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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인류학/고고학 > 인류학
· ISBN : 9788997620913
· 쪽수 : 688쪽
· 출판일 : 2013-01-31
책 소개
목차
역자서문 4
권두서문 9
저자서문 16
감사의 말 20
서론 본 연구의 주제, 방법 및 범위 29
Chapter 01 쿨라지구의 풍토와 주민 61
Chapter 02 트로브리안드섬의 원주민 91
Chapter 03 쿨라(Kula)의 본질 133
Chapter 04 카누와 항해 163
Chapter 05 와가(WAGA)의 의례(儀禮)적 건조 185
Chapter 06 카누의 진수와 의례적 방문-트로브리안드 제도(諸島)의 부족경제- 212
Chapter 07 먼 바다 원정의 출발 272
Chapter 08 선단(船團)의 무와(Muwa)에서의 최초 정박 287
Chapter 09 피로루(Pilolu)의 내해를 항해하다 302
Chapter 10 난파에 관한 이야기 325
Chapter 11 암프렛트에서-쿨라의 사회학 363
Chapter 12 테와라와 사나로아에서-쿨라의 신화 394
Chapter 13 사루브워이나의 해변에서 448
Chapter 14 도부에서의 쿨라-교환의 기술적 문제 467
Chapter 15 귀향-카로마 조개잡이 486
Chapter 16 도부 주민들의 시나케타로의 답례방문 498
Chapter 17 주술과 쿨라 520
Chapter 18 주술에서의 말의 위력-언어학적 자료 567
Chapter 19 내륙의 쿨라(The Inland Kula) 612
Chapter 20 키리위나와 키타바 사이의 원정 628
Chapter 21 쿨라의 나머지 분파와 지류들 647
Chapter 22 쿨라의 의미 668
찾아보기 681
리뷰
책속에서
서론 본 연구의 주제, 방법 및 범위
I
극히 일부의 예외는 있지만, 이미 멸망한 집단을 포함해서, 남해 제도(South Sea Islands)의 연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숙련된 항해자이자 무역상이다. 그 중 몇몇 집단은 원양 항해용의 멋진 모양의 큰 카누를 만들어 무역을 위한 원정이나 전쟁, 정복을 위한 습격에 출정하기도 했다. 뉴기니의 해안과 주변 섬에 사는 파푸아-멜라네시아인도 예외는 아니다. 대체로 그들은 대담한 뱃사람이고, 근면한 생산자이며 빈틈없는 무역상이다. 토기, 석기, 카누, 질 좋은 바구니, 귀중한 장신구 등 중요한 물건을 제조하는 중심지는 그 주민의 손재주나,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부족적인 전통, 구역(district)이 제공하는 특수한 시설에 따라서 몇 개의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이들 물건은 넓은 지역에 걸쳐 거래되고, 때로는 수백 마일을 여행하기도 한다.
많은 부족들(tribes) 사이에는 일정한 교역 루트를 따라 특정 교환 형식이 확립되어 있다. 부족간의 교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형태는 몰스비 항(Port Moresby, 뉴기니 남동부의 항구)의 모투(Motu)족과 파푸아만에 있는 부족들 사이에서 볼 수 있다. 모투족은 카누에 게의 집게발 모양의 특징 있는 돛을 단 라카토이(lakatoi)라고 불리는 무겁고 커다란 카누를 타고서 몇 백 마일을 항해한다. 그들이 파푸아만의 연안에 운반하는 산물은 토기와 조개장신구이고, 옛날에는 그것에 돌도끼가 더해졌다. 이 교환에서 사고(sago)야자 열매나 무거운 통나무배를 입수한다. 모투족은 나중에 이 통나무배를 이용하여 라카토이 카누를 만든다.
