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요한복음

요한복음

피터 럭크만 (지은이), 윤여성 (옮긴이)
  |  
말씀보존학회
2014-10-15
  |  
30,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알라딘 27,000원 -10% 0원 1,500원 25,500원 >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인터파크 로딩중
11st 로딩중
G마켓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요한복음

책 정보

· 제목 : 요한복음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교회 > 성경공부교재 > 청장년
· ISBN : 9788988795231
· 쪽수 : 708쪽

저자소개

피터 S. 럭크만 (지은이)    정보 더보기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에 있는 성경침례교회(Bible Baptist Church)의 목사였으며, 펜사콜라 성경 신학원(Pensacola Bible Institute)의 설립자이자 원장으로서 50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럭크만 박사는 밥 존스 대학교(Bob Jones University)에서 Ph.D.를 받았지만, 그 학교의 신학 노선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저자는 존 칼빈 이래로 500여 명 이상의 유명하다는 성경 주석가들이 주석서에 범해 놓은 주요 오류들을 일일이 지적하여 바로잡았으며, 창세기, 출애굽기, 욥기, 시편, 잠언, 소선지서, 마태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의 주석서를 저술함으로써 올바른 성경 진리를 밝히고 있다. 또한 럭크만 박사는 <킹제임스성경>이 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권위 있게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는 독보적인 학자로 일했다. 특히 그의 저서 <필사본 증거>, <알렉산드리아의 이단들>, <신약교회사>,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 등에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는 주석서와 성경 교리에 관한 160여 권이 넘는 책의 저자이며, 세계 전역에 있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존경받는 스승이다.
펼치기

책속에서

서문
요한복음은 사복음서 가운데 네 번째 책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공관복음”이라 일컬어지는 앞의 세 복음서들,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및 누가복음과 구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이 요한복음을 구태여 그렇게 따로 구별해서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사복음서 중 한 책으로 대하는 것이 좋겠다. 그 이유는 이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색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20:31에서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만 이것들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것들을 기록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려는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그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믿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다름아닌 “복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구원의 복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이다.
요한복음이 이처럼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진짜 복음서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인가 다른 특성들을 들추어 내면서 이 책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도록 꾀하는 사람들도 더러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전혀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우리가 죄인들의 혼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옴으로써


그들이 거듭나고 구원받도록 하고자 할 때, 그 죄인들에게 들려 줄 최상의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찾아내고 싶다면, 우리는 뭐니뭐니 해도 이 요한복음에서 그 구절을 찾아내게 된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복음”으로 가득찬 책임을 알 수 있다.
로마 카톨릭 교황 요한 23세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골자로 하는 바티칸 공의회를 로마에서 소집하였을 때 장노교파를 대표한 이안 페이즐리가 로마에 가서 5천 부에 달하는 요한복음을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바람에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방해하였다는 죄목으로 교황에 의하여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사태가 벌어졌었거니와, 이런 횡포를 감행했던 교황의 이름이 다름아닌 “요한”이었다. 교황 요한 23세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과는 단 한 가지도 닮은 데가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요한복음을 “성 요한에 의한 복음서”(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라고도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성 요한”이었건, “성 마태”였건, 이런 것이 문제될 것은 없고, 누구든지 구원받았으면 모두가 성도이므로 “성 마가”든, “성 누가”든, 아무래도 좋다.

모두 21장 879절로 구성되어 있고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경우 19,099개의 단어로 되어 있는 이 책은 대략 A.D. 85년에서 9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 학자들에 따라 기록 연대에 대한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


요한복음 1장 1절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2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3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그 빛이 어두움 속에 비치어도 어두움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1절).
실로 장엄하기 그지없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는 창세기 1:1의 말씀과 궤를 같이한다. 요한은 요한일서에 대해서도 1:1에서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고 언급하면서 그 "말씀"이 "태초부터 계셨고"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셨다. 이 우주의 시간도 시작되기 전, 그 영원한 “처음,” 하나님께서는 그 “태초”부터 계셨다. 그 영원한 태초에 또한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셨다. 요한은 요한일서 1:1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태초부터 계셨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살폈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1절).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분께서 어떻게 또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있단 말인가? 요한일서 1:2을 보라. "(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였으며 너희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보여 주었으니, 그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우리에게 나타나셨느니라.)" 요한복음 1:1에서는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요한일서 1:2에서는 그 생명(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라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셨던 말씀이 태초부터 함께 계셨던 그 “하나님”은 곧 “아버지 하나님”이셨고 “말씀 하나님”은 바로 “아들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요한일서 5:20을 보라.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참되신 그분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참되신 그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노라.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니라." 다시 말해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이 하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그러니까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이다. 그 아들이 세상에 오셨다.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또 "영원한 생명"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모습과 함께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아들"의 존엄하신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킹제임스성경>에서 "말씀"의 단어 첫글자를 대문자 “W”로 표기하여 “Word”라고 해놓은 점을 주목하라. 이것은 곧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학자들도 “성경”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이라고 기꺼이 지칭하고, 이때 “말씀”이라는 단어를 두말없이 대문자 “W”로 표기함으로써 이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나마 시인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모든 게 좋았는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게 바로 그들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자처하고 또 공언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말씀"을 대하면서 여기가 잘못되었고, 저기가 틀렸다고 트집잡는 일로 소일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여기가 잘못되었고, 저기가 틀렸다고 함부로 지껄여대기를 서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제마음대로 여기저기 뜯어 고친다.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며,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은 제마음대로 뜯어 고치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원 전부터 계셨음과 삼위일체의 제2신격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분을 "말씀"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곧 "말씀"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그 자체인 것이다. 아멘! 그러므로 그분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스스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분,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 "말씀"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가? 요한계시록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2:13)고 말씀한다. 알파와 오메가란 무엇인가?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가 알파이고 마지막 글자가 오메가다. 결국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는 말씀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이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뜻한다.

