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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96649311
· 쪽수 : 312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_역사는 소통의 기록일 수는 없는가
1장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
조선판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
19세기 백과사전, 현대 건축가에게 영감을 주다|사회를 바꿔버린 서양의 백과사전|서유구가 농업 개혁에 힘을 쏟은 이유|《임원경제지》, 다양한 지식의 보고
용기 있는 모험, 실학(實學)을 깨우다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가장 긴 거리를 표류한 문순득|유구의 생활을 기록하다|필리핀과 마카오를 거쳐 조선으로 귀환하다|실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홍어 장수
백제 망국의 한, 요동반도에서 떨친 부여태비
멸망한 나라의 마지막 공주|요동반도에서 부활한 백제|부여태비 혼인에 얽힌 속사정
세계적 수준의 화풍을 자랑하다, 겸재 정선
독일 수도원에 소장된 조선 산수화|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파란 눈의 독일인|진경산수, 조선 회화에 새 바람을 일으키다|베버, 정선과 만나다|세월을 뛰어넘은 베버와 정선의 인연
2장 개인의 삶, 역사를 기록하다
조선 무관 노상추의 68년간의 일기
노상추는 왜 무과를 선택했을까|쉽지 않은 무과 급제의 길|관칙에 오른 노상추의 생활|노상추는 왜 세 차례 혼인했을까|시대의 변화에 마주했던 노상추
나는 노비이고 싶다
학봉 김성일, 다물사리 소송 사건을 맡다|짐승보다 못한 사노비의 일상|노비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다물사리는 양인일까, 노비일까
방랑 시인 김삿갓, 슈퍼스타 되다
21세기에 다시 살아난 김삿갓|잘못 알려진 김삿갓의 일화|그는 왜 삿갓을 썼을까?|김병연은 죽었지만 김삿갓은 살아있다
400년 맺어진 의리, 안동게회
안동 선비들의 계모임을 그린 그림 한 점|넉 점의 《임계계회도》|허응길의 후손을 찾아서|안동에서 선비들의 계모임이 많았던 이유|계모임으로 조상의 뜻을 살린다
3장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우리 영웅들
동해의 수호신 신라 장군 이사부
나무사자로 울릉도를 정복한 이사부|이사부는 누구인가?|우산국 정복 과정|울릉도에 남아있는 신라의 흔적|우산국 정벌 이후 이사부의 행적
자객 고영근, 명성황후의 원수를 베다
국모 살해 현장에 있었던 조선인|명성황후 살해는 일본 측의 의도적인 기획|일고영근, 우범선을 처단하다|능참봉 고영근
찬란한 조국의 광복을 꿈꾼, 박상진
박상진, 그리고 광복회|명문가의 후손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기수로|베일에 싸여 있던 광복회의 실체|조국에 모든 것을 바치고 형장의 이슬이 되다|독립에 헌신한 이들에게 남겨진 것들|81세 최영백 여사 냉방서 신음하다
이순신 대장선의 미스터리
일본군 출신, 이순신의 최후를 함께하다?|고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손문욱|대마도의 실권자에게 은혜를 입다|손문욱이 대장선에 탈 수 있었던 이유|변화무쌍한 변신의 귀재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서유구의 할아버지 서명응과 아버지 서호수는 3권의 백과사전을 남겼다. 《보만재총서》와 《고사신서》는 서명응이, 영조 때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의 천문학 부분은 서호수가 썼다. 서유구는 이들의 작업을 도우면서 백과사전적 지식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중국과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시대적 조류도 서유구에게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 간 사신들은 현재 인사동에 비유되는 베이징의 리우리창 시장에 들러 새로운 서적과 골동품을 샀다.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물이 들어왔고, 이것은 다시 실용적 학문에 관심이 많던 조선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_〈조선판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 중에서
문순득의 파란만장한 표류담은 정약전의 붓끝을 통해 소중한 기록 유산으로 남겨졌다. 〈표해시말〉 저술을 마친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친히 천초(天初)라는 호까지 지어준다. 우리나라 개벽 이래 최초로 세계를 돌아보고 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문순득의 표류담을 중시한 정약전의 역할 또한 무척 중요하다. 성균관대학교 안대회 교수는 이를 통해 “정약전이 양반 시절의 관념성을 버리고, 현실적으로 체험한 것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정약전 덕분에 문순득의 표류담은 모험에서 학문의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_〈용기 있는 모험, 실학을 깨우다〉 중에서
왕족은 국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라를 잃고 당나라에 새 터전을 잡았지만 그래도 온전한 백제는 아니었다. 도 의자왕과 부여융은 이국땅에서 생을 다해 태비의 곁에는 의지될 만한 사람도 이미 떠나고 없었다. 백제로 돌아갈 날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동안 선대 왕은 하나둘 떠나갔다. 홀로 남은 부여태비는 백제의 왕족으로서 유민들에게 힘이 돼주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22세의 나이에 직접 아내를 죽인 당나라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했던 이유였다. 백제 공주로서 받아들여야 할 희생이었던 것이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는 “왕족은 국가 멸망의 1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국가를 회복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해야 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죠”라고 설명한다._〈백제 망국의 한, 요동반도에서 떨친 부여태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