뉴기니 남해안에서 동쪽으로 더 가보면 마이루(Mailu)족이라는 근면한 해양민이 살고, 매년 원정대에 의한 교역을 하면서 뉴기니 동단(東端)과 중앙 해안 여러 부족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뉴기니 본토(本土) 동단 주위에 흩어져 있는 원주민들은 서로 끊임없이 교역을 행한다. 셀리그만(Seligman) 교수의 저서에는 이 문제, 특히 남부 맛심(Massim)족이 사는 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근거리 교역 루트가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상당히 복잡하고 광범위하며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교역 관계를 동단에 가까운 섬들뿐만 아니라, 루이지아드섬(Louisiades), 우드라크섬(Woodlark), 트로브리안드제도(Trobriand Archipelago), 당트르카스토제도(d'Entrecasteaux group)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뉴기니 본토에 깊숙이 파고들어 로셀섬(Rossel Island)이나 뉴기니 남북 해안의 몇 부분에 간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교역 조직이 ‘쿨라’(Kula)이며, 이 책에서 기술하려는 주제가 되는바, 이것이 대단한 이론적 중요성을 가진 경제 현상이라는 것을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쿨라는 그것이 행해지는 범위 안에 사는 원주민의 부족 생활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그 중요성은 부족인들 자신에게도 확실히 인식되어 그들의 관념, 야심, 욕망, 허영 등이 쿨라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II
쿨라의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민족지학의 자료(ethnographic material)를 수집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을 기술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학문 분야이든지 학술적 연구의 결과는 조금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물리학 혹은 화학의 실험적 연구라면 실험 방법의 자세한 설명, 사용된 기구, 관찰 방법 그 횟수, 그것에 소비한 시간, 측정 근사치 등에 관한 정확한 기재 없이는 그 결과가 유용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물리학, 화학 같은 정밀과학이 아닌, 생물학이나 지질학 같은 학문에서는 그것을 똑같은 엄밀성을 가지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떠한 연구자라도 실험 또는 관찰이 이루어졌던 모든 조건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민족지(학)(Ethnography)에서는 그와 같은 데이터의 솔직한 설명이 어쩌면 더욱더 필요하다 말 할 수 있는데 아직까지는 불행하게도 항상 충분히 지면을 할애하여 그 설명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많은 보고자들은 사실의 퇴적 속으로 헤치고 들어가 암흑 속에서 그것들을 꺼내 보이려 할 때에, 조직적인 성실함을 가지고 자신이 한 방법을 분명히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세평이 좋고 과학적으로 보증된 연구이면서도 과장된 일반화를 독자에게 보이며, 게다가 저자가 어떠한 실지 경험에서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가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예를 인용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관찰을 하고, 정보를 수집한 시기의 상황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한 특별한 장(章)은 고사하고 한 단락도 없는 경우도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그와 같은 기재가 있는 민족지학적 자료만이 진정한 학문적 가치를 가진 것이며,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직접적인 관찰 결과 및 원주민에 의한 진술을 저자의 상식이나 심리학적 통찰에 근거한 추측과 구별하여 그 둘 사이에 명료한 선을 그을 수 있다. 정말로, 뒤에 나온 표(이 장의 6절)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은 조사가 이제부터는 이루어져야 하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사실을 어느 정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지를 독자는 한눈에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어떤 상황 아래서 원주민으로부터 자료가 얻어졌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또 역사학에 있어서는 만약 학자가 자료의 출처를 신비의 베일에 숨긴 채 마치 직감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과거의 일들을 말한다면 아무도 진심으로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민족지(학)에서 저자는 기록자이며 동시에 역사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 그에게 자료는 확실히 간단하게 손에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매우 얻기 어렵고, 복잡한 것이다. 즉 그것은 고정된 구체적인 문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인간의 행동과 기억 속에 있는 것이다. 민족지(학)에서는 정보라고 하는 살아 있는 재료와―이것은 연구자 자신의 관찰, 원주민의 진술, 부족 생활의 여러 가지 형태에서 얻어진다―연구 성과의 권위 있는 최종 발표 사이에는 대단한 간격이 있다. 민족지학자(Ethnographer)는 원주민의 해변에 발을 들여놓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하려고 노력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결과를 정리하여 문장으로 글을 지어 끝마칠 때까지 몇 년이고 애를 써서 그 간격을 좁혀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 자신이 경험한 민족지학자의 고난을 대강 쓰는 것만으로도 어떤 추상적인 이론보다, 그 문제에 많은 조명을 비추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III
당신이 갑작스레, 원주민 마을이 가까운 열대의 해변에 내버려져 짐 속에 혼자만 서 있다고 상상해 보기 바란다. 당신을 태우고 온 작은 배는 이미 떠나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웃 백인 상인이나 선교사들 사이에 주거를 정하고 난 뒤, 곧 민족지학적 조사를 시작하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더욱이 당신이 경험이 없는 초보자이고 안내자도 없고, 돕는 사람도 없다고 상상해 보자. 백인은 자주 부재중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위해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던가, 도와줄 마음이 없다고 하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뉴기니의 남해안에서 야외 조사에 착수했을 때의 나의 상황은 꼭 이와 같았다. 처음 몇 주간인가 마을들을 찾아 돌아다녔던 오랜 기간의 일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원주민을 진실로 대하고, 자료를 손에 넣으려고 몇 번이나 집요하게 노력해 보았지만 헛수고가 되었을 때의 절망감이 생각난다. 그것은 낙담의 시기였다. 열대의 무료함과 우울 속에서, 인간이 술에 빠지는 것처럼 나는 소설에 묻혀 지냈다.
