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황진하 회고록

황진하 회고록

(나는 황희 정승 21대손 파주 토박이다)

황진하 (지은이)
  |  
연장통
2012-01-06
  |  
20,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인터파크 로딩중
11st 로딩중
G마켓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황진하 회고록

책 정보

· 제목 : 황진하 회고록 (나는 황희 정승 21대손 파주 토박이다)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인
· ISBN : 9788996649830
· 쪽수 : 400쪽

책 소개

황진하 국회의원의 회고록. 황진하 의원은 황희 정승 21대손 파주 토박이이다. 대대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바른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육군사관학교(25기)를 졸업하고, 군인, 외교관, 국회의원으로 살아왔다. 이 책 400페이지에는 그의 인생 이야기가 가득하다. 황진하 의원은 이 책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메시지를 전한다.

목차

004 서문

황진하와 함께 한 기억들
009 이홍구, 서울국제포럼 이사장
011 김재창, 예비역 육군 대장
014 강창희, 전 국회의원
017 이재욱, 전 한국은행 부총재보
022 윌리엄 코헨, 코헨그룹 대표
028 버웰 B. 벨, 예비역 육군 대장

나는 파주 토박이다
043 황희 정승 21대손
045 기호학파의 본산 파주
046 초등학교 첫 소풍의 추억
047 네 머릿속은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다
048 중학교 입학시험 보는 날
051 우표 수집과 용돈
053 배고팠던 어린 시절
057 미군을 환영했던 더 큰 속셈
059 신문 배달 소년, 리틀 타이거
060 영어 선생님
061 영어웅변대회와 담대한 준비
065 무작정 가출, 누나의 지성에 마음 돌리다
067 내 친구 이재욱

개천에서 용 나다
073 황진이가 누구냐
076 사관생도 황진하
079 첫 번째 시련, 아버지 돌아가시다
082 포병은 나의 운명
084 화랑대 문을 나서다
086 054 OP 관측장교
089 포탄은 3발뿐
090 가위바위보에 좌우된 운명, 학군단 교관
092 자랑스런 동기생, 감동적인 형제애
094 최세인 장군의 전속부관이 되다
095 부서진 독일제 면도기를 수리하다
098 야전군 사령관 전속부관
098 헬기 비행 450시간의 기록
100 군견훈련소가 똥개훈련소냐?
101 포대장 부임과 군사령관의 사랑
104 전군 지휘성공사례 발표회를 석권하다
108 Why not the Best?

열정의 시기
113 1사단 비서실장
116 사단장님, 헬기 마음대로 쓰세요
117 결혼식과 제3땅굴
121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123 미군의 리더십 교육
129 군 생활의 꽃, 대대장 시절
130 지휘소 당번 교대근무
131 대대 총력의 문예작품 출품
134 미국 대통령 경호계획, 최초의 포병 투입
137 립시 사령관과 작전통제권
139 한미연합사령부는 정박 중인 항공모함
141 주한미군의 세 얼굴
143 86 아시안게임
145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의사
145 충효예 교육

격랑 속의 사건들
153 국군보안사령관 수석부관
155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57 12·12 사건의 현장에서
160 CIA 한국지부장의 전화
162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와의 면담
164 연합사령관 위컴 장군 면담
165 동기생 김오랑 소령
167 두 번의 전역 명령
170 전두환 장군

야전에서 군사외교로
175 합참군사협력과장, 야전에서 군사외교로
175 첫 번째 군사외교 협상, 넌-워너법
180 818계획과 해병대의 운명
181 제1차 걸프전, 사막의 방패, 사막의 폭풍 작전
181 의료지원단 파견
183 선발대 인솔, 일등병을 전세기 일등석에
185 눈물 젖은 방독면 전달식
186 우수한 한국 의료지원단
188 의료지원단에 대한 질투
190 군사협력과 시절 고생, 보람, 자부심의 시간들
192 미친개에 물린 군인 가족들
197 로버트 김 사건, 나를 워싱턴으로 호출하다
198 미국 정보본부장과의 껄끄러운 첫 대면
199 임기제로 맡지 못한 국방무관단장직
203 9·11 테러를 워싱턴에서 보다
207 한미 정보교류관계를 격상시키다
212 6·25 전쟁 50주년 기념행사
215 한국전 참전기념메달의 애환
218 백선엽 장군
221 IMF와 군사외교
222 워싱턴 군사외교의 주역들

