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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아시아사 > 서남아시아사
· ISBN : 9788990449160
· 쪽수 : 237쪽
· 출판일 : 2004-02-10
책 소개
목차
글을 시작하면서 _ 5
제1부
히타이트 입문 2003년 5월에 부활한 히타이트 제국 _ 15
히타이트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 _ 25
히타이트 언어의 해독 “당신은 빵을 먹고 물을 마실 것이다” _ 37
히타이트인들의 정신적 고향 “하티 나라의 땅” _ 42
히타이트인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였을까 _ 49
히타이트 역사를 밝혀주는 자료는 무엇인가 _ 54
제2부
히타이트 역사 히타이트 시대의 전·후 역사 _ 65
히타이트인들의 시조, 쿠사라 왕조 가문 _ 73
초기 왕국 시대 “시리아와 바빌론을 향해” _ 78
유혈극을 부른 왕실 내 권력 투쟁 _ 86
법과 질서를 사랑한 텔리피누 _ 89
히타이트 제국 시대를 열다 _ 97
또 하나의 시련 “전염병이 제국을 휩쓸다” _ 104
이집트와의 대전쟁과 평화 _ 109
제국의 쇠퇴와 멸망 _ 119
인물로 읽는 히타이트 역사 요약 _ 123
제3부
히타이트 자세히 들여다보기 행정 조직 _ 131
종교 _ 135
점복(占卜)과 주술(呪術) _ 142
신화 및 설화 _ 146
법령 _ 151
경제 생활 _ 158
예술 _ 164
군사 _ 172
카데쉬 전투 _ 178
히타이트의 갑작스런 멸망 _ 185
제4부
히타이트 역사가 남아 있는 주요 명소 보아즈칼레(하투샤) _ 189
야즐르카야 _ 200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_ 209
알라자회윅 _ 220
퀼테페 _ 223
글을 마치면서 _ 226
찾아보기 _ 229
참고 문헌 _ 237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700년경 시작하여 기원전 1200년경까지 약 500년간 역사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런데 제국의 멸망과 함께 그들이 남긴 역사의 기록이나 흔적이 땅속에 묻히는 바람에 너무 철저하게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히타이트 역사가 인류 문명사에서 자리 매김을 한 것은 1900년대 초반 그들이 남긴 점토판이 발굴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3,000여 년이 넘도록 암흑 속에 묻힌 그들의 역사가 히타이트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로 인류 역사와 문명사 속에서 한 자리를 찾게 되었다. 잃어버린 역사 고리 하나를 찾은 셈이다.
그래서 히타이트 역사는 소중하게 간직했던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맛보는 재미가 있다. 히타이트 역사가 밝혀지게 된 것은 20세기 인류 문명사에 안겨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그들이 남겨놓은 점토판이 없었더라면 히타이트는 땅속에서 영원히 묻혀지고 인류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히타이트는 자신들의 문화와 문명으로 역사를 만든 제국이었다고 점토판은 말하고 있다. 히타이트인들은 인도·유럽 어족인 히타이트어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수준 높은 법 제도를 갖추고 탁월한 외교력으로 나름대로의 국제 관계를 형성하며 중근동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제국이었다.
왜 우리는 지금 인류의 기억속에 잊혀진 히타이트를 기억하려 하는가?
(머리말 중에서)
히타이트 언어는 1915년에 체크인 학자가 인도·유럽 어족이라고 발표하였지만, 학계에서는 이를 의심하고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50여 년의 연구 결과 히타이트 언어가 인도·유럽 어족이라는 사실은 입증이 다 되었다. 히타이트어가 인도·유럽 어족이라는 것은 독일 학자들이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물이라는 뜻의 히타이트어는 vadar인데, 독일어는 wasser, 숫자 7은 히타이트어로 siptam인데 독일어는 sieben이고, 포도주는 히타이트어로 wiyana인데 독일어는 wein 등이다. 지금까지 독일이 세계적으로 히타이트를 연구하는 선봉에 있다. 또 히타이트어에는 그리스어나 라틴어와 유사한 것도 많다. 꿀이라는 뜻의 히타이트어는 milit인데 고대 그리스어로는 meli이며, 무릎이라는 뜻의 히타이트어는 genu인데 이는 라틴어도 같다. 또 누구라는 뜻의 히타이트어는 kuis인데 라틴어로는 quis이다. 모두들 발음상 유사하다. 히타이트 시대에는 우리가 인도·유럽 어족이라 부를 수 있는 언어군에 들어갈 수 있는 언어가 세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히타이트 서쪽 및 남쪽에서 사용된 루비어, 북쪽에서 사용된 팔라어, 그리고 히타이트인들이 사용한 네샤어(네쉴리)였다. 이 중에서 루비어가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히타이트인들은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기록한 점토판을 보관하는 데에도 세심한 면을 보였다. 점토판이 땅 속 여기 저기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문서고로 보이는 곳에 잘 정리 보관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물론 원래의 깨끗한 상태가 아니라 대부분 깨지고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불량하였으나, 발굴 후 세정 작업을 거쳐 그 모습을 하나 하나 드러내게 되었다. 히타이트인들은 점토판을 보관하기 위해 선반을 만들었다. 선반은 긴 돌조각을 한 줄로 벽에다 간격을 두어 박고 그 위에 진흙을 칠한 다음, 진흙이 보이지 않도록 다시 그 위를 나무판으로 덮었다.
히타이트인들의 역사 기록은 누가 했을까? 왕실에는 중요한 국사나 종교적인 제의, 조약문을 기록하는 서기관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사서(司書)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 기록관은 아카드어, 수메르어, 팔라어, 루비어 등을 알아야 했다. 그들은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기록물을 정리 보관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기록을 한다는 것은 글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식견이 있어야 한다. 히타이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흙 위에 글을 새기는 서기관이자 필경사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 맡는 귀한 직업이자 직책이기도 하였다. 필경사는 조약문이나 외국의 왕과 속국의 왕에게 보내는 히타이트 대왕의 편지를 새기고, 대왕의 중요한 공적을 기록하고, 종교적이고 법률적인 문서들의 기록을 남겼다. 초기 점토판은 대부분 아카드어로 기록되었다. 히타이트, 아시리아, 이집트, 바빌론의 왕들이 아카드어로 서신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카드어를 국제 외교 언어라고 한다.
히타이트인들의 꼼꼼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히타이트인들은 마치 도서 목록처럼, 점토판의 내용은 무엇이며, 몇 개의 점토판으로 구성되었는지, 분실되었을 경우 몇 번째 점토판이 분실되었는지를 기록해놓았다. 원본이 파괴되거나 분실되는 상황에 대비하여 복사본도 여러 개 만들어두었다. 복사본 제작은 히타이트인들의 철저한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점토판 한 개에 내용을 다 수록하지 못할 때는 두 번째, 세 번째 점토판에다 계속하여 기록하였는데, 그럴 경우에는 이것이 몇 번째 판인지를 꼭 기록해놓았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정리 보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