그러면 백인 안내자와 함께 또는 혼자서 마을 안에 처음 들어갔다고 상상해 보자. 몇 사람인가의 원주민이 당신을 둘러싼다. 특히, 담배 냄새를 맡았을 때는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거드름 피우는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앉아 있기만 할 것이다. 당신이 동행한 백인은 원주민을 대하는데도 상투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당신이 민족지학자로서 원주민을 대할 때 취해야 할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다지 그런 일에 관심도 갖지 않는다. 이 첫 번째 방문으로 당신은 만약 혼자서 이곳에 다시 한번 더 온다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나의 희망은 그러한 것이었다.
나는 얼마 안 있어 그 지역을 다시 방문했고 내 주위에는 곧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양쪽 방향에서 피지식 영어(pidgin-English)로 간단한 인사를 하고 담배를 조금 주면, 상호 우호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일에 착수 하려고 했다. 우선 의문이 생기지 않는 문제부터 시작하려고, 기술(technology, 技術)에 관한 것부터 정리하는 일을 했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고 있는 원주민이 몇 명 있었다. 그 작업을 보고 도구의 이름을 알기는 쉬웠고, 제작 방법의 기술적 표현을 알아듣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부터가 어려웠다. 확실히 말하건대 피지식 영어는 관념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한 도구였기 때문에 질문을 생각해 내고, 답을 이해하는 훈련이 가능해 질 때까지는 이런 말로 원주민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감정을 가졌다. 처음에는 나도 그들과 상세하고 명료한 회화를 주고받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했다. 이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구체적인 데이터를 모으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을 인구조사를 하고 계보를 적어 두고 지도를 그리고 친족 명칭을 모았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을 원주민이 어떻게 해석할까도 확실히 알지 못했고, 부족 생활의 요령이라 할 수 있을만한 것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모았던 자료는 그들의 심성이나 행동에 관하여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못하고 결국 죽은 재료 밖에 되지 못했다. 종교, 주술에 관한 그들의 관념, 요술과 신령에 대한 신앙에 관해서는 전승의 피상적인 내용, 그것도 피지식 영어로 무리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혼란한 내용 외에는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 지역에 사는 백인 거주자들에게서 얻은 정보는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었지만, 나의 연구에 관련해 말한다면,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몇 년이나 이곳에 살며 끊임없이 원주민을 관찰하고, 그들과 교섭하는 기회를 항상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원주민에 대해는 무엇 하나 정말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드물었다. 그 때문에 나는 수개월 아니 1년이 지나도록 어떻게 그들의 지식을 따라잡고 앞지를 수 있을까하는 희망도 갖지 않았다. 게다가, 나에게 원주민의 이야기를 하고 의견을 말 해 주는 백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일관성 있게 정확히 말하는 것에 익숙해 있지 않았고 지적 훈련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행정관이고, 선교사이며, 상인이어서 보통 일상인들이 갖기 쉬운 추측과 편견에 가득 차 있었다. 이는 사물의 객관적, 과학적인 견해를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심히 불쾌한 것이었다. 민족지학자에 있어서 중대한 사항을 자기만족적인 경솔함으로 다루는 버릇, 민족지학자에게는 학술적 보물인 원주민의 문화적, 심리적 특징이나 개성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수준이 낮은 아마추어가 쓴 기록들에서 잘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을 나는 대다수의 백인 거류민의 말속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실제로 남해안(the South coast)에서 내가 처음으로 민족지학적 조사를 시도했을 때, 일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그 지역에서 내가 혼자가 되고나서부터였다. 그리고 어쨌든 효과적인 현지조사를 하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가를 나는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민족지학자가 원주민의 본래의 마음, 부족 생활의 본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마술이란 무엇일까? 당연한 일이지만, 성공은 많은 상식적 규칙과, 잘 이해하고 있는 학문의 원리를, 조직적으로 인내를 갖고 응용하는 것에 의해서만 얻어지며, 노력도 하지 않고, 고난도 없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 기적적인 지름길을 발견하여 성공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방법의 원리는 세 가지의 중요한 항목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물론 연구자가 갖는 진정한 학문적인 목적이 뚜렷해야하고, 그는 또한 근대 민족지학의 가치와 기준을 알아야 한다. 두 번째는 일을 위한 적합한 환경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요컨대, 가능한 한 백인과 함께 생활하지 말고, 원주민들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증거를 수집해 정리ㆍ처리하고, 결정하는 많은 전문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지조사의 토대가 되는 이 세 가지 원리에 대하여 약간 더 진술할 필요가 있지만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두 번째 원리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IV
