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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4026091
· 쪽수 : 360쪽
· 출판일 : 2009-10-23
책 소개
목차
네덜란드
옮긴이의 글 - 아메리칸 드림의 시원적 흔적을 찾아서
리뷰
책속에서
무엇보다 나는 피곤했다. 피로감.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에 만성적인 병증이 있다면 그것은 피로감이었다. 직장에서 우리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자랑했지만, 집에서는 최소한의 활력조차 보이기 힘들었다. 밤마다 우리는 원기를 회복한 듯싶었지만, 아침이면 다시 악성 피로에 물들며 깨어났다. 제이크를 침대에 눕히고 나면, 우리는 말없이 양갓냉이 샐러드와 중국식 국수를 먹었는데, 둘 다 포장 박스에서 국수를 꺼낼 힘조차 없었다. 차례로 욕조에 몸을 담근 채 꾸벅꾸벅 졸았고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스르르 잠이 들었다. 레이철도 피곤했고 나도 피곤했다. 진부한 일상사였지만, 우리의 문제 역시 진부했으니 여성 잡지의 소재로나 적합했다. 모든 삶은 결국 여성 잡지의 상담란으로 좁혀지게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지만, 나는 내 안에 사람을 지독히도 허약하게 만드는 운명론이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몹시 부끄러웠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대한 결과는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결정되며, 인생은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떠나가게 마련이고, 해야 할 말은 끝끝내 할 수가 없고, 온 세상이 지리멸렬함투성이고,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운명론이 내 안에 잠복해 있었다. 레이철이 피해 달아나는 것은 테러가 아니라 바로 나였기 때문에 나는 부끄러웠다.
크리켓을 하던 순간들은 마치 섹스의 기억들처럼 이제는 내 마음속에서 바짝 시들어 있을 뿐이었지만, 그 당시 호텔에서 지내던 외롭고 긴긴 밤처럼 더 이상 처량한 감정에 물들기 싫어 위로가 필요할 때면, 그리하여 내가 침대에서 예전 기억들을 되새기며 그 순간들이 기약했던 모든 정체 모를 약속들을 헛되이 곱씹을 때면, 나는 그 옛날의 기억이 가슴에 사무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미국식 타법으로, 다시 말해 공을 강하게 퍼올리는 야구와 같은 타법으로 타격하기 위해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지 어렵게 익힌 타격 방식을 내다버리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줄곧 내 자아의 모태에 이어져 있었던 가느다란 흰색 끈을 싹둑 잘라버리는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