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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역사
· ISBN : 9788990991645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08-08-13
책 소개
목차
머리말
PART 1 홍수 전후
그리스로마신화에 로마의 신은 없다?
고대에도 역사를 왜곡하는 분서갱유가 있었다?
북경원인은 식인종이었다?
문명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선사시대의 3시대 구분법이 다 맞지는 않다?
투마이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사이에 있다?
화석 연구에는 가짜가 더 많았다?
인간의 역사는 선과 악의 역사이다?
바벨탑은 진짜 존재했다?
가장 오래된 단군보다 더 앞선 선조가 있다?
PART 2 인류의 4대 문명
고대에도 전기는 있었다?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가 크레타섬이었다?
수세식 변소는 4천 년 전부터 일반화되었다?
피라미드 중 최고는 45층 높이에 해당했다?
이스터섬에는 석상을 만드는 기술자들이 있었다?
역성혁명은 또 다른 이름의 쿠데타이다?
은나라의 존재를 밝힌 것은 갑골문자이다?
제국의 통일과 무역개방이 역풍을 가져오다?
손가락으로 셈하고 있을 때 편미분방정식을 풀다?
고대 민족들의 언어가 우리와 비슷하다?
인디언들이 한국에서 건너왔다?
냉동인간 외치는 불임증이었다?
PART 3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헬레니즘 세계를 알아야 한다?
밀레토스는 고대의 실리콘벨리다?
로마 건국에 양치기가 연관됐다?
엘도라도는 황금의 도시다?
함무라비법전을 태양신이 하사했다?
히타이트는 성경에 나오는 헷 족속이다?
히타이트제국이 철을 독점생산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에 멸망되었다?
트로이전쟁은 왕비를 납치하면서 시작됐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노예가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사는 창세기의 현장이다?
마라톤전쟁이 올림픽경기의 시초가 되다?
귀족의 횡포로 평민들이 파업을 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알렉산더군대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취했다?
진시황은 대외 정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홍익인간 철학이 2천 년 통치를 유지시켰다?
종교이념으로 도서관을 방화 파괴하다?
알렉산더는 최초의 글로벌 CEO였다?
로마의 가장 큰 변화는 문화이다?
아우구스투스는 8월의 황제라 불렸다?
왕소군이 나비효과를 일으키다?
노예들이 무장 폭동을 일으키다?
허약한 아이는 계곡에 내 던졌다?
로마를 시끄러운 거위떼가 구했다?
한 번에 1,600명이 목욕할 수 있다?
PART 4 역사의 전환점
성탄이란 말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쓸 수 있었다?
게르만은 기독교의 전도사였다?
중국 사람들은 계절 중 가을을 싫어한다?
조카가 암살되면서 황제 취임되다?
카이사르는 최신 정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은 꿈에 의한 것이다?
동서 로마의 분열 원인은 다산 때문이다?
이민족 침입으로 굽타제국이 쇠퇴했다?
PART 5 중세부터 근세까지
진의 천하통일비결은 철 때문이었다?
어부지리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테오도시우스?
서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존재가 사라진다?
가장 칭송받았던 왕비 테오도라는 매춘부였다?
북위 황후는 고구려 출신이었다?
백성의 원성을 돌리기 위해 고구려를 침략하다?
절대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양귀비는 중국 최고의 요부이다?
금이 자본주의를 낳았다?
정화함대가 최초로 세계일주를 했다?
1453년은 피의 화요일이다?
독일이 연방 국가로 분열되었다?
술탄 메메드는 동생을 익사시켰다?
동로마제국은 잊힌 제국이었다?
게르만의 이동은 제2차 민족이동?
흑사병이 유대인을 박해했다?
백년전쟁은 116년 싸운 전쟁?
잔 다르크는 마녀로 낙인 찍혔다?
장미전쟁에 장미는 없었다?
카노사의 굴욕은 자존심 싸움이었다?
제노바에서 최초의 벤처창업 기법을 모색했다?
이사벨라는 콜럼버스와 도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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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책속에서
살수대첩
589년에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그간 남조와 북조, 북방의 유연 및 돌궐, 그리고 고구려 사이의 세력균형에 의해서 유지되어 오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급격히 와해되어 가고, 주변 제국들은 아연 긴장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수의 군사 압력에 대처하는 한편, 신라에 압박을 가해 옛 세력권을 회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행위를 수는 자신들 중심의 세계제국 건설에 대한 노골적 반발로 인식하여 외교 경로를 통해 통렬한 비난과 협박을 하였다. 두 나라 간에 일촉측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598년에 고구려 영양왕은 1만의 말갈병을 거느리고 요서를 공격함으로써, 양국 사이의 본격적인 대결국면에 불을 당겼다.
이 선제공격은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요서지역 거란과 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수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p.218~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