민족지학적 조사에 적합한 조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주로 백인의 세계에서 자신을 분리해 원주민과 가능한 한 접촉하는 것이고 그들 부족 안에서 캠프를 차리는 것에 의해 달성된다. 백인의 저택 안에 식료 비품을 놓아두고, 병이 났을 때나 원주민에게 싫증이 났을 때 도망칠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집은 정해진 시간에 그곳에서 단지 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나갔다 오는 항구적인 환경이 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기분 전환을 위해 언제라도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서는 안 된다. 원주민은 백인에게 자연스런 동료가 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떻게 밭일을 하는가를 조사하고, 민간전승에 관해 알고 싶은 여러 가지 항목을 듣고, 그들의 풍습에 관해 의논을 하는 등, 몇 시간이나 원주민의 사는 곳에서 일을 한 뒤, 우리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감정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백인들에게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혼자서 마을에 있게 된다면―1시간 정도 그곳에서 고독한 산보를 나갔다가 캠프에 돌아오면, 당연히 원주민이 있는 곳으로 나가고 싶은 기분이 고개를 들것이다. 이때는 어떤 동료라도 좋으니까 고독감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스런 교제에 의해 원주민을 알게 된다. 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열의 없는 원주민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도 그들의 관습이나 신앙에 대해 아는 데는 그 편이 훨씬 낫다.
원주민이 있는 곳에 이따금 얼굴을 내미는 것과 그들과 정말로 교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정말로 교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족지학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것은 이러한 것이다. 마을에서의 생활은 처음에는 어쩐지 신기하고 때로는 유쾌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또 때로는 매우 재미있는 일도 있는, 일종의 생소한 체험이지만, 그것이 얼마간 지나는 동안에 환경과의 위화감이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간다.
오마라카나(Omarakana, 트로브리안드 제도 키리위나지구의 한 마을)에 주거를 정하고 곧 나는 마을 생활에, 어떤 의미에서는 ‘참여’하게 되었다. 축제와 같은 중요한 행사를 기다리고, 소문이나 마을의 작은 일에 개인적인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매일 눈을 뜨면, 아침은 나에게 있어서 원주민이 느끼는 것과 거의 같은 정도의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모기장에서 기어 나와서 내 주변에 있는 마을의 생활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 시간이나 계절에 따라 하루의 일이 이미 진척 되 있는 적도 있었다. 일이 바빠짐에 따라서 기상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빨라지기도 하고 늦어지기도 했다. 마을 안으로 아침 산책을 나가면 가족생활, 화장, 요리, 식사 등의 낯익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일을 보러 나가거나 한 무리의 남녀가 어떤 물건을 만드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하루일의 순서를 알게 되었다(사진 III을 볼 것). 싸움, 농담, 가족생활의 광경, 통상적으로 사소한 일들, 그리고 때로는 극적인 일도 있었지만, 일상적으로 항상 중요한 일들이, 그들의 생활이자, 또한 나의 생활의 일과처럼 되었다. 원주민은 나를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고 있는 동안에 나의 존재에 흥미를 가지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의식하기도 하다가 결국은 그렇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미개사회에 이방인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에 언제나 생기는 일이지만, 나 자신이 내가 연구를 하려고 하는 부족 생활에 혼란을 가져오는 요소가 되는 우려가 사라져 간 사실은, 특별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원주민들은 내가 어떤 일이든지―예의 바른 원주민이라면 그런 것을 하리라고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에까지―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게 됨에 따라, 마지막에는 나를 그들의 생활의 일부이며, 담배를 주기 때문에 별수 없이 받아들이는 하나의 필요악, 바꿔 말하면, 한 사람의 귀찮은 녀석으로 간주하게 되어버렸다.
