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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2008년 촛불항쟁, 개정증보판)

박석삼 (지은이)
타흐리르
20,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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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2008년 촛불항쟁, 개정증보판)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 ISBN : 9788996816461
· 쪽수 : 412쪽
· 출판일 : 2020-10-19

목차

제1부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제1장 항쟁의 전개과정
들어가며
촛불 전야
제1기 촛불의 확산과 성장기
제2기 소강과 대치기
제3기 항쟁의 휴식에 이은 고립과 쇠퇴기
제2장 항쟁 속의 쟁점들
심판인가? 퇴진인가? 타도인가?
촛불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순수와 비폭력론의 고찰
스티로폼 논쟁과 6월 10일의 의미
6월 25일~6월 29일 탄압과 대치의 시기와 6월 30일 미사의 의미
7월 5일의 희극들
깃발회의
배반의 날 8월 15일
항쟁의 고양과 쇠퇴―비폭력 축제론의 허구
촛불과 대책회의의 불행한 만남
운동의 질곡과 한계들
제3장 항쟁의 본질과 특수성
국민을 배반한 정권에 대한 항쟁
억압당하고 왜곡당한 반신자유주의 투쟁
신자유주의 경찰독재체제 하에서의 미발달한 낮은 단계의 투쟁
정당성에 대한 집착과 반신자유주의 의제의 유실
항쟁의 비교를 통해 본 특수성
촛불폐인: 끈질김과 자기실현
여성과 청소년
네티즌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개인우선주의와 집단주의
지성론 고찰
자발성과 의식성
사이버 공간과 아고라–헤게모니의 장
제4장 촛불 주체론
들어가며
촛불의 슬로건과 실천들
대선과 총선 자료로 본 촛불
통계자료로 본 촛불
민중인가? 다중인가?
실증조사로 본 청소년 연구의 함의
제5장 맺는말
제2부 촛불 속에서
촛불 속에서
제3부 부록
보론 1: 다중 물신론 비판
보론 2: 투쟁의 미학–2008년 촛불과 2016년 촛불의 차이
발표글 모음
참고자료
촛불일지
참고문헌