한국 최초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관
227 운명과의 만남 사이프러스
228 국방부장관의 전화
233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234 첫 도전의 실패
237 드디어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관이 되다
240 3S, 3무(無)의 섬 사이프러스
243 영국 자치지구, SBA
244 사이프러스 유엔 평화유지군
248 각양각색의 연합부대, 특성도 각양각색
252 코피 아난 플랜의 추진
253 국경선을 개방하다
254 아르소스-필라 사건
261 메달 퍼레이드
262 반(反) 사냥작전, AHO
262 사령관 명중률 96%
263 비바! 포스 커맨더!
264 임진부대의 유래
268 북사이프러스의 6·25 참전용사
271 2002 월드컵 축구
272 완충지대에 버려진 개들
274 트루도스 산
275 궁색했던 군사외교, 꽉 막혔던 국방부
279 사이프러스여, 평화로워라!
280 39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다

외교·안보 전문가로 국회에 입성하다
285 대사직은 고사하겠습니다
286 어머니
287 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비례대표
289 이라크 파병
291 자랑스러운 나의 아이들
295 제2정책조정위원장
296 북한의 1차 핵실험과 대포동 미사일 발사
297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반대 국회 내 활동 주도
306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반대 1,000만 명 서명운동
307 국가안전보장회의
308 박근혜 후보 지원

고향에 돌아오다
317 지역구 의원이 되기까지
320 고향 파주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325 장군이 어떻게 쇠고기대책단장으로 왔소
333 한미 FTA 비준안 처리와 폭력 국회
337 독도 영유권 표기 원상복귀
340 아, 천안함!
343 전작권 전환 일자, 마침내 연기되다
347 연평도 포격사건과 보온병 사건
351 연평도 해병 전사자의 명복을 빌며
353 프놈펜 선언
358 유승앙브와즈 노인복지주택 문제 해결
359 운정3지구를 살려라!
365 이화여대의 파주캠퍼스 포기

황진하의 파주 비전
371 파주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미래다
373 통일 준비, 이렇게 하자
376 한반도와 주변정세
376 좀 더 포괄적인 한미 동맹관계
377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378 중국의 긍정적 역할 확대
380 새로운 한러관계 발전을 위하여
381 정치 현실을 고민한다
382 국회 언제까지 싸울 것인가
384 국민의 신뢰 회복은 어떻게
386 민주주의 탈을 쓴 폭력의 정당화는 안 돼
387 안철수 현상 분석
388 새로운 인물을 찾자
389 현명한 복지를 생각한다
391 평화 도시 파주를 위하여
397 파주의 꿈, 대한민국의 꿈

저자소개

황진하 (옮긴이)    정보 더보기
1946년 파주에서 출생하여 마정초등학교(7회), 문산북중학교(1회), 문산고등학교(2회), 육군사관학교(25기), 미국 센트럴미시간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경남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미국 RAND연구소 객원연구원, 주미 한국대사관 국방무관을 지냈으며, 한국인 최초로 유엔평화유지군 사령관이 되어 사이프러스 평화 유지를 위해 일했다. 17대 국회에서 국방위원회 간사, 18대 국회에서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 정보위원회 간사, 한국·슬로바키아 의원친선협회 회장, 동북아평화안보포럼 대표의원, 아시아정당국제회의(ICAPP) 의원연맹 회장을 맡고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황희 정승 21대손

나는 파주 본토박이다. 1946년 8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20번지에서 평생교육자로 살아온 아버지 황인적과 어머니 윤한영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장수이고 방촌 황희 정승 21대손이다.

자유로를 따라 임진각을 가다 보면 황희 정승이 낙향하여 지낸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 변에 있다. ‘갈매기를 벗 삼아 지낸다’라는 뜻을 가진 반구정으로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내가 태어났다. 장수 황씨 문중이 황희 정승 전대부터 파주에 자리 잡았으니 줄잡아도 700년가량 대대손손 살아온 셈이다.

