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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7253258
· 쪽수 : 384쪽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권우가 입술이 찢어져 조금 배어 나온 핏물을 손끝으로 닦아내고는 어이없다는 듯 조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때린 부분이 아직도 얼얼하고 아팠다. 자신이 한 말에 상처를 받은 걸까? 아니면 그 말이 맞아서 자신을 때린 것일까?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더 있단 말인가? 모르겠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밖으로 나오자 다들 이동할 모양인지 왁자지껄해졌다. 중오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야, 클럽 간댄다! 우리 먼저 내려가자!”
“클럽?”
“그래! 모처럼 왔으니 너도 오늘은 밤새 놀자!”
“신혼여행 안 간대?”
“아, 쟤들 신혼여행 못 가.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 그런지 비용을 안 대주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여기 호텔에서 1박 하고 바로 본가로 들어간대.”
“시부모랑 사는 건가?”
“그렇게 되는 모양이야.”
갑자기 숨통이 죄어왔다. 비록 친구라고는 해도 집안 사정까지 속속들이 참견할 자격은 없었다. 외아들, 게다가 늦둥이로 온갖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란 진수가 과연 주하를 여섯 자매와 시부모의 무시무시한 압박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중오가 다른 친구들을 더 소개해주겠다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야, 인마! 네가 그룹 창조 부회장이라고 하니까 지금 다들 네 쪽에 어떻게 연줄 좀 대 보려고 줄 섰어. 가서 알은체나 좀 해줘라!”
중오의 팔에 끌려가면서 주하가 진수와 함께 옷을 갈아입기 위해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탈의실로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이젠 진수의 여자였다. 그가 이렇게 심란해한들 제 것일 수 없는 여자였다. 아직도 그녀에게 맞은 뺨이 생생하게 아팠다.
권우가 호텔 침대에 몸을 내동댕이치듯 누웠다. 기분이 야릇했다. 제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듯 처참한 상실감이 들었다. 그녀가 학교를 그만두고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 과중한 업무와 완벽한 업무처리 능력을 부친에게 검증해야 하던 그로서는 다른 대안 따위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웠다, 지운 줄만 알았는데 지운 게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이 잠시 밀어둔 것뿐이었다. 제 마음 속에서는 갖지 못했던 그녀에 대한 짙은 미련이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내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다른 누군가의 영원한 속박을 받는다 생각하니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권우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제 머리를 싸쥐었다.
‘왜 이래!’
이해되질 않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휘둘렸다. 모든 행동에 논리를 따지고 타당한 이유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않던 자신이 유독 주하에게만은 불합리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지독히 본능적인 끌림이었다. 왜! 따지고 물어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다만 미치도록 갖고 싶었고, 오직 그녀에게만 타들어갈 듯한 열정을 느꼈다.
몸 안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권우가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말고 미니바로 다가가 위스키 병뚜껑을 열고 그대로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이러다 미치지 싶었다. 지금이라도 뛰어 나가 주하의 팔을 잡아당겨 어디든 가자하고 싶었다. 권우가 술을 들이붓다 말고 벽면으로 달려가 주먹을 들이받았다.
“왜 이래! 미쳤어? 왜 이래! 너답지 않아!”
감정이 조절되질 않는다. 이렇게 충동이 조절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어쩐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그녀가 억지로 놓여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인간의 나약한 손등이 벽면에 내리 찍히는 통에 산산이 부서져 내리기라도 하듯 얼얼한 통증이 몰려왔다. 가만히 손등을 바라봤다. 제 심장 꼴처럼 짓이겨져 피범벅이 된 손등이 어이없어 조소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황권우!’
앗아 오고 싶다고, 빼앗고 싶다고, 제 것이어야 한다고…… 미친 개소리를 홀로 늘어놓고 있는 마음 어딘가를 찢고 싶었다. 권우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너무 늦었어.’
미친 짓이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행복해지려고 결혼하려는 여자를 빼앗아 올 수는 없었다.
“하아…….”
숨소리마저 열기로 데워져 그대로 불이 될 것만 같았다. 그는 곧장 아직 놀고 있을 중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어, 뭐야! 자식아! 그렇게 일찌감치 돌아가더니!]
“신혼부부 지금 어느 호텔에 있어?”
[호텔? 내일 아침 비행기로 간다고 하긴 했지. 잠깐…… 어? 그런데 왜?]
“진수한테 줄 게 있어.”
[아아, 잠깐! 야! 걔들 호텔 어디라고 했지? 아아! 거기! 권우야!]
“말해.”
[헤리안 호텔로 갔대. 가서 진수 이름 말하고 물건 맡겨놓으면 될 거야.]
“몇 호인지는 몰라?”
[어떻게 아냐? 이만 끊는다!]