얼마 뒤에는 낮에 일어난 일이라면, 뭐라도 손바닥 보듯이 알 수 있고, 내 관찰을 벗어나는 것은 생길 수 없게 되었다. 황혼녘에 주술사(sorcerer)가 온다고 하는 예고(豫告), 마을 안에서의 하나 둘의 중대한 큰 싸움이나 불화, 병, 치료의 시도와 죽음, 주술 의례 등, 이러한 모든 것이 내가 의도적으로 쫓아다니며 파악하고 알아야 할 사안들인데,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말하자면,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사진 IV를 볼 것). 또한 무엇인가 극적인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면 확실히 그것이 일어난 순간에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원주민은 바로 그 순간에 강한 관심을 나타내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고,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이다. 또한, 몇 번씩이나 나는 그들의 에티켓을 위반했는데, 나와 친한 원주민이 즉시 그것을 지적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를 싫더라도 알게 되었고, 예의범절의 좋고 나쁨에 대한 원주민의 감각을 어느 정도 몸에 익히게 되었다. 이런 일 덕택에, 또한 그들과의 교제를 즐기고, 게임이나 오락에 참가할 수 있었던 덕분에 나는 원주민과 정말로 접촉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현지조사에 성공하기 위한 예비적 조건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V
그러나 민족지학자는 그물을 적당한 장소에 치고, 걸려드는 어획물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될 수 없다. 그는 활발한 사냥꾼으로서,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장소에서 짐승의 보금자리를 찾기도 하고, 사냥감을 그물에 몰아넣기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노력이 민족지학적인 증거를 추구하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에 우리들을 인도할 것이다. 3절의 마지막에서, 민족지학자는 과학적 연구의 가장 최근의 결과에 관한 지식, 그 원리, 목적 등으로부터 자극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 주제를 여기에서 전개할 작정은 아니지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만 지적해 두고 싶다. 이론적 훈련을 충분히 쌓고, 가장 최신의 결과에 대해 잘 숙지를 한다는 것은 “선입견”을 가지고 조사에 임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가설을 검증하려고 결의하고 탐험에 나서서, 다른 증거에 직면해도, 자기 방식의 생각을 내던지는 것을 애석해 한다든지, 끝까지 의견을 수정할 수 없게 된다면, 그의 조사가 무가치한 것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조사현장에 보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임할수록, 그리고 사실로부터 이론을 쌓아 감과 동시에 사실을 이론과의 관계 하에 검토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조사연구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학문적 연구에서도 선입견은 해(害)가 되지만, 예시적인 문제들은 과학적으로 사고(思考)하려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재산이고, 이런 문제는 이론적 연구를 통해서 비로소 관찰자에게 명백해 지는 것이다.