어머니는 나를 가진 후 호랑이 꿈을 꾸었다. 어느 날, 장독대에서 일하는데 호랑이 새끼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다가오는 새끼 호랑이가 마냥 귀여워 품에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가진 직후에 꾼 꿈이어서 어머니는 태몽이라 여겼고, 너무도 생생한 꿈이기에 아들이 태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는 이 꿈이 상서로워서 태교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내가 3성 장군을 거쳐 정치인이 된 것도 어찌 보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고팠던 어린 시절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가족은 강 건너 김포로 피난을 갔는데, 피난길에 내가 도통 걸으려 하지 않아서 어머니, 아버지가 교대로 업어야 했다고 한다. 누나는 지금도 내가 부모님 등에 찰싹 붙어 다닌 이야기를 한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은 희미하다. 하지만 피난살이 중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너무 배가 고파 힘없이 축 늘어져 지내야 했던 것과 돼지우리 같은 움막에서 웅크리고 추위에 떨던 일이다. 3년간의 긴 전쟁이었으니 내 또래의 어린 시절은 무척 고달팠다. 분단 접경지역에서 태어난 탓에 전쟁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내 어린 시절은 항상 추운 겨울과 같이 을씨년스러웠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우리 가족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가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용미초등학교의 전신인 용미분교의 교장을 맡게 되면서 우리는 금촌이나 문산이 아닌 광탄면 용미리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용미리가 금촌과 가까운 거리지만 그 시절에는 아득한 거리였다. 외딴곳에 뚝 떨어진 것 같은 막막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평온을 되찾고 있던 다른 지역과 달리 파주는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휴전을 앞두고 남북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격전을 벌이느라, 파주가 격전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우리는 교사(校舍)도 없이 바람을 맞으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공부해야 했다. 얼마 후에는 봉일천에 주둔한 미군들이 와서 설치한 군용텐트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대궐이 부럽지 않았고 미군들이 정말 고마웠다.
나는 누나와 동생들만 있어서 형이 있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집안에 형이 있는 아이들은 소나무로 만든 바퀴가 달린 나무썰매를 타고 비탈길을 쌩 하고 내려오는데 나는 구경만 해야 했다. 한 번이라도 썰매를 얻어 타려고 조바심내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아버지에게 만들어 달라고 졸라도 봤지만, 학교 일에 바쁜 아버지는 그걸 만들어줄 짬이 없었다. 형이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고 형이 없는 게 분하고 원통하기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 또래 어린이들의 일상 중 하나는 방과 후에 산으로 땔감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산에 나무가 썩어나가지만 당시에는 나무 한 다발 하려면 몇 시간씩 헤매야 했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고 까치집만 한 나무 다발을 지게에 지고 돌아오면서 밥값을 했다는 뿌듯한 마음에 한달음에 집으로 왔다. 젊은 세대에게는 석기시대 얘기 같겠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그것이 일상생활이었다.
또한 그 시절은 하루하루 먹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지금이야 수제비가 별미지만 당시의 곡식이 떨어진 춘궁기에는 배급받은 밀가루조차 양이 적어, 새로 돋아난 쑥을 잔뜩 넣어 수제비를 만들어 먹곤 했다. 한 양재기의 쑥 수제비 안에는 고작 대여섯 개의 수제비가 들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쑥이었다. 나는 맛없는 쑥부터 먹고 맛있는 수제비를 먹는 게 순서였고 습관이었는데, 내 동생은 수제비부터 먹고 다른 사람의 수제비를 들여다보며 욕심을 내곤 했다. 나는 싫지만 수제비 한두 개를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땐 왜 그렇게 동생이 미웠는지 모른다.
한창 클 때라 돌아서면 배가 고픈 우리는 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속살의 달콤한 물기를 훑어 먹으면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그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배고프고 굶주렸던 시절이었다. 이른 봄에는 진달래를, 초여름에는 아카시아 꽃이 먹을거리였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먹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몸속에는 기생충이 늘 우글거렸다.


