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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1071636
· 쪽수 : 292쪽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우리들 가운데 가장 거룩하신 에우제니오 파셀리 추기경 각하께,
하느님의 종 중의 종 Q신부가 드립니다.
친애하는 에우제니오 파셀리 추기경 각하, 저는 각하의 파송을 받고 일련의 사건들을 조사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회의와 절망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항상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지하여, 목격되고 증언되는 사실만을 추적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거짓과 기만으로 저를 절망에 빠뜨릴 때마다 저는 성 보니파티우스 주교께서 머시아 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하신 말씀을 몇 번이고 되새겼습니다.
“우리의 사고는 참된 길에서 멀리 벗어나 버린 듯하다. 우리의 사고에는 정의의 빛 한 줄기도 비추지 않았고, 저 하늘의 태양도 빛을 내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일은 추기경 각하께서 현명한 판단을 하시도록 일련의 사건들을 참된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일한 방법은 한 동양인의 도정을 쫓아 일련의 사건들을 차례대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었습니다.
추기경 각하, 여기 진리를 위해 투쟁했던 한 인간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봉인하는 저의 손이 떨립니다. 생존을 위해 그와 함께 싸웠던 기억들 하나하나가 저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릅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편 57:8)”라는 신의 음성이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역사적 책임을 묻는 듯합니다.
부디 주의 진리를 선포하는 성좌가 어둠의 세력에 맞서 담대히 나아갔던 한 인간의 기록을 되새기고 만방에 정의의 빛을 비추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 본문 8~9쪽 중에서
1907년 7월 16일, 네덜란드 덴하흐의 니우에이켄다위넌 공동묘지. (…)
성긴 목관 하나가 파 올린 흙더미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애통하다. 너무나,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앞가르마를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아 관을 매만졌다. 인부 두 사람이 근처 덤불에서 노닥이다가 뒤늦게 도착한 사내를 보고 그에게 다가가 흥정을 했다. 두 인부는 실크햇의 사내에게서 장례비를 받아들고는 서둘러 관을 내렸다. 앞가르마를 한 사내가 흙 한 줌을 집어 관 위에 뿌렸다. 인부들은 거춤거춤 회백색 흙을 덮고 낮고 초라한 비석을 세웠다. 가매장은 끝났다. 앞가르마를 한 사내가 외투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그는 쪼그리고 앉은 채 종이와 비석을 번갈아 보다가 손등으로 연방 눈을 비볐다. 갑작스런 바람이 봉분에 뿌려놓은 석회가루를 말아 올리더니 어느 틈에 그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1907년 7월 15일 오늘, 덴하흐 지역 기록 담당 공무원 39세 한센과 44세 장의사 렌니스는 한국의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나 기혼으로 서울에 거주하던 변호사 이준이 어제 14일 저녁 7시 이곳에서 49세의 나이로 운명했고 그 외 다른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음을 증명함. - 본문 9~10쪽 중에서
“나는 정의를 선포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믿는 신을 알기에, 데카르트가 극히 명석하고 판명한 진실이라고 했던 그 신을 신뢰했기에 나는 고양이 소굴에서 공법과 정의를 외쳤습니다.”
“허허, 명석하고 판명한 진실이라고? 일본제국이 강대국이라는 사실이 바로 명석하고 판명한 진실일세. 자네가 말하는 평화의 신은 폐기돼 수도원에 갇힌 지 오래야. 공법과 정의? 그건 철학자들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이보게 프린스, 지금 자네에게 명석하고 판명한 진실이란…… 이준 부사의 주검과 이형 왕의 폐위, 그리고 일본제국의 날카로운 칼일세.”
“왜들 이러세요. 두 분 다 너무 취하셨습니다.”
호텔 주인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블라디미르와 스테드를 번갈아 보더니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당신은 소위 평화주의자 아니었나요? 아, 이런! 평화란 고양이들의 전유물이란 걸 제가 미처 몰랐군요. 그놈들의 이빨에나 새겨진 구호에 불과하다는 걸. 머지않아 맥주병에도 하이네켄이란 상표 대신 고양이 이빨을 그려 넣겠군요. 평화라는 문구가 새겨진 고양이 이빨. 덴하흐여, 건배! 고양이를 위하여, 일본제국을 위하여. 그리고 뉴욕 앞바다 자유의 여신상을 위하여……. 이런, 잘못 얘기했군. 고양이들의 여신상, 억압의 여신상을 위하여!”
블라디미르가 오른손에 쥔 보드카 병을 들어 올리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상설이 웃고 있는 블라디미르를 어리둥절히 바라보더니 서둘러 그의 손에서 병을 빼앗았다. - 본문 37~38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