저자소개

박석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55년 빛고을 광주에서 태어났다. 윤한봉과 이강의 사랑을 받았고, 박기순 등과 함께 학생운동과 야학운동에 관여했다. 1978년 함평고구마투쟁에 앞장섰고,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수배되었다. 김남주, 박석률과 함께 도피생활을 하다가 1979년 11월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고, 1988년 12월 출소하였다. 1995년 보안관찰취소청구소송을 내어 승소판례를 만들었고, 김대중 정권 때 복권되었다. 주로 좌파 정치조직에서 활동했고, 2008년 촛불항쟁 때는 촛불연행자모임에서 서른즈음에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진보전략회의 대표를 지냈고, 현재는 국제포럼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동안 국제 계급투쟁과 유럽 좌파당 운동을 천착해왔고, 한신대에서 석사, 경상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와 논문에는 《2008년 촛불항쟁-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 《2011년 아랍민중혁명-튀니지, 이집트, 리비아를 중심으로》, 《당운동 접근법과 경쟁관계 접근법을 통해 본 현시기 유럽 좌파당》, 「네그리와 자율주의 비판」, 「기본소득을 둘러싼 쟁점과 비판」, 「다중물신론 비판」, 「그리스 경제위기와 투쟁을 둘러싼 쟁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쟁점에 관한 역사적 고찰」, 「급진좌파당 운동의 성립계기와 특질」, 「현시기 좌파의 전략 모델과 통합당 모델의 특수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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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개정증보판을 펴내며
2008년 촛불항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2016년 11월에 시작된 촛불 국민행동이 있었고, 정권이 바뀌었고, 태극기 부대를 비롯한 극우가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혹자는 2016년 촛불을 혁명으로 부르면서 촛불시민의 위대한 승리로 묘사한다. 그런데 2016년 촛불 이후는 이전과 비교하여 대중의 삶이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극우만 더 극성스러워졌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2016년의 촛불은 광장에서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소비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판사님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였고 대상이었다. 그곳엔 엄동설한에도 모여서 힘을 보여주자는 시민단체라는 목자에게 이끌린 순한 양들이 있었을 뿐 투쟁이 없었다. 투쟁이 없었는데 승리가 있을 수 없다. 대중 혹은 민중의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거대하게 성장한 극우에게 조롱당하는 이 현실은 그것이 혁명이 아니었고, 승리도 아니고, 위대한 시민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를 천착하는 것은 중요하다. 맑스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소극(웃음거리 공연)으로 반복된다고 했다. 역사를 한치도 전진시키지 못한 2016년의 웃음거리는 2008년의 비극 속에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 바로 이 점이 10년 전에 발간된 이 책을 다시 읽고 토론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2008년 촛불항쟁은 1987년에 등장한 민중이 시민이 되는 과정이고, 2016년 촛불은 시민이 국민으로 주조되는 과정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이 개정증보판의 보론에 새롭게 발표하는 ‘투쟁의 미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10년 말 초판이 발행된 이 책은 나의 심장으로 쓴 책이다. 아니 오히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나 계시가 나의 손을 빌어 쓰여진 책이다. 촛불폐인이었던 필자가 촛불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책이었지만 항쟁을 이해하려는 탐구가 이성이 아닌 심장으로 쓰여진 이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민중들이 뜨거운 심장으로 참여한 항쟁은 심장으로밖에 쓸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 개인의 경험주의적 시각이 아니라 항쟁에 참여한 수많은 촛불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쓰여진 책이고, 이 항쟁을 이해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필자와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쓴 책이기도 하다. 즉 이 책은 심장으로 썼지만 항쟁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추구하기 위해 혹은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추구하기 위한 이성의 작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촛불들의 수많은 실천은 물론, 항쟁 속에서 제기된 수많은 실천상의 쟁점 그리고 촛불의 구성과 성격에 관한 논의를 둘러싼 주요한 학술적 논쟁, 항쟁의 배경과 운동사적 의미와 관점까지 포괄적으로 다룬 책이다. 나아가 좌파적 입장에 서 있는 필자의 정치적/사회적 이념과 이상을 관철하려 했던 시도까지 담은 책이다. 이처럼 촛불항쟁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다양한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룬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동안 재판 요구가 많았지만 필자의 게으름으로 늦어졌다. 이 개정증보판은 초판이 나온 후 여러 촛불활동가들과 토론을 통해 제1부 제1장 ‘항쟁의 전개과정’과 제2부 ‘촛불 속에서’에 나오는 여러 촛불과 촛불조직들의 실천에 대한 기록과 평가를 수정/보완하였다. 그리고 제3부 부록에 ‘투쟁의 미학: 2008년 촛불항쟁과 2016년 촛불 국민행동의 차이’를 <보론 2>로 실었다.


[본문요약]

책소개와 주요 내용
2008년 6월 10일 100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섰다. 87년 민주항쟁 후 20년 만에 보는 대중의 거대한 진출이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나고 운동과 생활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항쟁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100만 명이 거리로 나서고도 독재자를 몰아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던가? 왜 이길 수 없었던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

이 책은 촛불은 왜 이길 수 없었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 누가 그토록 대중의 열망을 짓밟았는지, 무엇이 부족했기에 이길 수 없었는지를 밝히려는 노력에서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아고라에 올라온 수많은 글과 촛불을 다룬 수많은 논문과 책을 섭렵하면서, 수많은 견해와 실천에 부딪쳤고, 기왕에 제출된 견해들에 대하여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또한 이 책은 촛불 속에서 나눈 촛불에 대한 필자의 사랑을 담은 글이다.

이 글은 단지 과거지사의 정리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위협당하고 유린당하고 수탈당하는 민중과, 항쟁을 억압했던 대책회의로 나타난 타락한 운동질서, 무기력하기만 했던 변혁세력, 이 모든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맞부딪치고 있는 그 현실이다. 필자는 항쟁의 분석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문제와 과제를 분석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패배한 투쟁의 위로와 예찬이 아니라 비판과 반성이다. 이길 수 없었던 투쟁과 무기력하기만 했던 운동에는 뼈아픈 반성의 과제가 남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을 위대하고 영원하다고 예찬하는 조정환의 ‘촛불/다중 물신론’은 참으로 해롭다. 더구나 그 예찬이 촛불이 승리를 위해서 극복해야 할 부정적인 측면만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101쪽)고 주장한다.

