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개의 경전

서문

1. 실종
2. 다락방
3. 아수라
4. 맹점
5. 성전
6. 종말
7. 중독
8. 경계
9. 고독
10. 악몽
11. 예언
12. 응시
13. 매혹
14. 초월

발문

누구나 빈 칸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빈 칸에서 외로이 살다가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지옥의 문에서 환승하는 승차권을 받고 다시 다른 열차를 타기 위하여 잠시 행성의 간이역에서,

홀로 서성거리다가 섬처럼 주저앉는다 이윽고 거친 파도와 폭풍우에 휩싸여 고통의 물결 속에 잠겨 익사한다 폭파공법으로 해체하는 오래된 건물처럼 인생도 폭삭 무너져내린다 낡은 시간의 잔해들―
아주 짧은 이승의 찰나, 질주하는 시간의 말발굽 아래 풍경들 흘러가고 뒤로 젖혀진 허무의 목덜미가 너무 창백하다 그러므로 아낄 만하지 않느냐? 사랑하기에도 너무 짧은 우리의 시린 빈 칸이지 않느냐?

빈 칸은 시간의 적분,
영에서 무한대로―시간을 환산한 허공의 체적이다

찰나의 허깨비 불러다놓고
쪽지시험을 치는 우주의 교실,
여전히 무료하다 어느새 타종이 울리고 시험이 끝나자 답장이 거두어진다 정답도 오답도 뒤섞여있는 단 한 장의 시험지를 위하여 우리는 긴 밤 지새우며 얼마나 고단하였는지 저마다 성적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침에 나섰던 그 길 따라 저녁이면 다시 처음 그 집에 당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