민족학에서는 바스티안(Bastian), 타일러(Tylor), 모르간(Morgan), 독일 민족심리학파(German Volkerpsychologen) 등이 일찍이 여행가나 선교사들이 오래전에 남긴 조잡한 정보들을 재구성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개념을 심화하여 적용하고, 잘못된 정보와 개념은 서슴없이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문]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말리노브스키의 대표적 저술로서 아마도 인류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저술 중의 하나라는데 이의를 제기 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저술은 인류학의 방법론과 이론 양 측면에 걸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역작으로 꼽힌다. 무엇보다도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지금은 인류학조사연구의 전범이 된, 참여관찰(participant observation)을 통한 장기간의 현지조사에 기초하여 쓰인 최초의 인류학 민족지(ethnography)로서 민족학적 현지조사(ethnological fieldwork)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 저술에서 언급된 폭넓은 자료의 분석틀은 기능주의적 문화이론의 모태가 되었으며, 종교, 신화, 사회조직, 교역체계, 언어, 기술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론적 논의들을 불러 일으켜, 인류학 뿐 아니라 사회학, 종교학, 언어학, 심리학, 법학, 경제학 등 여러 학문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Bronislaw Kasper Malinowski, 1884-1942)는 20세기에 큰 족적을 남긴 인류학자였다. 말리노브스키는 폴란드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야기엘론스키 대학(Uniwersytet Jagiellonski, Jagiellonian University)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여 1908년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잠시 라이프치히(Leipzig)대학의 칼 뷔헤르(Karl Bucher)와 빌하임 분트(Wilheim Wundt) 교수 밑에서 경제사와 실험심리학을 사사하였으나, 프레이저(Sir James George Frazer)경의 『황금가지』(Golden Bough)를 접한 뒤 인류학이라는 학문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1910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웨스터마크(Edward Westermarck)와 셀리그만(C.G. Seligman) 교수의 지도 하에 본격적인 인류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최초의 저술은 1913년에 나온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가족』(The Family Among the Australian Aborigines)이었다. 말리노브스키는 1914년 셀리그만 교수의 도움으로 뉴기니에서의 현지조사경비지원을 받게 되었고, 뉴기니로 가는 길에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됨으로서, 영국의 전쟁 상대국이 되어버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국적의 소유자였던 말리노브스키는, 유럽으로 되돌아가는 대신 오스트레일리아의 속령 파푸아-뉴기니에 그대로 머물며 인류학 조사에 임했다. 그래서 그가 30세가 되던 해인 1914년에 파푸아의 남부해안에 거주하는 마이루(Mailu)부족에 대한 현지조사를 6개월 동안 실시하여 ?마이루 원주민?(The Natives of Mailu, 1915년)이라는 제하의 보고서를 펴냈다. 1915년에는 트로브리안드군도의 본 섬인 키리위나(Kiriwina)에서 8개월 동안 머물며 현지조사를 진행했는데, 이때에는 키리위나의 수도 오마라카나(Omarakana)에 텐트를 치고 살면서 집중적인 조사를 행하기도 했고, 키리위나의 여러 마을들을 두루 답사했으며,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현지 언어에 통달하게 된 것도 이때였다. 1916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잠시 머물며 바로마(Baloma, 트로브리안드 신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고, 1917년 9월에 말리노브스키는 트로브리안드를 다시 방문하여 1년 동안 조사를 계속했다. 이렇게 투론섬의 마이루족에 대한 조사와, 두 차례에 걸친 트로브리안드섬에서의 집중적 현지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1922년 펴낸 최초의 책이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이다.
말리노브스키는 그 이후 계속하여 트로브리안드사회에 관한 저술을 출간했는바, 1929년에는 트로브리안드의 남녀관계, 결혼, 가정생활을 다룬 『야만인의 성생활』(The Sexual Life of Savage)을, 그리고 1935년에는 농경과 토지제도(vol. 1), 주술과 농경의 언어를 기술한(vol. 2)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Coral Gardens and Their Magic)을 펴냈다. 그 외에도 1926년에는 『바로마: 트로브리안드섬에서의 사자와 정령』(Baloma: the Spirits of the Dead in the Trobriand Islands), 『야만사회에서의 범죄와 관습』(Crime and Custom in Savage Society) 같은 짧은 연구서들을 출간했다. 그의 책 『야만사회에서의 성과 억압』(Sex and Repression in Savage Society, 1927)은 트로브리안드섬에 관한 연구보고서는 아니지만 이 역시 트로브리안드의 조사연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트로브리안드에서의 현지조사의 결과물 중의 하나로 꼽아도 좋을 것 같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말리노브스키의 학문적 성과는 그가 트로브리안드섬에서 2년여를 보내며 수집한 현지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트로브리안드섬에서의 현지조사는 말리노브스키의 학문세계를, 그리고 더 나아가 영국의 사회인류학의 발전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는 공감대가 존재한다. 