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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한.중 항일투사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원희복 (지은이)
  |  
공명
2015-08-15
  |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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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책 정보

· 제목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한.중 항일투사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97870103
· 쪽수 : 320쪽

책 소개

광복 70주년을 맞아 항일투쟁가 부부의 평전이 나왔다. 한국인 남편 김찬과 중국인 아내 도개손 부부의 평전이다. 부부가 나란히 평전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두 사람의 항일투쟁이 대등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죽음까지 함께했기 때문이다.

목차

추천의 글_광복 70주년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김찬·도개손의 삶|이덕일(역사학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작가의 말_망각 속에 묻혀 있던 김찬과 도개손의 짧은 삶을 꺼내며
프롤로그_1939년 연안의 겨울

1장 운명을 느끼다
1. 1911년 진남포, 혁명아의 고향에서 태어나다
2. 1922년 중국 통주, 혁명가의 싹을 키우다

2장 혁명가와 연인의 이름으로
3. 1929년 상해, 혁명가의 길을 걷다
4. 1930년 북경, 영원한 동지이자 연인 도개손을 만나다

3장 혁명가 김찬
5. 1931년 조선, 혁명적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
6. 1932년 진남포, 삼성정미소 파업을 조종하다
7. 1932년 경성, 위기일발 도피하다
8. 1932년 선천, 45일간 고문을 이겨내다
9. 1933년 신의주형무소, 혹독한 겨울과 싸우다
10. 1934년 상해, 국경을 초월해 사랑하다
11. 1936년 만주, 할빈에서 위기를 넘다
12. 1936년 다시 북경, 나란히 항일투쟁에 나서다
13. 1937년 연안, 혁명의 성지가 공포의 땅으로 바뀌다

에필로그_1982년, 43년만의 복권

저자소개

원희복 (지은이)    정보 더보기
<경향신문>에서 주로 정치, 공무원, 재난 관련 기사를 많이 썼다. 특히 ‘원희복의 인물탐구’라는 제목으로 모두 211명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는 연재물을 썼다. (재)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기관지 <민족화해> 편집인, (사)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1995), 《국가가 알려주지 않는 공무원 승진의 비밀》(2011), 《한국인 안전사전》(2013), 《보물선 돈스코이호 쫓는 권력 재벌 탐사가》(2015), 《사랑할 때와 죽을 때》―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 도개손 평전(2015), 《르포히스토리아》―서대문형무소에서 팽목항까지(2016), 《촛불민중혁명사》(2018) 등이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그는 80년 전 혹독한 일제 강점기 조선 경성과 진남포, 중국 북경과 상해, 만주, 그리고 연안까지 중국대륙과 조선을 누비며 혁명적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김찬도 신문지상에 김단야, 조봉암, 김형선, 김명시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항일투사들과 나란히 사진이 오를 정도로 유명했다. 조봉암과 함께 신의주 형무소의 혹독한 겨울을 나기도 했다.
김찬 역시 억울하게 죽었고 곧 잊혀졌다. 일제강점기라는 이유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시도했던 혁명적 노동운동은 의열단 활동이나 폭탄 투척과 달리 분명하고 뚜렷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김찬이 이국땅 중국에서 쓸쓸히 죽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김찬·도개손 한·중 항일 부부 역시 숨어 있는 인물을 발굴한 것이 아니라, 조용수처럼 우리 역사의 집단 망각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김찬은 너무도 짧았던 삶을 자신의 신념을 위해 불사르다 사라진 젊은이다. 나는 그렇게 한 시대, 한 상황에서 당당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을 좋아한다. 또, 나는 최용수 교수의 평가대로 김찬과 도개손을 님 웨일스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라고 믿는다. 최용수 교수는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은 조선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 사실이 거의 없다. 특히 장지락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처형장소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김찬은 1930년대라는 시간대와 조선과 중국이라는 공간대에서, 특히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차라리 남편의 그 흉악한 몰골을 안 보는 편이 나았으리라. 도개손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온 도개손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몰래 숨겨온 가위로 자신의 눈을 찔렀다. 솔직히 너무나 두려웠다.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했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곧 사방이 어두워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가위를 목에 대고 힘껏 힘을 줬다. 역시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어렴풋이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녀는 손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개손은 자신이 숨을 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한쪽 눈에 붕대를 감고 있어 여전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갑자기 눈과 목에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입을 벌릴 수조차 없었다.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손을 잡고 흔들며 깨우는 것을 느꼈다.
도개손의 여섯째 언니 도유손(陶愉?)이 한쪽 눈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시야에 들어왔다. 언니의 얼굴은 극도의 근심과 안쓰러움으로 핼쓱했다.
“……도대체 그렇게 알아듣게 말했는데, 왜 이러니…….”
앞뒤가 잘린 말이지만, 도개손을 탓하는 대목 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언니는 무척 화난 표정으로 단호하게 다그쳤다.
“이제 조선인 김찬을 포기하란 말이야! 너만 결심하면, 살 수 있어. 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조선인 남자 하나 때문에 네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니. 식구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도개손, 이제 제발 마음을 돌려!”
언니 도유손은 거의 애원하듯,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근 한 달 넘게 계속 듣는 말이었지만, 도개손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나는 그 사람을 포기할 수 없어요. 나와 그 사람에 대한 죄상이 진실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나와 그 사람에 대한 진실이 조작된 이상, 나만 조작된 거짓에서 빠져나올 순 없어요. 이것은 그이와의 사랑 이전에 진실을 위한 싸움 문제예요.”
도개손은 단호하게 말했다. 도개손은 자신이 살기 위해 이 거짓 판결에 승복하는 것은 자신이 남편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뻔히 함께 항일투쟁을 했는데, 남편을 부인하라는 것은 자신을 일제 간첩으로 조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김찬과 도개손은 아무런 말도 없이 쌓여 있는 흰 눈을 바라다보았다.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탕! 탕! 탕!”
장총 소리가 마가구 계곡을 진동시켰다. 도개손은 비스듬히 기댄 김찬과 장총 소리를 하나하나 셌다. 마치 어린아이가 셈을 배우듯 두 사람은 조용히 총소리를 따라 셌다.
“9발, 10발, 11발, 12발……”
더 이상은 셀 수 없었다. 총소리는 메아리로 다시 김찬과 도개손 귀에 돌아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중국공산당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는 “연안에서 많은 인물이 강생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됐지만 강생이 1년 넘게 처형을 고심한 인물이 바로 김찬과 도개손 부부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처형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고 처형기록을 모두 파기한 유일한 사례”라고 말했다.
<프롤로그> 중에서

