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4459301
· 쪽수 : 260쪽
· 출판일 : 2013-11-11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본문
해설 「억압되고 배제된 욕망의 파기」차희정 (문학 평론가, 중국해양대학 한국학과 교수)
저자소개
책속에서
버스 타는 일이 꿈만 같아진다.
그가 시간에 맞추어 버스 위에 오르면 먼저 그녀를 향해 눈을 날려 보냈다. 차에 키를 꽂는 순간 그의 눈이 잽싸게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다. 그녀 얼굴 역시 붙박이듯 앞의 백미러를 보고 있다가 재빨리 그의 눈을 받아들였다. 이건 두 사람만의 인사이자 사랑법이었다. 이 의례는 점점 더 다정해지고 뜨거워져서 이제는 그녀의 몸 전체로 그의 눈을 받아들인다. 그와 그녀 사이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은밀한 눈길을 막지는 못한다. 그것은 말없이, 그리고 번개처럼 한 순간에 그들의 존재를 나누어가졌다.
하지만 그 눈빛 때문에 울고 싶다. 품안에 둥글게 안겨오는 무릎처럼,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몸뚱이처럼, 그녀는 그 눈을 끌어안고 펑펑 울고 싶다.
나의 몸속 어디에 이토록 강한 남자의 화인火印이 고스라니 간직되어 있었던가, 다른 어떤 아름답고 형이상학적인 언어로도 드러나지 않던 곳, 어떤 행복이나 웃음에 의해서도 자극된 적이 일찍이 없었던 곳, 오로지 한 남성의 강력한 눈빛으로만 녹일 수 있는 이토록 관능적이고 뜨거운 욕망의 용광로가 숨어 있던가.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는다. 이제 눈물로서가 아닌, 존재 전체로 그 눈빛을 감당해내려고 한다.
경계하지 않는 눈빛.
결코 다른 곳으로 돌려지지 않는 눈동자.
그 앞에서 그녀는 새로이 태어나고 있었다.
나이 마흔 살의 신생아는 그 눈빛에 대한 사랑으로 숨이 차오른다. 푸른 날개를 가진 버스가 아파트 진입로 끝에 모습을 드러내면 그녀의 가슴은 터질 것처럼 뛰어올랐다. 아니, 드러나기도 전에 언제나 그녀의 가슴으로부터 먼저 존재했고 그리고 소멸되어 갔다. 그녀의 호흡처럼 버스는 매 시간마다 모습을 드러냈고, 거기에는 도대체 눈빛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 사내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각각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에라도 그들의 시선은 더욱 은밀해지고 그리고 사정없이 엉켜들었다.
여태까지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기뻐해주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그녀는 납덩어리 같은 짐이었고 평생 업고 다닌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몇 번의 남자. 그들은 그녀를 아끼고 존중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연민과 곤혹스러움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의 여성성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돌려버리는 것으로 서로의 평화로움을 유지해나가곤 했다. 그녀가 가장 완성된 순간이라고 믿을 때에라도 그녀는 결코 여성이 아닌, 한 인간에 속해 있었을 때뿐이었다. 여성성이 제거된 인간.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더 큰 타이틀을 갖다 붙일 수밖에 없는 존재.
이제 그는 남성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여자를 만나는 남성의 기쁨이 그 눈에 담겨 있었다. 그런 남자의 기쁨을 확인하는 여자의 깊은 희열이 그녀의 온몸을 거듭거듭 적셔냈다.
안아 줘, 어떤 말이나 의미도 붙이지 말고, 그 여자를 안아주었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안아 줘. 봉애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내 생애의 한 터널을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 제발, 나를 당신의 몸속으로 통과시켜 줘. 아무 미련, 어떤 터럭도 남기지 않고 그냥 나의 길로 걸어갈 거야. 타박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