친구들의 왁자한 소리와 함께 노랫소리가 이어졌고, 전화는 금세 끊겼다. 권우는 곧장 차키를 들고 그가 머무는 호텔에서 얼마 멀지 않은 헤리안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에 몸을 실었다. 곧장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진수가 머무는 객실번호를 알아내라 했다. 십여 분도 안 걸려 진수의 호수가 그에게 보고 되었다.
‘2013호…….’
택시에서 내려선 권우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2013호까지 가는 길이 한도 끝도 없는 긴 길처럼 느껴졌다. 걷다 서다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그렇게 당도한 진수의 문 앞에 선 그는 한동안 멍하니 문만 바라봤다. 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이마를 문에 기댔다.
“……진주하…… 여긴 네가 있어야 할 데가 아닌 것 같은데…… 미치겠다!”
두서없는 말들만 머릿속에서 연기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권우는 몸을 돌려 천장을 올려다봤다. 사위가 온통 두 개로 겹쳐 보였고, 심장이 둥당대는 소리 때문에 귓가가 먹먹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문에서 몸을 떼어내고 체념하듯 그렇게 다시 복도를 걸었다.
달칵, 그때 갑자기 등 뒤로 문이 열렸다. 권우는 그대로 석상처럼 얼어붙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설마, 설마 하는 기대감 때문에 온몸이 쪼개지듯 저려왔다. 순간 곁으로 누군가 슥하고 지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만난다면 추악하고 이기적인 제 욕심을 양껏 드러낼 것만 같아서 두려워졌다.
“……권우 씨?”
말도 안 돼. 주하가 가슴팍에 지갑 하나를 품고 서 있었다. 어딜 갈 모양인가 본데, 신부화장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인 데다 머리카락도 풀어내려 청초해 보였다. 권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씁쓸하고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여긴 어떻게?”
“일이…….”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잠시 제가 어떤 목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눈앞에 신랄하게 펼쳐지자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솔직해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무작정 그녀의 팔목을 감아쥐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주하도 그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읽었던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권우는 힘껏 주하를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주하가 냉랭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권우 씨…….”
“너 때문에 왔다.”
약간은 동요감을 담고 있던 흑요석 같은 그녀의 눈동자에 이내 싸늘한 냉기가 휘돌았다. 이런 부분이 그를 안달 나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가오지 말라는 듯 냉엄한 경계를 담고 표독하게 날을 세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여자. 원래 제 것이어야 했던 여자의 눈동자에서는 맹수를 견제하기 위한 본능적인 눈빛만이 담겨 있었다.
“너는, 너는 날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권우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주하를 바라보며 애절하게 물었지만, 주하는 냉정함을 끝끝내 유지했다.
“뭐가요?”
“난 혼란스러워. 너, 그 자리 네 자리 아닌 것 같아.”
순간 그녀의 내부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퍽하고 찢겨지는 듯한 환청을 들은 것만 같았다. 금세 감정 한 올 읽혀지지 않던 주하의 눈동자가 파들파들 흔들리더니 눈가에 습막이 서렸다.
“그런 게 어디 있어?”
갑자기 주하가 입술을 파들파들 떨면서 그를 노려보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 자리는 어딘데? 나 같은 애 자리는 거지들만 모여 사는 폐가야? 왜 다들 날 무시해? 왜 다들 날 인정하려 들지 않아? 당신만 해도 그래. 나를 무시하잖아! 나를! 이 나를!”
주하가 바락바락 소리를 내지르더니 현기증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비틀거렸다. 결혼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던지 똑바로 서 있지를 못했다. 권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부축하자 주하가 심호흡을 한 차례 하더니 신경질적으로 그를 뿌리쳤다.
“날 건들지 마요! 나를…… 그냥 둬요. 이대로 흘러가게 그냥 둬요. 제발…… 부탁해요!”
쩡, 권우의 어떤 무언가가 내부에서 깨졌다. 절절하지만 단호한 그녀의 부탁을 그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시댁에서 결사반대를 하는 힘겨운 결혼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녀의 내부가 이렇게 예민하고 날카로워져 있을 줄은 몰랐다. 주하에게 미움도, 원망도 받고 싶지 않다. 권우는 그저 말없이 그녀를 품 안에 꼭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홀로 두고 호텔을 빠져 나왔다. 까만 밤하늘이 물처럼 주룩주룩 녹아내리는 듯 온몸이 묵직해졌다. 거대한 무언가를 손끝으로 흘려보낸 것 같다. 하지만 이 이상 덤비면 주하가 더 망가질 것 같아 중단하기로 했다.
주하를 위해서…….
‘다음에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빌게. 날 위해서, 내가 미쳐 날뛰는 일이 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