영어웅변대회와 담대한 준비

고등학교 2학년 때, 봉일천에 주둔하고 있던 미1기갑사단 사령부에서 주최하는 경기도내 고등학생 대항 영어웅변대회가 열렸다. 평소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웅변대회에 출전하기로 마음먹고, 영어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다. 김원진 선생님이 해병대에 입대한 이후에 새로 온 영어 선생님은 3학년이 아닌 2학년 학생이 왜 나서느냐며 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영어에 자신도 있고, 오랫동안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왔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화가 난 나는 선생님 도움 없이 스스로 대회 준비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 할지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미군 부대에 찾아가서 도움을 받아보자고 생각했다. 지금의 통일공원 자리에 미군 포병대대가 있었는데, 그곳이 문산에서 제일 가까운 미군 부대였다. 나는 무턱대고 그곳 위병소에 찾아가서 미군 장교 한 명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보초를 서는 사람은 주로 한국인 경비원이었는데 대부분 우리 동네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들이 누구를 소개해 줄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부대에 들어가거나 나오는 차량을 붙잡아 세워 영어를 배우러 왔다면서 가르쳐줄 수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모두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부대로 복귀하는 대대장 차량을 만나게 되었다. 무슨 일이냐 묻기에 영어를 가르쳐줄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대장은 사무실로 들어갔고, 잠시 후 대대장실에서 나를 들여보내라는 명령이 초소에 떨어졌다.
오로지 영어웅변대회에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겁도 없이 성큼성큼 부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만난 대대장은 내게 상세한 사정을 물어봤다. 설명을 들은 대대장은 나를 가상히 여겨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대대장이 어딘가로 전화하자 잠시 후 미군 중위 두 명이 대대장실로 들어왔다. 대대장으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받고 두 사람은 무언가를 의논하였다. 그러더니 그중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자신은 로버트슨 중위라고 소개하며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한 달여를 매일같이 미군 부대를 찾아가 로버트슨 중위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는 내가 쓴 문장을 고쳐주고 발음도 교정해 주었다. 손동작이나 몸동작은 물론 웅변에서 중요한 시간 배분 연습까지 도와주었다. 시간이 남거나 부족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도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학교 선생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영어 선생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철저히 숨겼다.
드디어 대회 날이 되었다. 대회장에 가기 전에 예행연습을 했는데 로버트슨 중위가 잘했다고 칭찬했다. 로버트슨 중위의 헌신적인 지도로 내 영어 실력이 한 달 만에 괄목상대하게 발전한 것이다. 영어 선생님도 많이 놀랐는지 내게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나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아서 학교와 집에서 죽어라 연습했다고 말했다.
준비를 마치고 대회가 열리는 파주여상으로 향했다. 행사장에는 문산농고, 율곡고 등 파주에서만이 아니라, 동두천, 인천, 수원 등 쟁쟁한 학교에서 온 17, 8명의 발표자와 응원을 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드디어 출전한 연사들이 모여 발표 순서를 정하는 순서 뽑기 추첨을 했다. 나는 7번을 뽑았다. 행운의 숫자를 뽑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나와 함께 갔던 3학년 선배 두 명은 각각 4번과 11번을 뽑았다. 선생님은 내 손에 있는 7번 쪽지를 달라고 하더니 대신 4번 쪽지를 건네줬다. 그리고 올해는 선배에게 양보하고 내년의 기회를 보라고 했다. 나는 선배들만 챙기는 선생님의 처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섭섭함을 넘어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순서가 앞당겨졌기에 더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발표 시간은 7분씩이었다. 나는 준비한 대로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긴장이 되어서 원고를 외운 대로 발표했는데 몇 분이 지나자 탁자에 놓인 시계바늘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심사가 끝나고 순위 발표가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아무리 미국 사람한테 직접 배웠다고 해도 시골 학교 학생에 불과했고, 워낙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참가했기 때문에 입상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3위에 이어 2위를 발표하는데도 내 이름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지만 입상은 못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최우수상 발표에 “황진하”라고 내 이름이 불렸다. 대회에 출전한 일류학교 아이들 때문에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내 어깨가 쫙 펼쳐지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수상 소감을 얘기하면서 영어를 배우게 된 계기를 준 아버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행사장에 와 있던 아버지는 기분이 무척 좋았는지 그날 얼큰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표창과 함께 부상으로 커다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받았다.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라디오가 공부에 방해된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라디오를 없애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기에 반대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라디오를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하는 며칠 사이에 집에 도둑이 들어 라디오를 훔쳐가 버렸다. 아버지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일이라며 오히려 기뻐하셨다. 상을 탄 게 중요하지 라디오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면서 말이다. 나는 아버지 말씀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보통 라디오가 아니라 내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성심을 다해 영어를 가르쳐준 로버트슨 중위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