촛불항쟁은 왜 이길 수 없었던가? 제도내 존법주의자들과 투쟁의 관리위원장들은 왜 대중의 열망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가? 조중동이 세뇌시킨 내면화된 억압을 극복하지 못한 채, 순수와 비폭력을 운운하며 운동권과 시민을 구분하려는 조직되지 않은 촛불시민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던가? 의식성의 관철이 존재이유인 변혁세력들은 왜 운동의 질곡을 깨뜨리지 못했던가?

이 책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필자의 성찰이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다. 촛불은 누구인가? 필자는 그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위협당하고 유린당하는 소외된 대중임을 밝히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단지 생산현장에서의 착취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과 문화의 모든 것을 화폐로 소비하게 하는 상품화와 생존경쟁을 강요한다. 즉 현대인은 비단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소비생활 등 삶의 모든 곳에서 소외를 강요당하는 존재이다”(128-129쪽). 항쟁에 앞장섰던 네티즌들이 바로 일상 속에서 소외받고 있는 대중의 다른 모습임을 밝히고 있다.

필자는 촛불항쟁을 국민을 배반한 정권에 대한 항쟁이고, 억압당하고 왜곡당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며, 신자유주의 경찰독재국가에서의 미발달한 낮은 단계의 투쟁으로 규정하면서, 항쟁의 키워드로 여성과 청소년과 탈모던(네티즌과 재기발랄한 투쟁)을 분석하고 있다.

“촛불항쟁의 초기에 나타났던 문화적인 감수성에 가득 찬 투쟁, 애교 섞이고 재기발랄한 투쟁은, 공권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의지할 곳이라곤 도덕적 우위밖에 없는 시민들이 선택하는 저항의 한 방법이다. 물대포에 ‘온수’를 외치고, 전경들에게 ‘오빠 놀아줘’를 외치는 본질은 이런 것이다”라면서, 현대사회의 소외된 대중의 또 다른 모습인 네티즌들이 ‘소속감없고 구속감없는’ 개인으로서 항쟁과 카페에 어떻게 결합하고 실천하였는지,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110쪽).

“촛불을 끌 수 없는 힘은 분노와 정의감만이 아니라 항쟁 속에서 맛본 해방과 희열이 해방된 자아로 나아가는, 즉 이 사회가 강요하는 소외를 극복하는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촛불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평상시의 우리들의 삶이 너무나 소외되어 있어서 일상 속에서는 아무런 기쁨이나 가치를 못 느끼고 오직 촛불들과 함께하는 시간만이 유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대사회가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기실현을 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124쪽).

“현대인이 트윗에 열중하는 것은 바로 그가 지극히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 새로운 인터넷 공간은 소외된 대중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 중요한 특징은 ‘표현(드러냄)의 문화’다”(130쪽).

“촛불항쟁 때 “저 숙제했어요. 칭찬해 주세요!”라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이 또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기반한 표현과 칭찬의 문화다. 바로 이런 문화 때문에도 필자가 현대인들이나 네티즌들을 소외된 대중으로 규정하는 이유이다. 공동체 문화와 공동체에 기반하지 않은 소외된 개인의 문화는 차이가 크다. 표현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이런 문화는 항쟁의 초기 자발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132쪽).

“소외된 대중의 문화로서의 트위터는 현대인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부응하여 즐거움을 주지만 소외는 극복되지 않는다. 촛불항쟁은 공동체 속에서 하나가 되는 해방의 희열을 주었다. 그 희열은 소외를 극복해가는 자기실현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연예인에 대한 잡담으로 일상의 무료함(이것도 소외이다)을 달래던 네티즌들이 미친 소 반대운동을 하면서 희열을 느끼듯, 트위터들도 선거참여 격려나 4대강 반대와 같은 투쟁에 참여할 때 평상시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나 희열을 맛본다. 이것은 자신이 순수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의 정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즐거움이다. 이는 월드컵 응원전에 참여하는 것이나, 인기연예인에 열광하여 적극적인 서포터즈가 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크기 때문에 빠져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즐거움은 소외를 극복하는 해방된 자아나 공동체로 향하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의 놀이문화적 측면은 이처럼 소외된 문화의 대체이면서 연장이기도 하다”(133쪽).

