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고대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고대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빅터 데이비스 핸슨 (지은이), 임웅 (옮긴이)
  |  
가인비엘
2009-11-16
  |  
18,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인터파크 로딩중
11st 로딩중
G마켓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고대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책 정보

· 제목 : 고대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고대사
· ISBN : 9788995846711
· 쪽수 : 511쪽

책 소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벌어진 서양 역사상 최초의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현대적 시각으로 다루었다. 저자는 이 전쟁이 일반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커다란 소용돌이에 몰아넣을 정도로 파괴적이었음을 이야기한다.독자들은 페리클레스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만나고, 고대의 경제를 이해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대학살에서 보여준 잔혹함을 목격할 수 있다.

목차

1장 공포
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싸웠는가(480~431)
2장 불
토지에 대한 전쟁(431~425)
3장 질병
아테네가 입은 전염병의 피해(430~426)
4장 공포
어두운 그림자 속의 전쟁(431~421)
5장 갑주
중장보병의 총력전(424~418)
6장 성벽
공성전 (431~415)
7장 말
시칠리아 참패(415~413)
8장 선박
해전(431~404)
9장 대단원
에게 해에서의 삼단노선 전투(411~405)
10장 멸망?
승자와 패자(404~403)

부록
용어와 지명에 대한 풀이 / 중요 인물 / 참고문헌 / 역자 후기

지도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스파르타 동맹국
아테네의 속국들과 동맹국
아티카 침입
아테네와 인근 지역
펠로폰네소스 해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교전과 공격
414년, 아테네의 시라쿠사 공격
415~414년 겨울, 마지막 군의 움직임
에게 해에서의 해전

저자소개

빅터 데이비스 핸슨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쟁사가. 1980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부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고전문학과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로 그리스.로마시대의 전쟁을 주제로 한 책을 써서 호평을 받았다. 펴낸책으로 <또 다른 그리스인들(The Other Greeks)>, <서구적 전쟁 방식(The Western Way of War)>, <전투의 본질(The Soul of Battle)> 등이 있다.
펼치기
임웅 (옮긴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서양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대학에서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로마의 하층민』 『로마의 소작과 소작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 『말의 세계사』 『문명이야기 3: 카이사르와 그리스도』 등이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재로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만큼 군사적인 교훈을 가져다줄 수 있는 전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물론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발칸 전쟁처럼 뒤죽박죽 뒤엉킨 혼란스러운 전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공포를 가져다 준 가공할 전쟁이었고, 그리스의 제3세계에서 일어난 추악한 싸움이었으며, 때때로 완강하게 저항하는 국가들에게 민주주의를 강요했던 전쟁이었다. 또한 해외에서 패배한 전투 때문에 국내에서 문화적인 격변이 초래되었던 전쟁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이제까지 전통적인 역사에서 다루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테네인들은 육상에서, 도시에서, 해상에서, 그리고 그리스 농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스파르타인들과 어떻게 싸웠는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그리스인들이 싸웠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심지어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조차도 전혀 기록되지 않았던 악몽과도 같은 이 끔찍한 전쟁에서 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적을 죽였던 사람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였는가? 이러한 질문과 관련해서 필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체적인 과정을 간단하게 소개한 뒤에, 지금으로부터 대략 2400년 전에 일어난 30년 동안 계속된 싸움을 대단히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살을 붙이려고 한다.

아마도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해서는 “고대 그리스 내전”과 같은 것이 보다 더 좋은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의 최종 국면에 자금 지원과 함께 등장했던 페르시아를 제외한다면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그들 각각의 동맹국들은 모두 똑같은 신을 숭배했고, 밭을 경작했으며,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싸웠던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설사 성공적인 범그리스 국가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도시국가 체제에서 살고 있었던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을 단일 민족으로 생각했다.

이 책은 일 년 단위로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투의 경험, 즉 “불(지방의 파괴)”, “질병(전염병)”, “공포(불의의 일격과 비정규전)”, “갑주(중갑보병 전투)”, “성벽(포위공격)”, “말(시칠리아 원정)”, 그리고 “배(삼단노선 전투)”와 같은 장들로 대부분 구성된다. 또한 각 장의 주제들은 산만하게 진행되는 전쟁 이야기와, 27년의 전 기간에 걸친 대립으로부터 끄집어 낸 실례에 근거한 해석들로 뒤섞여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2,436년 전(서기 2004년)에 일어난 지나간 과거의 전쟁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자리 잡고 있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서로 적대적이었던 당사자들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숫자와 작은 몸집을 가졌던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오늘날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고대인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보여준 전투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 오늘날에도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실례로 서기 2001년 9월 11일(9·11테러),서기 2001년 10월과 11월에 테러리스트들이 살포했을 것으로 확실시되는 탄저균, 서기 2003년 봄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 전 세계가 긴장하는 가운데 워싱턴과 북경에서 잇달아 일어났던 공황상태는 430년과 426년 사이에 아테네에서 발생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처럼 전시에 발생한 고대의 전염병을 생각나게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의 위대한 황금시대(479~404년)의 절정기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뒤이은 재난으로, 479년 페르시아인들의 패배로 시작되었던 장밋빛 약속이 마지막 종말을 고했다. 아테네의 항복(404년)과 5세기 황금시대의 종언은 상징적으로 오늘날의 사건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그리스 세계의 가장 위대한 최후의 희생자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과 처형(399년)에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그리스 세계는 몇십 년 동안 이렇게 미쳐갔던 것 같다.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희극 시인을 포함한 동시대인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막을 내리면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전형적으로 발달했던 아티카의 비극이 화려한 옛 명성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전쟁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과 참전하지 않고 전쟁을 지켜본 사람들, 즉 알키비아데스, 아리스토파네스, 에우리피데스, 페리클레스, 소크라테스, 소포클레스, 투키디데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그리스 문명의 걸출한 위인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에 참가했으며, 일부는 출세했고, 다른 일부는 평판이 나빠졌으며, 또 다른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거의 모든 점에서 완전히 상반되었던 각기 다른 두 그리스 도시국가의 대결이었다. 아테네는 300척의 전함, 30만 명 이상의 인구, 요새화된 항구, 광활한 농촌, 해외에서 조공을 바치는 대략 200개에 달하는 속국, 그리고 풍부한 주화를 소유하고 있었다. 반면 스파르타는 육지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대략 남쪽으로 160마일에 해당되는 지역을 1만 명에 불과한 보병(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자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함)에 의존했다. 이들은 해군력 또는 범세계적 문화의 전통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5만 명에 달하는 하층민과 농노(헬로트)를 지배하고, 인접 지역들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 나갔다.

옳든 그르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싸움은 각각의 상반되는 가치가 최종적으로 심판받는 무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가치가 보다 실행 가능한 이념으로 입증될 것인가? 즉, 아테네의 문화적·정치적 자유주의인가 아니면 고립된 스파르타의 완고한 보수주의인가? 개방 사회의 관대함이 군사적으로 이점이 되었는가 아니면 통제되고 군국주의적인 과두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방종에 압도되었는가? 그리고 양쪽이 서로 전통적 방식의 전투로 맞설 수 없거나 또는 맞서려고 하지 않을 때, 균형을 이루지 못한 전쟁에서 지략이 뛰어난 쪽은 어디였는가?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