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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백범일지

(필맥 휴대책)

김구 (지은이)
  |  
필맥
2008-06-10
  |  
8,5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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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책 정보

· 제목 : 백범일지 (필맥 휴대책)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91071568
· 쪽수 : 340쪽

책 소개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독립 후에는 통일운동에 나섰던 백범 김구의 자서전이다. 1947년에 발간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를 본인의 친필원고와 대조하고 내용과 표기를 일부 수정, 보완했다. 김구의 삶과 사상을 알게 하고 구한말에서 독립 직후까지의 파란만장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돌아보게 한다.

목차

저자의 말

상권
머리말-인과 신, 두 어린 아들에게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

하권
머리말
삼일운동 후의 상해
기적장강만리풍

부록
나의 소원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
연보

저자소개

김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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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하루는 어떤 청년동지 한 사람이 거류민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봉창(李奉昌)이라 하였다(나는 그때에 상해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일본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싶어서 왔으니 자기와 같은 노동자도 노동을 해먹으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서 쓰는데다 임시정부를 가정부(假政府)라고 왜식으로 부르므로 나는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단 사무원을 시켜 그에게 여관을 잡아주라 하고 그 청년더러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며칠 후였다. 하루는 내가 민단 사무실에 있노라니 부엌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이 말에 어떤 민단 사무원이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가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한즉 그 청년은 “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을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에 나는 지금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으면 천황을 죽이겠다고 생각하였소”하였다. 나는 그날 밤에 여관으로 이봉창을 찾아갔다. 그는 상해에 온 뜻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을 것이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삼십일 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 씨의 이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이봉창 선생은 공경하는 태도로 내게 국사에 헌신할 길을 지도하기를 청하였다. (255~256쪽)


이튿날 밤에 진과부 씨의 자동차를 타고 박찬익 군을 통역으로 데리고 중앙군 구내에 있는 장개석(蔣介石) 장군의 자택으로 갔다. 중국옷을 입은 장 씨는 온화한 낯빛으로 나를 접하여주었다. 장 주석은 간명한 어조로 “동방의 각 민족은 손중산(孫文) 선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부합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기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대륙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마수가 각일각으로 중국에 침입하고 있소. 벽좌우( 左右)하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 하겠소”하였더니 장 씨는 “하오하오(좋소)”하므로 진과부와 박찬익은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붓을 들어 “선생이 백만금을 허하시면 이태 안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동을 일으켜 일본이 대륙침략을 해올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오?”하고 써서 보였다.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 씨가 붓을 들어 “청이계획서상시(請以計劃書詳示)”라고 써서 내게 보였다.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 주석에게 보내었더니 진과부 씨가 자기의 별장에 나를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장 주석의 뜻을 대신 내게 전한다. “특무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을 터이니 장래의 독립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떠한가”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남성 낙양(河南省 洛陽)의 군관학교 분교를 우리 동포의 무관양성소로 삼기로 작정되어 제일차로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백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만주에 있는 이청천(李靑天)과 이범석(李範奭)을 청하여 교관(敎官)과 영관(領官)이 되게 하였다. (277~278쪽)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發闡)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 해도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 되는 것이 상지상일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며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러면 풍수공부나 관상공부를 하여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수를 잘 써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선인군자(善人君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님께 청하여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빌려다가 독방에서 석 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 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뿐이었다. 과거에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相書)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나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 중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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