 이스라엘 자손이 정경으로 인정했으며, 신약 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히브리어나 헬라어 학자들의 도움 없이 28세기 동안 보존되어 온 잠언은 독자들에게 “조상들의 지혜”와 “잃어버린 동방의 지혜”와 “말씀의 숨겨진 지혜”를 제공한다. 이 지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아퀴나스, 오리겐, 마르시온, 스피노자, 칸트, 티벳인들, 장미 십자회, 무당들, 틸리히, 유가(瑜加) 수행자들이 결코 얻지 못한 지혜이다.

『기록되기를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명철을 없애리라.” ...이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아무 육체라도 그분의 면전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고전 1:19,25,27,29).


1:7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네 어머니의 법을 버리지 말라.
9 그것들이 네 머리에 은혜의 장식이 되고, 네 목을 두르는 사슬들이 되리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7절). 지식과 지혜의 책(시 111:10)은 이 말로 시작된다. 모든 학자들(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모두)이 이 “시작”을 공격함으로써 아무도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게(눅 11:52)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요한일서 4:18을 인용하면서 잠언 1:7을 묵살시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진노와 불못의 하나님(계 20:14)을 제시하는 구원 계획이나 설교는 암흑 시대 카톨릭 교회의 낡아 빠진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부정적인 설교가 사람들에게 “죄의식 콤플렉스”를 준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건전하지 못한 동기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셨다” 등. 한편 보수주의자들은 “두려움”(히브리어로 “이랏”, 헬라어로 “포베오”)이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잠언 1:7을 묵살한다. “두려움”이 “경건한 외경심”이라는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조차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더포드 판사가 지옥을 “무덤”이라고 할 때는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두려움”이 두려움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믿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논리라면 “지옥”이 “무덤”이 안 될 이유도 없다.

두려움(잠 1:7)은 열왕기상 1:50; 8:43, 창세기 19:30; 26:7에 나오는 두려움과 같다. 신약에서 “주를 두려워함”이나 “주를 두려워하라”는 표현에 사용된 “두려움”은 요한복음 9:22, 마태복음 10:31, 마가복음 4:41, 갈라디아서 2:12, 요한일서 4:18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말 그대로 “무서워하다”는 뜻으로 바울은 이 두려움을 “떨림”(빌 2:12, 엡 6:5, 고전 2;3)이라 했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되,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할지니』(히 12:28)라고 함으로써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학자들의 주장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두려움은 “경건한 외경심”이 결코 아니다. 어느 시대의 어떤 주석가가 무슨 말을 하든지 두려움은 “경건한 외경심”이 결코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따랐다. “지옥에서 불타는 것보다는 지옥을 무서워하는 게 낫다”는 속담과 『다른 자들은... 두려움으로 구원하되』(유 23)라는 말씀은, 기독교 교육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새롭고 문명에 뒤떨어지지 않는 “근본주의”에 밀려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현대 복음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학자들과 과학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안달한 나머지 하나님을 “교사·학부형 연합회”에 참가할 정도로 덕망 있는 분으로 바꿔 놓으려 한다. 원어사전이나 뒤적거리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학자들은 “주를 두려워함”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의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말의 뜻을 출애굽기 20:18-20에서 분명하게 제시해 놓으셨다. 거기에는 “경건한 외경심” 같은 것은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나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을 전혀 두렵지 않은 분으로 만드는 배후에 깔린 동기는 분명하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마련이기 때문이다(헤롯, 펠릭스, 아그립파, 빌라도 등).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잠 29:25). 두렵지 않은 하나님을 제시하려고 성경을 희석시키는 학자들은 결코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다(사 66:2,5). 그들은 이름난 신학교 교수진들 앞에서 자기들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될 때만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다. “두려움”은 “두려움”이다. 헬라어나 히브리어 학자가 이 단어를 놓고 무엇이라 둘러대든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2절 주석 참조). “어리석은 자”가 등장한다. 잠언 처음부터 끝까지 어리석은 자는 현명한 자와 대조를 이루며 여러 번 등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는 다음과 같다.

1. 지혜를 멸시한다(잠 1:7).
2. 죄를 비웃는다(잠 14:9).
3.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한다(잠 20:3).
4. 다른 사람들을 참소한다(잠 10:18).
5.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를 흉내낸다(잠 26:11).
6. 눈이 땅 끝에 가 있다(잠 17:24).
7. 자신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주는 벌에 저항한다(잠 17:10).
8. 자신의 마음을 신뢰한다(잠 28:26).

이 밖에도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시 14:1), 구약을 믿지 않는 자(눅 24:25), 부활이 없다 하는 자(고전 15:36), 영적인 의미로 다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마 23:9), 말을 많이 하는 자(전 5:3), 땅에 쌓아 둔 보화와 재산을 신뢰하는 자(눅 12:20) 등을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이 성경적 정의대로 하자면 세상의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물질만능주의자, 카톨릭 신부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럼에도 성경이 내린 이 단어의 정의를 말해 주는 주석서가 단 한 권도 없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네 아버지의 훈계...네 어머니의 법...』(8절).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는 나아마(왕상 14:21)와 솔로몬에게 적용된다. 르호보암을 겨냥한 훈계가 그 예이다(왕상 1,2,12장). 그리스도인에게 “아버지의 훈계”는 썩지 않을 말씀의 씨로 그리스도인을 낳으신(요 1:12,13) 성령님의 훈계를 말하며, “어머니의 법”은 새 예루살렘(갈 4:26)의 법을 말한다. 새 예루살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이며, 이는 모든 카톨릭 신자들의 “어머니”인 마리아와는 완전히 반대된다. 성경은 이처럼 분명하게 구분을 짓고 대조를 시키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은 엉뚱한 말에 미혹당하지 않게 마련이다. 갈라디아서 4:26은 미혹된 이탈리아 통치자들의 사사로운 해석을 바로잡아 주는 말씀이다(<로마 카톨릭의 사사로운 성경해석> 참조).

솔로몬은 “훈계와 법”이 “은혜의 장식”과 “목을 두르는 사슬들”이 될 것이라고 아들에게 말한다. 잠언 6:21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두 경우 모두 훈계와 법에 주의를 기울하는 사람을 “단장해” 준다. 베드로전서 3:1-4에서 『온유하고 고요한 영』이 경건한 여인을 단장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외적인 단장이란 금, 은, 보석으로 된 귀고리나 팔찌 같은 것을 말하며(<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Ⅱ>, 창 24장 주석 참조), 머리에 하는 장식은 면류관처럼 만들어진 화환으로 비유될 수 있고, “사슬들”은 목걸이같이 금속을 꼬아 만든 줄을 말한다(창 41:42, 단 5:29, 솔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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