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 즉 대문자 “W”로 표기된 “Word”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씀", 즉 소문자 “w”로 표기된 “word”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은 양자가 모두 두 가지 본성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자”로서 인간의 본성을 고스란히 갖고 계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성을 고스란히 갖고 계신다. 그분께서 갖고 계신 인간으로서의 본성은 또 성경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성경에는 거룩하신 사람이신 “인자”로서의 본성이 또 나타나게 된다. 한편, 그분께서 갖고 계신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은 성령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성경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신 성령을 그 안에 내포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은 양자가 모두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았다는 점에서도 아주 유사하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고, 또 성경을 사랑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하였고, 또 성경을 증오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은 둘 다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또 냉대받고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8)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또 "너희 혼들을 구원할 수 있는,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고 말씀한다. 이 구절에서의 "심겨진 말씀"은 소문자 “w”로 표기된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고 성경 또한 영원히 살아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은 아주 유사하다. 아멘, 아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사시는 것처럼 성경 또한 영원히 존속한다.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막 13:31, 눅 21:33)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이 갖는 유사성은 이 양자가 모두 마지막 날에 심판한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이신 것처럼 말씀 또한 심판자가 된다. 위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12:48의 말씀은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이상과 같이 대문자 “W”로 표기된 "말씀"과 소문자 “w”로 표기된 "말씀"은 사람이시고 또 하나님이시라는 본성적 양면성에 있어서나, 심판자로서의 특성, 그리고 그 영원성과 애증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이신 "말씀"과 성경 기록으로서의 "말씀", 이 양자가 갖는 유사성이 어찌나 동일성에 가까웠던지 사도 바울은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않고 수차례에 걸쳐 뒤바꾸어서 표현했던 게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이런 관점에 대하여 “성경 숭배 사상”이라고 비난하고 나선다. 하지만 우리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교육 숭배주의자들”이라고 꾸짖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교육만능주의자”들이면서 교육으로 인하여 아무 쓸모도 없게 된 자들이며, “교육 우상주의자”들이면서 교육으로 망친 자들인 것이다. 로마서 9:17을 보라.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한다. 성경이 파라오를 "세웠으니"라고 말씀한다. 성경이 과연 파라오를 세웠던가? 정말 그런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당시 그 민족을 이끈 것은 모세였다. 그런데 모세가 출애굽을 위하여 파라오와 맞섰을 당시에 성경이 있기나 했던가?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이라는 구절 자체가 훗날 모세에 의하여 기록되고 나서야 성경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뜻이 분명 있을 것이다. 위의 구절에서 사실상 파라오에게 말한 주인공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입을 통하여 파라오에게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고 내가 너를 세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훗날에야 모세가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모세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하나님” 대신에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8을 보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보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느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성경”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했단 말인가? 아브라함 시대에 성경이 있기나 했던가? 창세기 그 어디를 뒤져 보아도 그 시대에는 “성경”이 아직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이다. 창세기는커녕 욥기에서도 “성경”은 아직 이 지구상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한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창 12:2)고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신다. 그리고 훗날에 가서야 모세가 이 사실을 기록하며 창세기에 담아 놓았다. 그런데 바울은 이 내용을 사람들에게 환기시켜 주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이... 전파-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는 “하나님”을 서슴없이 “성경”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성경이 ~했다.”고 말하고 있을 때,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있게 하나님을 성경으로, 성경을 하나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 “책” 자체가 하나님일 수는 결코 없다. 반스가 “당신은 성경을 불태울 수가 없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불태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성경책 자체를 하나님으로 떠받드는 것은 넌센스다. 바울이 “성경”이라고 말한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던 것이지, 결코 “책” 자체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책 그 자체는 종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말씀”을 존귀하게 받들어야지 종이를 숭배할 수는 없다. 당신은 성경 한 쪽을 찢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찢은 것은 아니며, 성경을 어디에 놨다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몇 군데에서 하나님을 성경으로 보고 하나님을 성경으로 바꾸어 표현하였으니까 덩달아서 나도 바울처럼 성경과 하나님을 아무 데서나 뒤바꾸어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자칫하면 사람들을 성경 숭배주의자들로 만들게 될 위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하신 하나님 자신과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어느 경우에나 다 동일시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또 있는 것이다. p9~14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