“위키피디아는 소속감 없는 개인들의 가벼운 참여가 축적되어 소중한 집단적인 결실을 맺는다. 네이버 지식iN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것이 촛불항쟁에서 보여진 네티즌들의 자발성을 이해하는 고리가 된다. 그것은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에서의 ‘작은 실천’이 타인이나 공동체나 전체에 유의미한 기여가 된다는 희열감이다. 그 작은 실천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으로 상품화가 강요하는 소외에 대한 대응이다. 네티즌들의 자발성이란 현대인에게 강요되는 소외에 대응하는 자기실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결국 소속감 없고 구속감 없는 개인들이 공동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작은 실천이다. 촛불카페 역시 그 연장에서 구속감 없는 개인들의 작은 의지와 실천이 모인 것이다. 촛불항쟁 혹은 촛불운동 그 자체가 소외된 대중인 네티즌들이 탈권위적이고 개방된 공간에서 고무된 작은 실천들의 연장이고 발전이었다”고 밝히고 있다(143-144쪽).

또한 필자는 그 작은 실천들의 장점만이 아니라 한계 그리고 운동의 과제까지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 온갖 포스트 모더니즘적 잡론에 대하여도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네그리나 조정환이 말하듯 다중지성이나 떼지성이 그토록 위대하다면, 자발적인 시민들에게 투쟁을 맡기고 용산범대위는 만들 필요가 없다. 결국 뭉치지 않아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성이 의식성과 어떻게 조화롭게 통일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154-155쪽).

“네그리주의를 코뮤니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공통이익체주의’라는 외투를 입은, 극단적인 개인우선주의와 이기주의에 찌들은 소부르주아지들의 반동적 요설”(281쪽)로 정의하는 필자는, “촛불은 국민을 배반한 정권이 물러나길 바랐다. 위정자가 잘못되면 그 위정자를 몰아내고, 체제가 민중을 배반하면 체제를 바꿔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혐오하고 국가권력의 장악과 변혁론을 부정하는 자율주의자들, 특히 친미반공주의조차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금융자본이 약탈하는 재화마저도 창조적 부라고 찬양하는 네그리는, 존재하는 국민국가를 부정하면서, 노동자라는 처지의 동일성이나 민중이란 통일성으로 단결하지 말고, 위계적인 민주노총과 같은 낡은 조직도 만들지 말고, 자본의 노예되자는 비정규투쟁도 하지 말고, 촛불도 노동자도 노점상도 비정규직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니까 공통의 이익을 위해 자본가들에게 빌붙어서 보장소득을 나눠주기를 간청하자고 한다. 다중에겐 적대하는 타자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할 대상이 없다. “타이밍이 결정적이다. … 삶정치적 다중의 무한한 노력의 오랜 시기가 지난 후에, 엄청나게 축적된 불만들과 개혁제안들이 어느 시점에선가 강력한 사건에 의해, 급진적인 반란의 요구에 의해 변형될 것임에 틀림없는” 그날을 기다리며, 절대로 뭉치지 말고 ‘중심 없는 투쟁’이나 찬미하면서, 민주노총도 해체하고 네트워크로 뭉쳐서 메신저질이나 하자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며, 네그리주의의 온갖 헛소리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279-280쪽).

