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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역사
· ISBN : 9788998625085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15-04-2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 감동적인 우리 역사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part 1 우리 문화유산을 다시 보다]
01 고인돌과 온돌, 우리 민족의 돌 이야기
세계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한반도의 고인돌
우리 민족 고유의 난방 방식, 온돌
▶ 마주보는 세계사 -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영국의 스톤헨지
02 궁궐 자리에 세워진 최고의 건축물, 황룡사 9층목탑
아파트 30층 높이의 목탑을 세우다
황룡사 9층목탑에 담긴 신라인들의 염원
▶ 마주보는 세계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은 무엇일까?
03 수학과 과학을 품은 위대함, 석굴암과 첨성대
완벽한 비례의 조형물, 석굴암
하늘의 숫자를 첨성대에 담다
04 고려의 찬란한 문화유산, 고려청자와 직지심체요절
천하제일의 비색, 고려청자
직지심체요절과 박병선 박사의 삶
▶ 마주보는 세계사 -구텐베르크 인쇄술, 유럽 사회의 변혁을 이끌다
05 제작도 보존도 경이로운 문화재, 팔만대장경
16년 동안 이어진 팔만대장경 제작
팔만대장경이 8백년간 온전할 수 있었던 이유
▶ 마주보는 세계사 -호국불교 사상은 어떻게 등장하였을까?
06 한글이 위대한 또 하나의 이유
최만리의 반대와 세종의 인간적인 고뇌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의 한글
▶ 마주보는 세계사 -문명 발생의 중요한 요소, 문자의 발명
07 책과 능이 간직한 조선 500년의 역사
기록 문화의 최고봉, 조선왕조실록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이유
08 고대부터 조선까지, 천문학이 발달한 나라
기록으로 남은 우리 천문학의 우수성
고인돌부터 칠정산까지 천문 과학의 발자취
[part 2 그들의 감동적인 삶을 되새기다]
09 중국 너머 서역에까지 진출한 고구려인
고구려 사절,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다
파미르 고원을 넘은 대원정, 고선지 장군
▶ 마주보는 세계사 -이슬람의 기록에 등장하는 신라
10 고대 동아시아의 큰손, 장보고
동아시아의 허브, 청해진과 장보고의 꿈
신라와 당나라를 잇는 장보고의 루트
11 일본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친 한국인들
일본 불교계의 추앙을 받은 원효의 사상
강항, 일본 성리학의 뿌리를 내리다
▶ 마주보는 세계사 -눈이 멀어서도 일본으로 향한 승려, 감진
12 화약과 목화는 쉽게 들여온 게 아니었다
과학자이자 무관이었던 최무선의 집념
문익점이 목화를 재배하고 면을 생산하기까지
▶ 마주보는 세계사 -중국의 4대 발명품 이야기
13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구한말의 여인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의사, 박에스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 윤희순
▶ 마주보는 세계사 -백년전쟁의 영웅, 프랑스 여인 잔 다르크
14 헤이그 특사 3인을 다시 생각하다
서양 언론에 보도된 특사 3인의 활약
낯선 땅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이준
15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들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회영 일가
난봉꾼이라 불리기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운동가, 김용환
▶ 마주보는 세계사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진심
16 애국의 길에서 가족과 마주하다
아내에게 보낸 안창호의 편지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 마주보는 세계사 -옥중에서 딸에게 쓴 편지, 세계사 편력
17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
국민을 독일로 보내야 했던 나라, 떠나야 했던 사람들
독일에서의 삶 그리고 대한민국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6세기 중반 진흥왕이 재위하던 때는 신라의 전성기입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던 시기이지요. 바로 이 무렵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궁궐이 얼마나 웅장하게 지어질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궁궐 건축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궁궐이 절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그 절이 바로 황룡사입니다. 황룡사는 궁궐을 지으려던 자리에 절을 지었으므로 규모가 큰 게 당연했지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의 대표적인 절이 불국사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굴된 흔적만으로도 황룡사의 면적은 불국사의 약 8배 넓이에 이른다고 합니다.
- <아파트 30층 높이의 목탑을 세우다> 중에서
조선왕조의 실록은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왜 철종까지일까요? 그 뒤에 고종도 있고 순종도 있는데 말입니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실에 대한 기록의 왜곡 여부입니다. 실록이 갖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는 엄격한 편찬규례입니다. 그런데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7~193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실록이 가지고 있던 엄격한 편찬규례를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근대화 과정의 여러 사실과 조선왕실(혹은 대한제국 황실)의 동정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요.
- <기록 문화의 최고봉,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8만 개가 넘는 경판에 새겨진 글자 수는 5천 2백만 자가 넘는다고 합니다. 수가 너무 크니까 실감이 나지 않을 텐데, 이 글자 수는 약 500년 동안 기록되어 온 조선왕조실록에 조금 못 미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경판에 글자를 새기는 전문가들이 글자를 새길 때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절을 했다고 합니다. 목판은 글자 하나만 틀려도 경판 자체를 다시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감을 갖고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심으로 이를 이겨내기 위해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절을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글자를 새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절을 했어야 할까요.
- <제작도 보존도 경이로운 문화재, 팔만대장경> 중에서
그들 6형제의 삶의 마지막은 우리를 많이 안타깝게 합니다. 6형제 중 장남인 이건영은 1940년에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둘째 이석영은 1934년에 순국하였는데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명문가의 둘째 아들이 굶어 죽었다니,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셋째 이철영은 서간도에서 독립군 양성을 주도하던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1925년에 순국하였습니다. 넷째인 이회영은 만주 일본군 사령관 처단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풀려나지 못한 채 끝내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모진 고문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섯째는 1933년에 베이징에서 가족과 함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6형제 중 다섯 명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것입니다. 오직 6형제 중 다섯째인 이시영만이 조국의 광복을 보았습니다.
-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회영 일가> 중에서
사실 독립운동가로서 김용환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을 우리는 주로 기억하고 있지요. 하지만 교과서 등에서 다루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각자의 분야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온 분들은 정말 많습니다. 그렇게 이름마저 남기지 못한 분들도 정말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3·1운동 하면 유관순을 주로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 당시 열두 살에 불과한 이름 모를 어떤 학생은 만세운동을 하다가 총에 맞았어도 왜놈의 치료를 받지 않겠노라고 외치다 죽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작성한 죄수 기록에는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해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고문으로 병들고 혹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하지요.
- <난봉꾼이라 불리기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운동가, 김용환> 중에서
‘장부출가 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
이 말은 집을 나간 장부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편지를 본 가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솔직히 오늘날의 입장에서 한 집안의 가장이 이 같은 편지를 남기고 떠났다면 정말 무책임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을 테지요. 실제로 윤봉길은 15세에 결혼했기 때문에 23세 때는 이미 아내와 자식을 둔 가장이었지요. 그러한 윤봉길이 집을 떠난 것입니다. 하지만 윤봉길은 결연히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였고, 그의 가족도 이를 나라 잃은 백성이 짊어져야 할 숙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중국으로 떠났지만, 그도 인간이었기에 마음이 많이 아팠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남긴 글에서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라는 표현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중에서