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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7190591
· 쪽수 : 288쪽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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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따지고 보면, 펜의 이동이 그를 사로잡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손에 익은 도구의 부재가 주는 불편 때문이었다. 다른 펜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사라진 펜처럼 그의 손에 맞는 것은 이제껏 없었다. 펜의 무게와 길이, 직경, 재질, 종이에 닿는 감촉, 글자의 굵기 등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는 그런 항목들이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필기구의 조건과 일치할 때만 선택하고자 했다. 둘째는,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던 대상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그에 있어서 펜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 펜은 재킷 안주머니나 가죽제의 필통, 혹은 책상 위에서 2년 동안이나 그와 체온을 나누어 왔다. 반면에, 다른 어느 것과도 그처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펜의 부재가 친구와의 이별 못지않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는 넋을 놓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노란 비누와 두 장의 수건, 때수건의 모습은 여전히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 그가 문을 연 적도, 누가 들어온 적도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순간 그는 또다시 ‘이동’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나아가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리라고 믿은 ‘이동’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문득 허탈감까지 들었다.
그는 또다시 현기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기도 하고 가슴을 두드려 보기도 했으나 증상은 오히려 심해지기만 했다. 마침내 온몸이 터져버릴 듯한 느낌에 욕실에 가만있기가 어려웠다. 그는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 계단을 달려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형수가 어딜 가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정원으로 뛰어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