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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7830848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13-02-23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 삭풍이 불고……7
1. 풍류정(風留亭)에 부는 바람……33
2. 풍류정(風留亭)에 부는 파풍(破風)……58
3. 별궁의 여인들……79
4. 목숨을 구한 인연……112
5. 유폐궁의 높은 벽(壁)……137
6. 가슴에 날아든 나비……170
7. 폭풍 전야……195
8. 유폐궁에 부는 강풍(?風)……224
9. 피 끓는 이별을 하고……250
10. 이별 후愛……275
11. 전장에 별이 지고 피바람이 불지니……303
12. 결전의 북이 울리고……336
13. 사라진 경……371
14. 죽은 자와의 해후……387
에필로그 : 깊은 잠에서 깨어 보니……408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모두들 나가거라.”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 같이 흥청망청 이던 연회가 끝나고 막사로 돌아온 건은 휘장을 거칠게 젖히며 나직이 명령했다.
“나가라는데도!”
시립한 나인들이 입을 삐죽이며 나갔다.
“큭, 성질머리하고는…….”
소리죽여 키득거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건은 획 몸을 돌려 꽁지를 보이는 나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출신성분으로 놀림거리가 된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 발광을 해도 발광할 맛이 날 터였다.
삼 황자 건이 웃음거리라는 것은 그도 알고, 면전에서 저렇게 무엄하게 킬킬거리는 저들도 알고, 삼척동자도 알았다. 단지 신뢰를 담고 말똥말똥 올려다보고 있는 이 아이만 모르는 사실이었다. 오늘의 이 수모는 모두 이 철딱서니 탓이었다.
“아니지. 네가 뭔 잘못이겠느냐.”
건은 투덜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융!”
“예, 저하.”
어느새 그가 옆에 와 있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온 그가 건은 가끔 징그러웠다.
“벗겨라.”
혼자 갑옷을 벗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그러나 태자의 눈인 나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융이 말없이 투구와 갑옷을 벗겼다.
“흐읍…….”
긴장이 풀리니 미세한 움직임으로도 비명이 절로 나왔다. 생각보다 화살촉이 깊이 박혔던 모양이다. 융이 천을 둘둘만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그를 힐끔 올려다 본 후 고개를 흔들었다.
“필요할 것이옵니다.”
건은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 올렸다. 누구 앞에서도 나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융이 준비한 나뭇가지를 순순히 치웠다. 그는 눈치 못지않게 포기도 빠른 사내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권해도 건이 한번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단숨에 들이키시옵소서.”
대신 노루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건은 술을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벌컥벌컥 마시고는 구멍 난 오른쪽 어깨에 나머지를 부었다.
상처에다 불을 붙여놓은 듯 뜨겁고, 소금을 한바가지 부어 짓이기는 듯 고통스러웠다. 눈을 부릅떴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건은 눈조차 깜짝하지 않았다.
“으…….”
끝내 으르렁거리자, 마주보고 있던 아이의 눈이 경악을 담아 커지더니 휘둥그레졌다. 얼굴이 창백해졌고, 입술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피가 배어나왔다.
독한 것!
“이…… 허억, 이름이 무엇이더냐?”
그 모습 또한 거슬려 이 가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흑.”
아이가 흐느꼈다. 그러나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하, 고놈 참!
너도 나만큼 독한 인생을 살겠구나 싶은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감정이 북받쳤다.
필경 연민일 터.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가슴에 가득했던 분노를 밀치고 뭉클한 무엇이 들어차 싸해졌다. 불쑥 솟은 감정을 숨기려고 건은 더욱 퉁명스럽게 말했다.
“향…… 향이옵니다.”
“향이라…….”
그래, 너도 나와 같이 독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헉!”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경계를 늦춘 사이 빌어먹게도 단말마 같은 비명이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아득해졌다. 융이 어깨에 박힌 화살촉을 뽑았던 모양이다. 아주 잠깐 정신을 놓았다.
‘마, 마마, 으앙!’
언뜻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어머니의 울음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여자의 눈물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황자를 낳았어도 여전히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의 비단손수건은 마를 날 없었다. 당신은 전장에서 군사의 뒷간으로 사용되는 성노였다. 지금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향이처럼 말이다.
전장으로 버려지는 성노는 성은을 입었어도 신분이 상향되지 못했다. 아무리 성은을 입었다고 해도 일회용으로 사용되고 난 후 다음 군사에게 넘겨졌다. 그렇게 이용되다가 병들어 죽어갔다.
그들 대부분은 반기를 들어 패망한 제후국(諸侯國)의 귀족이었거나 궁녀였다. 패망한 왕족의 식솔처럼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삶 역시 처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얼굴이 반반했던 건의 어머니처럼 황실가족이 독점했을 경우에는 그들보다 나은 삶이 보장되었으나, 그것 역시 오십보백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멸시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그 자손은 명목만 황실자손이었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전날 어린 향을 보고 잠시 마음이 느슨해진 것이 화근이었다. 두고두고 경의 놀림감 신세를 못 면하리라. 그러고 보니 벌컥 성질이 돋았다.
“시끄럽다!”
“흑.”
“시끄럽대도!”
벌떡 일어나 앉아 향을 노려보았다.
“제기랄…….”
느닷없이 움직인 터라 핑그르르 눈앞이 아득해지며 현기증이 돌았다.
“내 앞에서 다신 울지 말거라.”
건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뜬 채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마치 그 자신을 보는 듯했다. 성노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의 가엾은 처지는 두려움에 부들부들 떠는 저 아이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 두려움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안으로 삭이려는 아이의 눈이 가슴에 자꾸 남았다.
저 눈빛, 자꾸만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끅.”
향이 입술을 깨물고는 눈물을 삼켰다. 소매로 눈자위를 야무지게 훔치고, 꺽꺽거리면서 울지 않으려 애썼다. 건은 혀를 차며 침상에 벌렁 누웠다. 팔뚝으로 눈을 가리고는 욱신거리는 어깨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어 독기를 불러일으켰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아이의 껄떡거리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팔뚝 밑으로 힐끔 보니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일어나 앉자, 향이 억지로 잠을 떨어내려고 황급히 눈을 비볐다. 또 다시 약하게 만드는 뭔가가 스며들더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졸리느냐?”
“…….”
“자, 업혀라.”
“마, 마마…….”
그가 등을 내밀자, 놀란 향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뒤로 주춤 물러났다.
“업히라는데도!”
짜증이 밴 음성으로 윽박질렀더니, 화들짝 놀란 향이 등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여파로 상처가 비명을 질렀다. 건은 신음을 삼키며, 향을 업고 일어섰다.
“자장, 자장, 우리 아기.”
등에 업힌 아이는 뻣뻣하게 경직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건은 나지막이 자장가를 부르며 막사 안을 서성였다. 아이에게 펼쳐진 미래가 안쓰러운 나머지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어느 듯 따스한 것이 푹 기대어오더니, 흘러내리려 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보아하니 잠이 든 모양이었다. 건은 상처를 짓누르며 흘러내리는 향을 단단히 들쳐 업고, 이를 악물고는 막사를 조금 더 서성였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지랄 같은 하루였구나.”
그렇게 십칠 세 건의 천형 같은 하루가 저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