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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8606732
· 쪽수 : 304쪽
· 출판일 : 2019-07-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4
프롤로그 8
첫째 날 14
둘째 날 70
셋째 날 130
넷째 날 168
다섯째 날 200
여섯째 날 236
일곱째 날 260
여덟째 날 284
아홉째 날 306
열째 날 328
마지막 날 344
저자소개
책속에서
“영감!!!”
그때였다. 도축자가 숟가락을 딱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마치 건물 전체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어마지두에 놀란 눈들이 허공에서 한동안 어지럽게 뒤섞였다. 기함한 아이들은 더러는 소리 내어 울음보를 터뜨렸고, 더러는 본능적으로 제 부모의 품속으로 얼굴을 묻으며 자지러졌다.
“이게 뭔 소리여. 지진인가?”
최대한이 최숙희의 잔에 술을 따르다 말고 귀를 쫑긋했다.
“보자보자 하니……. 영감, 참말로 자꾸 엉뚱한 소리하며 미꾸라지모양 요리조리 피할 참이요?”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오른 도축자가 금세 최대한의 멱살을 틀어쥘 듯이 눈씨를 곧추고 대들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최대한이 치던 술을 계속 치며 점잖게 일렀다.
“아범아, 네 어미 안방으로 모셔라. 술이 좀 과한 것 같다.”
최갑부가 일어섰다.
“나라, 이놈아.”
최갑부가 어르며 팔을 끌어당기자 도축자는 최갑부의 팔을 사납게 뿌리치며 악다구니를 썼다.
“어머님, 흥분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아버님께서 무얼 발표하기로 하셨는데요?”
그때 얌전히 수저질하던 강지혜가 머리를 들고 참견했다. 최정혜는 바짝 신경이 곤두섰다. 한 차례 맞은쪽 허경화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니까 바로 지난 연말에 네 시아비가 나한테 분명히 약조했니라. 칠순 생신날 우리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오늘 이후부터 이 건물의 소유권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예?”
도축자의 말에 모두가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우연의 일치일 거예요. 만일 아버님과 작은동서가 내통해 사전에 바꿔치기했다면 아버님께서 굳이 의심받을 작은동서에게 시키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씨의 의심이 성립되려면 즉석에서 바꿔치기한 것이 되어야 하거든요. 아가씨의 말처럼 작은동서가 방 안에서 얼쩡거렸다 해도 그 인터벌이란 게 사실 극히 짧은 시간이에요. 어머님께서 봉투를 뜯으실 때까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봉투의 외양이 자신이 보관한 거랑 똑같았다는 뜻이잖아요. 설령 작은동서가 아버님의 마음을 귀신같이 꿰뚫고 흑심을 품었다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신이 아닌 이상 완전범죄를 저지른다는 건 불가능해요. 극단적으로 이런 가정을 상정해 볼 수 있어요. 아버님과 작은동서가 내통해 미리 빈 편지지가 든 봉투를 준비해 두었다가 ‘만일 네 시어미가 그걸 언급하면 내가 너에게 시킬 테니 네가 감쪽같이 바꿔치기해서 가져 오너라.’라고 입을 맞추었을 수는 있어요. 이 가정이 성립되려면 아가씨의 합리적 의심을 부정해야 하거든요. 일반적으로 사람의 심리가 그래요. 자신의 의심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더 민첩하게 행동하지 그렇게 턱없이 거레를 떨었을까요. 이런 정황들을 놓고 볼 때 아버님과 작은동서가 내통하거나 교감해 바꿔치기 했다는 건 어불성설이에요.”
“그럼 누굴까요. 설마 큰올케가……?”
최정혜는 갑자기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형님도 아닐 거예요.”
“그럼……?”
“저는 상상 임신과 흡사한 거라고 생각해요. 왜, 임신에 집착하다 보면 임신하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임신한 것처럼 입덧도 하고 그런다잖아요. 이번 일도 그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각서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죠. 말하자면 유령 각서죠.”
“각서의 내용이 너무나 구체적이었잖아요.”
“역설적으로 그게 유령의 결정적 증거죠. 원래 거짓말이 참말보다 더 논리적이고 구체적이고 화려한 법이거든요. 그게 거짓말의 비극적 아이러니죠.”
“제가 그러지 않았어요, 아버님.”
강지혜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한 것이 아니라고?”
“네.”
“그런데 무얼 꿰뚫어보았다는 게냐?”
최대한은 지혜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 저더러 ‘지혜야, 내 말 알아들었느냐?’ 하셨을 때, 제 귀에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어요. ‘지혜야, 지금 네 시어미의 마음이 몹시 들떠 있구나. 혹시 그런 게 있거들랑 네 시어미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가능하면 천천히 가져오너라. 알아들었느냐?’ 그래서 그대로 실천했을 뿐이에요. 방 안에 들어가 크림통 안에 든 열쇠를 꺼내기 전에 천천히 열을 세고, 다시 장롱 문을 열기 전에 또박또박 열을 세고, 다시 자개함에 열쇠를 꽂기 전에 껌을 씹듯 꼭꼭 열을 세고, 다시 봉투를 꺼내 가슴에 모아 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직이 열을 센 뒤 가지고 나왔을 뿐이에요, 아버님.”
“허허, 이런 변이 있나?”
최대한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혜의 대답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님, 어머님의 말씀처럼 작년에 정말 그런 각서를 써 주신 적이 있으세요?”
지혜의 물음에 최대한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버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진상 파악부터 제대로 되어야 해요.”
지혜의 다그침에 최대한은 문득 아까 장인환이 한 말이 떠올랐다.
“사람의 뇌에는 치욕, 충격, 공포, 슬픔 등과 같은 망각하고 싶은 특정 기억을 잊게 하는 그런 기능이 있다는구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나는 그런 각서를 써준 기억이 없는데, 네 시어미가 저렇게 길길이 날뛰며 완강히 버티니 마구잡이로 생트집을 부리는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내가 써준 듯하구나. 무슨 좋은 방도가 없겠느냐?”
최대한은 별 수 없이 지혜에게 망각이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솔직히 실토하고 말았다. 그 순간 강지혜가 가슴이 내려앉도록 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