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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6292838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12-03-15
책 소개
목차
그리운 우물
가끔, 공자가 출몰하는 마을
아버지의 문상
그림자가 있는 풍경
눈꽃 피던 날
저녁 무렵의 선물
아버지와 여인
세 가지 빛깔의 눈과 여행
흰 우물
자주색 우산
정전의 집
작품해설/ 겨레말로 지은 연민의 집_ 정호웅(문학평론가, 홍익대 교수)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아지벰, 함부래 권하지 마소. 저녀리 자슥은 지 에미 죽고 쪼글쪼글 늙어 봐야 사람 되니요. 지금은 호강에 받혀서 지 권속이 을매나 중한동 모르니요. 에이, 더러운 자슥…”
그리고 노모는 방문을 꽝 닫았다. 닫힌 방문 너머로 노모의 밭은기침 소리가 붉덩물처럼 질퍽하게 쏟아졌다.
아재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를 작은방으로 끌고 간 아재가 먹다 남은 윗목의 막걸리로 목을 축인 뒤 차분히 목소리를 깔았다.
“지난번 방앗간에서도 이바구했다만도 내가 와 늬 심정을 모리겠노. 흥수가 그캐쌓는 거 절대루 무리가 아이다. 너도 알다시피, 참, 너거 오메가 갓 스물에 숟가락 몽댕이 하나 올찮은 우리 비문(卑門)으로 시집와가꼬 이날 이때까정 쎄 빠지게 고생만 안했드나. 술 좋아하고 노름 좋아하는 흥님이 억시기 싹싹해서 서방 복이 있었나, 그렇다고 자숙 복이나 있었나. 알밤 같은 자슥들을 과거하다가 다 베리불고 늦게사 너거 삼흥제를 붙들어가꼬 눈물 멕이 안 키웠드나. 흥순들 그 혼인이 이차 좋아서 팔 걷어붙였겠나. 아까도 얼핏 비치드라만도 속으로야 니대마 및 배 더 곪아터졌을 끼다. 와 그 심정 모리노. 그러이 두십이 니도 자꾸 고집만 씨아쌓지 말고 마지막으로 효도한다 셈치고 맴을 한번 돌려 묵어 봐라. 아니할 말로, 니가 대처로 나가 살 헹핀이 되나, 나이가 적나. 돈이 도라꾸(트럭)로 있어 연변 처녀를 사오마 모리까, 안 그런 담은 성한 처녀한테 장가들기는 글른 기라. 속 썩히는 병신 처자한테 장가들기보담야 및 백 배 낫다. 이바구 들어보이끄내 아(애) 문제도 걱정 안해도 되겠고, 천상 니 배필이다 싶드만도. 읍에 누부가 비미(어련히) 알아서 중신을 섰겠나. 니가 혹 고자문 모리까 안 그러모 우야든동 여자를 디리가꼬 씨를 뿌리야 하는 기라. 요즘 시상에 과부먼 어떻고, 소박데기먼 어떻노.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제? 자, 자, 내 술 한 잔 받고 탁 털어 뿌리라.”
“아재도 참 답답쿠마. 개코도 털 끼 있어야 털든동 오그리든동 하지요.”
-「그리운 우물」중에서
아버지는 또 방문을 열고 바깥의 눈을 살피고 있었다. 종작없이 흩뿌리는 오색 종이처럼 낭자한 눈의 입자들이 어둠 속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아버지가 진심으로 감질내고 있는 것은 그 눈이 아니라 눈바람이었다. 북쪽 이봉산을 넘어오는 고추 먹은 눈바람은 말경에는 할머니의 여린 생명의 불을 지워 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눈 좀 붙이세요. 내일 또 가 봐야죠.”
나는 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제야 무엇을 훌훌 떨어버리듯 시선을 거둔 아버지가 이불 깊숙이 몸을 묻었다. 따스한 온기가 몸속에 스며들자 냉기로 움츠러들었던 피로가 일시에 덮쳐 오는 모양이었다. 지게미가 낀 아버지의 눈시울이 형광불빛 아래 새들새들한 푸새처럼 떨리며 스르르 내려앉았다. 방안이 점점 따뜻해 왔다.
아버지는 은행나무 밑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할머니를 안고 있었다. 어머니도 그 곁에 혼 뜬 모습으로 조각처럼 서 있었다. 할머니의 어깨는 간밤에 어머니가 마무른 밤색 스웨터로 감싸여 있었다.
“운명하셨다!”
내가 무심코 다가섰을 때, 아버지가 나직이 말했다. 그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운명하시다뇨?”
나는 다듬잇방망이로 뒤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잠든 사이 나와 계신 모양이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덧붙였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라. 늙으면 언젠가 한 번은 이 길을 가는 법이다.”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침착하게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불가사의하게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눈빛 때문에 더욱 환해 보이는 얼굴은 간밤에 우리가 맛본 평화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눈꽃 피던 날」중에서
“너… 눈을 갖고 싶어.”
돌아오는 차 속에서 몇 년을 벼르던 말을 마침내 남자가 내뱉었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박꽃 같은 수줍음이 묻어 있었고, 여자의 카메라를 매만지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아직도 산행의 잔열이 남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차가 제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라앉았던 흥이 되살아나 머리를 간댕거리며 허밍으로 밥 딜런의 하모니카 소리를 쫓고 있던 여자가 일순 동작을 멈추고 찬찬히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물었다.
“언제, 오늘?”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여자가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쉬운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해. 깜짝 놀랬잖아. 필름을 잃어버린 줄 알고…”
여자의 눈에는 남자의 표정이 그렇게 비쳤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삼십오 밀리 미놀타 카메라를 메고 다녔다. 하산할 때 화장실엘 가면서 그것을 벗어 남자에게 주며 특종거리 취재 필름이 들어 있다고 겁을 주었었다. 그 뒤로 남자가 보관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의 대답은 그 카메라로 찍어두고 싶을 만큼 남자에겐 특종감이었다.
하긴 여자는 어려운 말을 쉽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가령 ‘생리통이 심해’ 라든가‘ 한쪽 젖가슴이 작아’ 같은, 그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내뱉곤 했다. 누구에게나 다 그런지는 남자로선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그것이 여자의 단점이자 장점이고 매력이었다. 어쩐지 쑥스러워진 남자가 담배를 꺼내 물자 여자는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잠시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여자가 유턴 지점도 아닌 곳에서 홱 핸들을 꺾어 황색 실선을 무너뜨리더니 서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세 가지 빛깔의 눈과 여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