그래서 말리노브스키의 제자인 리치(Edmund R. Leach)는 “(영국의) 사회인류학은 1914년 트로브리안드섬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트로브리안드제도는 파푸아뉴기니의 동쪽 끝에서 북쪽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호섬들로서, 섬의 이름은 프랑스의 탐험가 당트르카스토(D'Entrecasteaux)가 1793년 명명한 것이다. 트로브리안드섬에는 멜라네시안계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오스트로네시안 언어(Austronesian languages)를 사용한다. 바로 이 섬에서 말리노브스키가 수집한 자료는 오늘날까지 인류학 문헌 중 가장 풍부하고 자세한 민족지학적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트로브리안드원주민들은 말리노브스키로 인하여 인류학에서 끊임없는 논의와 분석, 논쟁의 중심에 서왔다. 즉 인류학에서의 거의 모든 중요한 이론적 주제들, 예컨대 가족의 본질, 성적 개방과 사춘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뿌리, 친족호칭의 의미, 주술의 논리, 법과 질서의 근원, 신화의 해석, 의례의 기능, 경제적 활동의 사회적 의미 등과 관련된 쟁점들이 말리노브스키의 민족지학적 자료와 결부되어 논의되어져왔던 것이다. 특히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서는 쿨라(Kula)로 알려진 의례적 교환체계, 그리고 그에 관련된 주술체계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쿨라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단순히 개개인의 물질적 욕망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트로브리안드에서 말리노브스키가 관찰한 인간의 경제행위는 물질적인 교환과 소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해주는 하나의 매개수단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말리노브스키는 당대의 학자들이 미개인을 최소한의 노력이라는 경제법칙에 따라 자신의 욕구충족만을 실행하려하는 합리주의적인 존재로 개념화하는 것에 반대했다. 인류학설사적으로 보면 쿨라 고리(Kula ring)의 원거리 교환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맥락에 관한 자료는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증여론’에 영향을 주었고, 그 훨씬 뒤 경제인류학에서 형식론자와 실재론자 사이에 진행된 긴 논쟁의 한 축을 형성했다. 그리고 주술과 과학의 성격에 대한 말리노브스키의 통찰력은 인지인류학의 발달에 자극제가 되었다. 그 외에 생태인류학의 형성에도 말리노브스키의 트로브리안드에서의 연구가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말리노브스키의 저술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엇갈린다. 그의 기능주의이론을 심리학적 기능주의로 파악한 레드클리프-브라운(Radcliffe-Brown, A.R.)과 에번스-프리처드(Evans-Pritchard, E.E.)는 말리노브스키가 제시한 문화이론에 특히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적 측면에서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높게 평가하는 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말리노브스키가 제시한 조사방법과 자료에 관한 입장이다. 말리노브스키는 이 책에서 민족지학의 목표(goal of ethnography)를 “원주민이 갖는 사고방식 및 그것의 생활과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들 세계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이해하는 것” (p.58)으로 삼았다. 따라서 다른 사회를 이해하려면 그 사회의 삶의 방식에 몰입해야만 하며, 적합하고 가능한 것에는 무엇이든지 참여하고 또한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작용과 행동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이 최초로 완벽하게 반영된 저술이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이다. 그리고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말리노브스키의 이러한 현지조사 기록은 그 치밀함과 풍부함에 있어서 전무후무하다 할 정도로 탁월하다는 점이다. 실로 ‘참여관찰’이 인류학 연구의 중심적 방법이 된 것은 말리노브스키의 덕택이 아닐 수 없다.
인류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했을 때,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번역본 출간은 어찌 보면 한국인류학계가 풀어야할 숙제와도 같았다. 그동안 이 책의 번역에 쉽게 착수하지 못한 이유는 책의 내용이 방대하고, 난삽한 전문용어와 원주민 문화에 대한 이해부족 등이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인류학계도 인류학분야에서 손꼽히는 고전들을 번역하여 인류학 전공자 뿐 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연구자나 일반 독자들이 우리말로 번역된 자료를 가지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어느 학문이던지 기초가 튼튼해야하고, 그 기초는 고전을 읽는데서 출발한다는 명제는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을 완성하기까지 1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갔다는 표현은 번역작업에만 몰두할 수 없었던 제반의 사정 때문에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러다가 역자가 2007년 8월부터 1년 동안 버클리소재 캘리포니아대학의 방문교수로 가게 되면서 번역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지루하고 단조로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도움을 준 나의 아내 유승교님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끝으로 늦게나마 발간되는 이 번역본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류학적 연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더 나아가 인간과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12년의 가을에
友山 최 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