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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6984672
· 쪽수 : 244쪽
책 소개
목차
· 민희와 정희
· 바둑이와 영희와 철수처럼
· 희자언니
· 바벨탑
· 염통에 털 난 사내
· 다섯 손가락
· 살읏븐뎌 아으
· 굽은 길모퉁이 저편
· 모여라
작품해설 사랑의 이름과 사람의 자리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가방은 양손에 하나씩 두 개만 들기로 하고, 그 안에 꼭 담 아가고 싶은 거부터 순서대로 적어. 나가면 우선 예쁜 숟가락부터 사고, 밥공기 하나, 국그릇 하나. 아니다. 두 개씩은 있어야겠다. 누구 반가운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밥은 먹여야지….”
은진은 연습장에 늘어나는 물건 목록만큼 희망으로 꽃이 피던 민희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수 있을 것처럼 즐거워하던 민희를, 은진은 또 다음 말로 금방 울리곤 했다.
“그거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 그때까지만 참아. 그냥 참는 게 아니고 꼼꼼하게 준비하고 힘을 기르면서 기다리는 거야.”
(「민희와 정희」)
희자언니는 태곳적부터 거기 살았던 사람처럼 천연덕스레 소파에 엎드려 있다. 종아리를 움직일 때마다 언니의 가슴과 아랫배와 골반뼈를 받치고 있는 낡은 가죽소파가 조금씩 쿨렁거렸다. 오십을 코앞에 둔 아줌마의 다리치고는 생뚱맞을 정도로 뽀얗고 갸름한 종아리다. 게다가 품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자그마한 체구에 긴 머리채를 늘어뜨리고 있다. 밤낮 입고 뒹구는 면 원피스에는 자잘한 꽃무늬까지 박혀 있어서 언뜻 보면 나들이 나온 처녀의 뒷모습이다. 게다가 언니 곁에는 자식이 없다. 그 나이에는 자식얘기를 입에 달고 살기 마련인데 언니 혼자 달랑 소파에 엎드려서 리모컨만 주무르고 있으니 분위기로는 아직도 한참 어린 처녀다.
(「희자언니」)
잘못했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은 겁니다. 합리적인 선이라는 것이, 이쪽과 저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형성되는 것인데, 이쪽에 서서 저쪽을 다녀오지 않으셨습니다. 저쪽을 다녀오는 것, 사람들은 그걸 도리라고도 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도 합니다.
내가 저쪽을 다녀오지 않았다고 누가 그래? 어떻게 알아? 내가 다녀왔다고 말하면 다녀온 거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글쎄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저쪽에서 아는 겁니다. 과정에서의 만남이라고 표현합니다. 선생님은 이 과정에서 고통을 느끼셨는지요? 이쪽에서는 합리적인 선처럼 보여도 저쪽에서는 극한의 선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뭐라는 거야?
그러니까 선생님은 저쪽을 다녀오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염통에 털 난 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