“2016년 다시 광장의 촛불집회가 있었다. 11월에 시작되어 다음 해 3월 초까지 이어진 촛불집회는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소비하고, 가끔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들과 억울한 노동자들의 얘기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애초의 구호는 “이게 나라냐”였다. 이 구호 속에는 평범한 국민의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통치자인 박근혜에 대한 불만만이 아니라 경쟁만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민중들의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억압받고 착취받는 민중의 정체성은 100만이 넘는 시민들이 광장을 메웠을 때 묻혀버렸다.
이제 시민단체들은 주류가 되었고 광장의 국민행동이 시민항쟁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민중과 양립할 수 없는 진보를 표방한 탈계급적인 자유주의 세력이었다. 광장의 촛불집회는 투쟁이 아니었다. 시민이 국민이 되어 그 정당성을 판사가 승인해주기를 기다리는 국민 캠페인이었다.
그 결말은 그다지 진보적이지도 않은 자유주의 세력이 성과를 독점했고, 친미적인 신자유주의 체제에 한치의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좌파는 물론 민중적 세력은 전투성을 거세당하면서 파편화되고 주변화되었다. 시민운동은 시민들의 운동이 아니라 시민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시민을 대리하는 운동이다. 시민운동단체에게 시민은 자주적인 존재로 성장하면 안 되는 존재다. 시민을 억제하고 시민을 이끄는 그들은 목자이고, 시민은 그들에게 기생하는 시민운동을 위해 순한 양이 되었다. 2016년 촛불은 목자에게 이끌리는 순한 양들의 훈육장이었다. 민중도 없고 시민도 없고 법과 질서를 신성시하는 국민만 남았다. 즉 2016년 촛불은 시민을 국민으로 주조하였다. 시민의 열망이 아니라 체제에 봉사해왔던 판사님들이 최고의 권력이고 진정한 주권자였다.
시민단체가 촛불시민을 부르주아 사법체제의 관람객으로 혹은 시민을 국민으로 만든 후 권력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그것은 위대한 시민정신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곳에 시민은 있지도 않았다. 하물며 민중의 참여 혹은 민중적 의제는 신중하고 교묘하게 처음부터 억제되었다. 추운 광장에 앉아서 유명가수들의 노래 감상이나 강요당한 그들은 시민단체라는 목자에게 이끌리는 길잃은 순한 양이었다.
민중은커녕 시민의 정체성조차 억제당한 결과는 극우의 등장이었다. 태극기 부대라는 극우는 시민이나 민중이 아니라 국민의 이름으로 다른 국민을 배제하려는 세력이다. 2016년 촛불이 국민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국민의 자격으로 극우가 등장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반동적인 국기인 미국의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나온 배경에 100만 200만, 1,000만 명의 관객을 호객히여 국민으로 만든 퇴진행동에 참여한 시민단체가 있었다”(291-294쪽).

필자는 이외에도 여러 실증조사와 통계를 분석하여 촛불항쟁의 주체를 밝히고 있다. 그 외에 촛불연행자모임 속에서 활동하면서, 촛불카페들(촛불연행자모임, 애국시민촛불연대, 촛불시민연석회의, 안티엠비 등)의 여러 실천들과 고민들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촛불은 결코 다중이 아니었고, 다중이어서는 안 된다는 ‘다중 물신론 비판’외에도, 현단계 한국자본주의의 성격과 투쟁과 변혁운동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필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이 글은 촛불 속에서 나눈 촛불에 대한 필자의 사랑을 담은 글이다. 촛불과 함께한 사랑만이 아니라 못다 한 사랑을 담은 글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수많은 견해와 실천에 부딪쳤고, 기왕에 제출된 견해들에 대하여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그것이 토론의 출발점이 되고 운동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1장 아고라를 비롯한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여 항쟁의 전개과정을 복원했다.

제2장 광장의 민주주의는 작동되었으나 광장의 지성은 작동되지 않은 6.10 스티로폼 논쟁, 6.30. 미사의 의미, 깃발회의의 의미, 대책회의와 촛불시민의 불행한 만남과 운동의 여러 질곡과 대중운동과 변혁운동 그리고 촛불시민들의 한계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제3장 촛불항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자, 대책회의에 의해 억압되고 왜곡되어 본격적 항쟁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을 밝히고 있다. 여학생이 앞장 선 청소년들과 여성 네티즌이 현대의 자본주의하에 소외된 대중이며, 소속감없고 구속감없는 미조직된 촛불들의 여러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장벽론과 문화절대론을 공박한다.

제4장 여러 슬로건과 실천 그리고 각종 통계자료를 분석하면서, 반신자유주의 성격부정론, 반독재 민주대연합론은 물론, 기왕에 제출된 중산층론, 중간계급론, 촛불다중론을 공박하고 있다.
제2부에서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저항조직의 하나인 촛불연행자모임의 실천과 그 실천이 겪었던 고난을 그려내고 있다.

제3부의 <보론 1>에서는 촛불이 다중이고 다중이어야 한다는 자율주의자들의 다중물신론을 해부하고 있다. 또한 <보론 2>에서는 2008년 촛불항쟁이 민중을 시민으로 주조하는 과정이었다면, 2016년 촛불 국민행동은 시민이 국민으로 훈육되는 과정을 지적하고 있다. 그외 필자가 항쟁 속에서 발표한 글들과 대책회의 회의자료 및 여러 촛불조직들의 창립선언문 등 귀중한 자료를 수록하고 있고, 촛불일지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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