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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96403678
· 쪽수 : 337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이 이야기의 무게를 더 이상 짊어지고 싶지 않다. 그것은 너무도 끔찍한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구에 정박한 고무보트 위에서 스머티노즈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이 분홍빛 얼룩을 남기며 섬 위를 지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보트 엔진을 끄고 한 손을 반쯤 물에 담가 손에 닿는 차가운 물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바닷물 속에 담근 손을 이리저리 저으며, 이 바다와 항구가 간직한 슬픈 비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이 섬에 와본 적이 있다. 1년 전이었다. 그때 나는 이곳의 거친 날씨에 맞서 섬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을 촬영했다. 블랙 세이지, 베이베리 나무, 애기 수영풀, 갯솔나무 등…. 이 섬은 화강암으로 된 돌섬으로, 완전한 불모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메마르고 황량한 곳이었다. 해수면에서 그리 높지 않게 들쭉날쭉 솟아오른 바위들로 이뤄져 있는 이 스머티노즈 섬에서 살려면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이 메마른 섬에서 살아남은 식물들처럼, 바위 틈바구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을 당시의 사람들을 상상해보았다.
두 여자가 살해된 집은 1885년에 불에 타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1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집터의 흔적을 발견해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보트 위에서 섬을 바라보며 스머티노즈 섬의 하얗게 변색된 바위들도 사진에 담았고,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낮게 날다가 순식간에 휙 날아오르는 갈매기들도 찍었다. 전에 왔을 때는 노란 장미와 블랙베리 열매도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감지할 수 없었다.
리치는 빌리의 손을 잡고 방파제로 가서 빌리가 바위틈에서 홍합을 잡아 양동이에 담는 것을 옆에서 도와주었다. 나는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고 스머티노즈 섬의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섬 전체를 구도 안에 넣어 찍고 싶었다. 내 목적지인 섬의 동쪽 끝에 이르자 바위 하나가 보였다. 그것은 말발굽 위 뒤쪽에 난 덥수룩한 털처럼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삐죽삐죽한 바위 안쪽으로 동굴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동굴 안까지 바닷물이 들어차 출렁거리고 있었다. 해안 바위는 미끄러웠다. 그래도 나는 카메라 가방을 물기 없는 납작한 바위에 올려놓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바위의 갈라진 틈에 끈을 고정해두고 동굴 안으로 게처럼 기어들어가 웅크리고 앉았다.
내가 앉은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일렁였다. 동굴 입구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동굴 밖으로 대서양이 넘실대는 광경이 망망하게 보였다. 내가 앉은 바위는 이끼로 덮여 있고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물보라를 일으켰다. 작은 파리들이 미친 듯이 날아오른다.
마렌의 바위였다. 나는 그 바위에 앉아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그녀는 동굴 안에서 겨울밤 내내 웅크리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잠옷 하나만 달랑 입고 냉동고처럼 춥고 어두운 이곳에서 희미한 온기나마 느끼려고 조그만 강아지를 품에 꼭 안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날 밤, 침대 역할을 하는 축축한 매트리스 위에서 토머스와 나는 몇 인치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누웠다. 선실 안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머리가 이마 위로 떨어졌고 눈은 무표정해 보였다. 마치 검은 웅덩이 두 개처럼 보였다. 나는 하얀 바탕에 핑크색 면으로 테두리 장식이 된 헐렁한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었다. 토머스는 파란 바탕에 가느다란 노란 줄무늬가 있는 셔츠와 팬티만 입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로 내 입술 윤곽을 만졌다. 그리고 그의 손등이 내 어깨를 살짝 스쳤다.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는 팔을 내 허리에 둘렀다.
우리에겐 사랑을 나누는 방법, 우리만의 언어가 있다. 처음엔 이런 움직임, 다음엔 저런 움직임, 서로를 건드리는 작은 손길들, 이 모든 것들은 오랜 경험으로 체득했다. 매번 지난번과 약간씩만 달라졌다. 그의 손이 내 허벅지 안으로 미끄러지고 내 손이 그의 배에서 다리 사이로 내려갔다.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작은 손길. 내 손바닥이 그의 셔츠 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그는 미끄러지듯 내 위로 올라왔다. 내 얼굴은 그의 가슴과 팔 사이에서 살짝 숨이 막혔다.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그의 옷에서 희미하지만 놓칠 수 없는 낯선 향기가 난다. 바다 냄새도 아니고, 랍스터 냄새도, 땀에 젖은 아이 냄새도 아니었다. 천 번, 이천 번 사랑을 나눈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내 위에서 내려갔다. 등을 대고 옆자리에 누웠다. 그의 눈은 선실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