일제 경찰의 고문을 견딘다는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였을 것이다. 조봉암이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이후 20여일 만에 조봉암과 연계된 조직이 줄줄이 체포됐다. 이것은 조봉암이 20여 일간 고문을 견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강문석, 이종설, 김승락, 장동선, 이무성 등이 검거됐다. 이들은 평북경찰부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중 김승락(金承絡)은 일제 경찰의 고문으로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앞서 이 사건의 처음 구속자 민봉근 역시 경찰 수사를 받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사망했다. 일제 경찰은 민봉근의 사망 사실을 계속 숨겨오다 재판정에서 김찬 등 피고들의 주장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과 관련된 피의자 2명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일제가 이 사건의 배후를 밝히는 데 얼마나 집착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 치하에서 단일 사건으로만 2명이나 고문으로 사망할 정도의 사건은 별로 없었다. 김찬은 그런 잔인한 고문을 무려 45일이나 견딘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를 심문했던 일제 경찰이 자백 순간을 수기로 남길 정도였다. 그를 심문했던 평북경찰부 스에나가 하루노리(末永淸憲) 의 수기를 보면 그는 이미 체포된 김단야의 처 고명자, 김형선의 여동생 김명시 등으로부터 진술과 기타 증거품이 있어 취조가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찬은 그들의 예상을 깨고 윗선인 김형선과의 관계에 대해 자백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혹독한 고문을 견디며 배후를 숨겼던 것은 상해에 있는 김형선과 김단야, 박헌영의 안전한 도피 시간을 벌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를 취조했던 평북경찰부는 “검거하여 45일 만에, 곧 1932년 10월 25일에 이르러 김은 입을 열어 자기 범죄의 일체를 진술했다. 종래 다수 사상범 중 검거 후 45일까지 자기 범행을 전면 부인한 인물은 김찬 외에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보통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체포되면, 곧이어 차상위 조직이 검거되는 양상을 보인다. 한 예로, 1926년 6월 6일 밤부터 체포된 제2차 공산당 사건 관련자 박래원(朴來原)은 불과 하루도 못 버티고 자백했다. 결국 이튿날 공청(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이 체포되고 말았다. 1926년 7월 17일 체포된 강달영은 혹독한 고문을 5일간 견디며 22일 새벽에 자백(조직의 암호문 일부를 풀었다)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49명의 동지들이 체포됐고 강달영은 자책감으로 자살을 시도한 끝에 결국 미쳐버렸다. 하지만 1932년 10월 25일 김찬이 자백한 이후 그 윗선이 체포된 사례는 12월 16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된 홍남표 외에는 없다.
(……)
10월 25일, 김찬의 자백이 시작됐지만 김찬은 철저히 자신의 윗선을 김형선까지만 자백했다. 그의 <예심결정서>에는 김형선을 상해공원에서 우연히 만났고, 경성에서 김형선으로부터 <코뮤니스트>를 받아 배포했다는 점만 강조했다. 김단야와 박헌영 등 다른 사람의 이름은 일절 거론되지 않았다. 김찬의 진남포 집을 수색한 일제 경찰은 서적과 편지 등을 압수했다. 여기서 발견된 서신 등에 의해 12월 16일, 평북경찰서는 진남포청년동맹원 김명우와 장성철, 그리고 장임순, 장희보 등 정미소 여직공을 추가로 검거했다. 김찬이 진남포 삼성정미소 파업을 배후에서 조정한 진상은 이렇게 해서 드러난 것이다.
<8장_1932년 선천, 45일간 고문을 이겨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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